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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5화 (15/110)

15

테레사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잠시 지켜보던 세실레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테레사는 그녀를 도망치게하려 했고 그 광경을 아르베우타가 목격했다.

운이 나쁘면 잡히는 순간, 참수형에 처 해질지도 몰랐다.

세실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러나 테레사가 견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

“저는 폐하만을 따를 것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이었다. 그럼에도 세실레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고마워.”

그런 세실레를 지켜보던 테레사가 재차 물었다.

“당장 제국을 떠나는 게 어떠십니까.”

테레사의 제안에 세실레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테레사에게 낱낱이 말해줘도 될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인제와 테레사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세실레는 스스럼없이 자기가 겪었던 일을 토로했다.

“실은 이미 나가 보았는데.”

“…….”

“바다로 가는 순간 힘이 옅어졌어. 파도도 거세지고…… 꼭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만뒀어.”

“그러셨습니까.”

테레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별달리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믿지 않는 거겠지.’

당연했다. 쉬이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테레사는 세실레가 이능을 쓸 수 있게 되었단 사실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세실레는 곧 의문을 품었다.

‘왜 궁금해하지 않지?’

테레사는 방금 세실레의 힘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깜짝 놀랄만한 이능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여상스러웠다.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설마 알고 있었던 걸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세실레는 테레사를 보며 물었다.

“테레사 혹시 내가 이능을 쓸 수 있단 걸 알고 있었어?”

“……들었습니다. 사방에 천사가 나타났던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폐하께서 드디어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

“네, 폐하께서 사라지신 후로 악령이 날뛰고 있으니까요. 분명 폐하께도 무언가 변화가 있으리라 추측했을 뿐입니다.”

그럴듯한 대답에 세실레는 더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아, 발 디디고 선 아래를 보았다.

깊은 산 중, 특유의 흙내와 나무가 어우러진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새벽의 공기는 사람을 침착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잠시나마 흥분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세실레는 멍하니 신전 앞의 호숫가를 눈에 담았다.

잔잔한 잔물결이 이는 호수를 계속해서 응시하던 세실레의 입에서 희미한 물음이 흘렀다.

“테레사.”

“말씀하십시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어?”

“제국이 있는 오키드리아 대륙만 벗어난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테레사의 목소리엔 한 치의 망설임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렇구나.”

단조롭게 중얼거리던 세실레의 머릿속에 언뜻 의문이 떠올랐다.

왜 굳이 오키드리아 대륙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분명 방금 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생각해보니 알케덴의 경우도 그랬다. 알케덴은 항구도시인 만큼 바다와 인접해있었다.

그 말은 곧 타 대륙으로 이동하기에 용이한 위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알케덴은 수도에서 절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도리어 옆 나라 르덴 왕국이 더 가까웠다.

여러 사항을 고려해보더라도 르덴 왕국을 통해 다른 나라로 가는 편이 더 편리하고 빠를 터였다.

그런데 테레사는 알케덴으로 가라고 했다. 게다가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라고까지 했다.

이 년 전에도 지금도 테레사는 계속해서 오키드리아 대륙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그 순간 신화의 내용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렌디의 딸이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대륙은 바다에 가라앉고 제국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설마…….”

생각에 깊이 잠긴 세실레는 저도 모르게 의문을 토해냈다. 의문 어린 시선이 테레사를 향했다.

세실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테레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저와 함께 오키드리아를 벗어나시겠습니까.”

“……오키드리아를?”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저들은 당신을 저버린 이들이니.”

테레사가 크게 숨을 들이켠 뒤, 형형한 시선으로 세실레를 응시하며 말했다.

“천벌을 받아도 족하지요.”

그녀의 말에 세실레가 숨을 들이켰다. 테레사가 말하는 것이 명확했다.

그녀는 지금 신화의 내용을 언급하며, 세실레 더러 이 땅을 버리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내용에 세실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어째서 자신의 충실하던 호위기사가 저렇듯 어마어마한 말을 입에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실레가 아는 테레사는 말수는 적지만 맡은 일에 충실한 이였다.

여자의 몸, 그것도 평민 신분으로 처음 기사 작위를 받은 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녀를 선망하는 이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목숨을 바쳐 지키리라 맹세한 황실을, 제국을 저버리자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분위기마저 바뀌었다. 더는 그녀에게서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테레사의 행동에 세실레의 입매가 꾹 다물리자 테레사가 갑작스레 부복했다.

