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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4화 (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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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언제 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식욕이 뚝 떨어졌다. 한껏 골라 담은 디저트도 이젠 번거로운 짐에 불과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면 힘이 나지 않았다. 우선은 식사할 때였다.

‘그래. 디저트도 샀으니까 이제 식사하러 가자.’

세실레는 애써 힘을 내서 음식점을 찾았다. 음식점에 가기로 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근처에 다가갔을 뿐인데도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대화 소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때마침 세실레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도 비어있었다.

그녀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 디저트 봉투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손을 들어 어정쩡한 자세를 한 주인장을 불렀다.

“주문이요!”

“네! 아이고, 또 오셨네요.”

주인은 서둘러 주문을 받았다. 세실레는 대충 메뉴판을 가리켜 아무거나 주문했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으니 식욕이 돋지 않았다.

‘괜히 왔나.’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체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세실레는 가게를 나서기로 결심했다.

‘우선 가서 쉬자.’

세실레는 벗어놓았던 로브를 다시금 걸친 뒤, 테이블 위에 음식값을 내려놓았다.

의아한 행보에 가게 주인이 서둘려 달려와 물었다.

“손님, 드시지 않고 가십니까?”

“으응. 오늘은 속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디저트 봉지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세실레는 결국 디저트도 가게 주인에게 내밀었다.

“이건 자네가 들게나.”

“아, 예에.”

평상시와 다른 단골손님의 행보에 주인장은 의아했지만, 거절할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귀한 디저트를 덥석 받아들었다.

세실레는 미련 없이 가게를 나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세실레는 어서 거처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웬 패거리가 나타나 세실레의 앞을 막았다.

‘하필 이런 때에.’

세실레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무리는 쉬이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서 돈 잘 쓰는 노파의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대놓고 흉기를 휘두르며 세실레를 위협했다.

“어이, 할머니. 당신이 그리도 돈이 많다던데.”

“……이것 가지고 비켜주시오.”

“오오, 이렇게 순순히 내놓는 거야? 할머니 정말 부자인가 봐?”

그러나 그들이 순순히 물러설 리가 없었다. 난리가 난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을 등쳐 먹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이 되었다.

하물며 약자인 노인이야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그들은 대놓고 세실레의 어깨를 툭툭 쳐대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말해봐. 돈 얼마나 있어? 어디 살아? 같이 나눠 먹으면 좀 좋잖아, 안 그래?”

비아냥거리는 투였으나 세실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실레는 이미 제 몸에 은빛 기운을 몸을 둘렀고 그것은 어지간한 갑옷과는 비견할 수 없이 단단했다.

그러니 그들의 무력은 세실레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이 흉포한 무리를 소문 없이, 조용할 처리할 방법이 무엇일지.

‘어떡할까.’

세실레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다,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들을 적당히 구석진 골목으로 꾀어낸 다음, 기절시키기로 한 것이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세실레는 고개를 들어, 껄렁대는 이들을 쳐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더 많은 돈을 주면 물러설 테냐?”

“어, 어! 그럼, 당연하지!”

세실레의 물음에 바닥에 침을 찍찍 뱉어대던 이들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앞에 순해진 그들을 두고 세실레가 몸을 돌렸다.

“그럼 따라와.”

패거리는 순한 개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세실레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순순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곳에서 난동을 피웠다면, 어쩔 수 없이 힘을 보여야 했을 테니까.

힘의 조절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노파가 젊은 사내 여럿을 이겨버리면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세실레는 그게 싫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다음번엔 젊은 남자로 변신해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세실레는 아주 어둡고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굽이진 골목은 패거리들조차 난색 할 만큼 캄캄했다. 사방에선 더러운 시궁창 냄새가 났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세실레가 패거리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때, 누군가가 세실레의 앞을 막아섰다.

그곳엔 테레사가 있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나로 묶은 채, 매서운 눈으로 뒤의 부랑배들을 노려보던 테레사는 주저하지도 않고 그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테레사의 등장에 세실레의 음성이 옅게 떨렸다.

“테, 테레사?”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인사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공돈을 얻을 생각에 즐거워하던 이들의 위로 매서운 검격이 떨어졌다.

평범한 동체 시력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움직임에 부랑배 무리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입만 떡 벌렸다.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를 겨를조차 없었다. 테레사가 그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칼집으로 등을 호되게 후려 맞았다.

“으어억!”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부랑배 무리는 의식을 잃었다. 한 사람은 입가에 흰 거품을 물었을 정도였다.

무리를 처리하고서야, 테레사가 세실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채 일이 분이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정적인 움직임에 갖춰 입은 옷가지는 한 점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세실레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렀다.

“테레사, 너…… 대단하구나.”

“과찬이십니다.”

테레사는 계속 부복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직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세실레의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테레사. 일어나도 돼.”

“네.”

“그리고 내 앞에선 그렇게 예법에 연연하지 않아도 돼.”

“……명령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테레사의 정중한 목소리에 세실레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무려 이 년만이었다.

이 년 만에 처음 마주한 황실의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녀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세실레를 도주하게끔 도와준 사람임에도.

세실레는 잠시 침묵하다, 테레사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테레사. 혹시 날 데리러 왔어?”

세실레는 그리 말하면서도 테레사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는 달리, 테레사는 말짱해 보였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세실레는 걱정이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테레사가 그녀더러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끌려가듯 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날 놓치면 테레사가 벌을 받을 테지.’

세실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하필이면 테레사였다.

그녀가 테레사에게 빚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보낸 걸지도 몰랐다.

깊이 생각에 잠긴 탓에, 세실레는 테레사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는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테레사가 세실레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난리판에 흐트러진 세실레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

“행복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테레사의 얼굴에 은은한 웃음이 맺혔다.

상냥한 어투에 세실레의 불안도 조금씩 잦아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세실레는 자신이 아주 무례한 질문을 했음을 자각했다.

‘도와준 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는커녕, 의심이나 하고 있었다니.’

세실레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테레사가 세실레를 꼭 껴안았다. 그러곤 세실레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폐하. 당신을 황궁으로 끌고 가려는 무리가 코앞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니 당장 도망치십시오.”

테레사의 말에 세실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불안한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존재감만으로도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이가 저 앞에 있었다.

붉은 눈자위를 번뜩이면서, 그녀를 잡아가려고 벼르고 있었다.

얼결에 그와 눈을 마주한 세실레의 입에서 한탄과도 같은 음성이 새었다.

“……아르베우타.”

“세실레.”

이름을 불리자마자 아르베우타가 그녀의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허락을 구하듯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드디어 세실레를 마주했다는 희열이 지나치게 큰 탓일까.

열락이 넘실거리는 눈동자가 무섭게 빛났다. 꼼짝없이 굳어버린 세실레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세실레를 재촉하듯 테레사가 다시금 속삭였다.

“도망치세요. 당장.”

테레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세실레의 흐릿해진 판단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제야 얼어 붙어있던 세실레는 급히 이능을 펼쳐내었다.

밤의 세실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지금은 해가 뜨기까지 한참 남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지금의 세실레에게 있어, 한 몸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테레사도 함께 도망칠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테레사를 구할 때야.’

세실레는 팔을 펼쳐 들었다. 동시에 은빛의 기운이 세실레와 테레사의 몸을 감싸 안았다.

잠시 주춤하던 아르베우타가 앞으로 도약하며 세실레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능은 아르베우타에게 세실레의 옷자락 하나 허락하지 않았다.

“세실레, 제발!”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안타까운 음성이 흘렀다. 그러나 세실레는 이미 허름한 골목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양, 거리는 다시금 어둠에 휩싸였다.

아르베우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눈앞에서 세실레가 사라졌다.

조심스레 접근하려 했다가 도리어 놓치고 말았다.

절망스러운 사실에 아르베우타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세실레가 사라진 허공을 쉼 없이 손으로 더듬거렸다.

좌절하는 아르베우타의 코끝에 옅은 향기가 아른거렸다.

그의 손아귀엔 세실레 대신, 주인을 잃고 흐려진 연무만이 남았다.

“세실레…….”

아르베우타는 지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세실레는 그곳에 없었다.

딸랑, 목에 걸린 펜듈럼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

세실레는 테레사와 함께 무사히 거처로 돌아왔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떠났으니, 아르베우타가 그녀를 다시 추격할 길은 요원했다.

다시 세실레가 알케덴에 가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는 마음 편히 이곳에 있어도 됐다.

이 년간 정든 거처에 둥지를 틀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도 되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지금이야말로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자.’

당장 아르베우타를 만났을 땐 너무나도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겠지.’

그가 직접 움직인 걸 보아하니, 정말로 돌아갈 때가 온 모양이었다.

결단을 내린 세실레는 몸을 돌려 테레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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