깊이 고개를 숙인 탓에 단정히 묶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테레사의 뺨을 가렸다.

때문에 세실레는 테레사의 표정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테레사의 목소리와 행동만큼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주제넘었습니다.”

“…….”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저 따르겠습니다.”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작위뿐인 황후에게 충성하는 유일한 기사.

어느새 테레사는 세실레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전엔 테레사조차 가식으로 대했던 때가 있었다. 그녀가 저에게 충성할 리 없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의심을 거둘 때였다.

세실레의 입가에 씁쓰름한 웃음이 맺혔다.

“아무려면 어때. 난 괜찮아.”

세실레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녀는 테레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니 테레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든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대신 세실레는 아래에 부복한 기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와 황실에 돌아갈래?”

“어째서 돌아가시려고 하십니까?”

날 선 물음에 세실레는 대답 대신 숨겨 놓았던 패물을 꺼냈다. 그러곤 테레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테레사가 당황한 눈초리로 물었다.

“이건…….”

“가져. 약소하지만 말이야.”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더 많은 걸 줄게.”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테레사의 목소리에 오기가 어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그녀의 말을 반쯤 스쳐 들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그녀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르며 빛났다.

그 순간 찬란한 빛무리가 세실레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녀가 자랑하듯 기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실레는 여느 때보다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봐, 대단하지?”

“굉장하십니다.”

“역시……놀라지 않네.”

테레사는 마치 이 힘을 알고 있는 듯 초연했다.

그렇다는 건, 세실레가 테레사를 지킬 힘이 생겼다는 걸 알고서도 제국을 떠나려고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세실레는 테레사와 뜻을 함께할 수 없었다. 만약 세실레가 제국을 떠날 생각이었다면, 벌써 떠났을 테니까.

하지만 세실레는 제국에 남을 생각이었다.

이 힘이, 우습지도 않은 성녀란 칭호가 발목을 붙잡는다면 기꺼이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죄책감에 질식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감정을 정리하곤, 테레사를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르덴 왕국으로 보내줄게. 원하는 어디든 가렴. 너라면 어디서건 잘 적응하겠지.”

“저를 내치시려는 겁니까?”

“……내치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세실레가 테레사를 보며 쓰게 웃었다. 덩달아 테레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테레사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언제 그런 이가 있었냐는 듯, 테레사가 부복했던 자리에 짓눌렸던 잔디조차 다시금 파릇하게 피어났다.

세실레는 테레사가 있었던 자리를 잠시 응시하다, 더는 달이 뜨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공기가 차네.”

어두운 하늘 위로 악령들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감히 세실레의 곁엔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노리듯 그녀의 근처를 서성였다.

언제고 세실레가 무너지면 그녀를 먹어치우겠다는 듯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입을 쩝쩝 다셨다.

“좋은 날이야.”

세실레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바람이 나부끼며 매서운 울음을 뱉어냈다.

그러나 세실레의 표정은 지독히도 차분했다.

이윽고 끈 떨어진 인형처럼 세실레의 몸이 천천히 늘어졌다.

세실레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댔다.

‘마지막이겠지.’

이걸로 이곳과의 인연도 끝이었다. 날이 밝으면 그녀는 제 발로 지옥 같은 황궁에 걸어 들어갈 예정이었다.

***

세실레를 놓치고 난 후, 아르베우타는 망연자실하여 흉포하게 날뛰었다.

그는 차츰차츰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털이 온몸을 뒤덮고 흰자위마저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났다. 몸집도 점점 커져, 어느새 집채만 해졌다.

알케덴의 주민들은 아르베우타를 발견하자마자 비명을 질렀고 아르베우타는 그런 이들을 마구 학살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캬르릉!”

날카로운 괴수의 음성이 흐르던 차 아르베우타의 앞에 무언가가 던져졌다.

그것은 아주 낡은 두루마리였다.

“크릉?”

이미 정신을 놓은 듯, 지도를 먹어치우려는 아르베우타를 향해 쟈르스가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캬아악!”

그러나 괴물이 되어가는 아르베우타가 쟈르스의 말을 순순히 들을 리 없었다.

도리어 제 학살의 첫 번째 표적을 정했다는 양, 쟈르스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라면 쟈르스는 괴물로 변모한 주군의 손톱에 갈기갈기 찢길 터였다.

그러나 쟈르스의 안색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도리어 느긋하게 아래로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혀를 찰 뿐이었다.

“쯧, 황제가 아니라 짐승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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