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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3화 (13/110)

13

아르베우타는 뒤편으로 밀려났다. 보란 듯 소년을 노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

매서운 눈빛에 소년의 시선이 자꾸만 아르베우타를 향했다.

소년은 무시무시한 표정의 아르베우타를 보자마자 잔뜩 겁을 집어삼킨 채 울먹였다.

아무리 아이를 달래도 모두 허사였다.

결국, 소년을 안고 어르던 수석 비서관, 쟈르스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그래. 뭘 좀 알아냈나?”

“아니요. 방해되니 밖으로 나가시죠.”

아르베우타의 낯에 미세한 금이 갔다. 하지만 아르베우타의 눈에도 소년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보이긴 했다.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곤 자신을 보며 훌쩍댔으니 말이다.

게다가 소년은 중요한 단서였다. 물론, 그의 부모가 헛소문을 퍼뜨려 보상금을 얻어내려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거짓이면 삼대를 멸해버릴 테다.”

아르베우타는 매서운 눈으로 소년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신이 난 표정으로 ‘아이가 천사를 만나 병이 나았다.’, ‘황후가 분명하다.’라며 떠들다 황제의 말을 듣곤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나 소년의 가족 따위, 아르베우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의 관심사는 오롯이 단 한 사람, 세실레 뿐이었으니까.

“세실레가 보고 싶어.”

그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아르베우타를 보다 못한 쟈르스가 매섭게 일갈했다.

“아, 좀 나가시라고요.”

***

기사들은 알케덴 곳곳에 퍼져 온갖 소문을 수집하는 중이었다.

꼭 황후와 관계된 소문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애당초 드러내놓고 흔적을 흘릴 리도 없었다.

그러니 기사들 또한 철저히 일반인으로 위장해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공원에서 책을 읽는 척, 술집에 가서 수다를 떠는 척 정보를 수집했다.

어디까지나 알케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항구도시인 알케덴은 잠시 쉬었다 가는 손님으로 가득해, 서로를 잘 아는 경우가 드물었다.

만약 평범한 도시였다면 이렇게 정보를 모으다 바로 소문이 났을 터였다.

“다행이지. 단서를 잡아서.”

아르베우타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동시에 겨우 억눌러 두었던 마기가 치솟아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순간 정신을 잃곤 괴물로 변해버릴 뻔했다. 겨우 그것을 진압했을 땐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허억!”

아르베우타가 거친 숨을 토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다, 눈을 내리감았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러니 반드시 이곳에 세실레가 있어야 했다. 반드시.

어느새 아르베우타의 흰자위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나마도 속에서부터 들끓는 기운을 억눌렀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슬슬 한계였다.

‘더 기다렸다간 소년이고 뭐고 다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군.’

살심만 들끓을 무렵, 쟈르스가 허름한 오두막에서 나왔다.

그는 주군의 험해진 모습을 보고서도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말을 이었다.

“나이 많은 노파였다더군요. 은백색의 아름다운 빛무리가 쏟아졌다고 하니, 황후 폐하가 맞는 듯합니다.”

“그래? 그것참 다행이군.”

그는 진심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아르베우타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세실레의 흔적이 남은 황후궁 덕에 버티고 있던 것을 무리해서 이리 멀리까지 나와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이 앞에 세실레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가 살고 그녀가 살았으며 제국이 살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의 눈에 기묘한 희열이 어렸다.

“가자. 황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아르베우타는 말 위에 올라탔다.

***

세실레는 붉은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실레가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면, 주변의 산짐승들이 그녀 곁에 모여들었다.

처음엔 야생 짐승의 등장에 겁을 먹었으나 그들이 모두 유순히 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더는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과 먹을 것을 나누며 즐거이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덕분에 외로움이 덜했지.’

세실레는 노루의 등덜미를 쓸며 멍하니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청명하게 빛나던 표면이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빛을 잃어가는 하늘만큼이나 그녀의 표정 또한 어둡게 물들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내내 모른척했던 죄책감이 어제 소년의 일로 터져버렸다.

꼭 경고 같았다.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황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꽉 막힌 듯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세실레는 노루의 몸에 상체를 기댔다. 한 손은 호숫물에 푹 담근 채였다.

그녀의 곁으로 자욱한 안개가 모여들며 신비로운 광경을 자아냈다.

그러나 몽환적인 광경과는 달리, 세실레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슨 케이크를 먹을까.”

매일 밤, 먹을 음식을 궁리하는 일은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렇듯 생각이 많아질 때는 더더욱.

세실레는 크고 순한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그녀를 응시하는 노루를 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당근? 얼그레이? 아니면 초코?”

세실레의 질문에 노루는 고민에 잠겼다.

이윽고 답을 찾지 못하겠던지 푸르르 고갯짓하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바닥에 엎어져 옷가지를 잔뜩 더럽힌 세실레가 노루를 향해 투덜댔다.

“너……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하라고.”

세실레의 비난에도 노루는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때마침 저를 찾아온 새끼 노루들을 발견하곤 그들과 함께 서식지로 돌아갔다.

자그마한 새끼 노루 셋, 그리고 엄마 노루.

그 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세실레는 때마침 어두워진 하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세실레의 왼손등 위로 흐릿하던 달이 온전한 빛을 뿜어내며 자리했다.

그러나 달의 힘은 불완전하게 흔들렸다. 마치 무언갈 경고하듯이.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걸까.’

이제 정말로 떠날 때가 온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가자.”

그녀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 뒤 노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곤 꼼꼼히 장갑을 고쳐 쓰고 로브를 눌러 썼다.

일련의 과정을 마친 뒤에야 그녀는 알케덴으로 내려갔다.

어쩌면 이것이 알케덴에서의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

“어서 옵쇼!”

세실레의 단골집인 ‘별빛이 흐르는 관.’

이곳에 처음 보는 사내 무리 여럿이 와 앉았다.

알케덴은 워낙 뜨내기손님이 많은 곳이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가게 주인 또한 아무 생각 없이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무리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주인이 몸을 사리려는 차, 그들 중 가장 키가 큰 이가 앞으로 나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을 매일 찾는 노파가 있다던데?”

위압적인 투였다. 실수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찬 칼을 꺼내 들어 휘두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선 위험한 야생의 냄새가 났다.

그에 침을 꿀꺽 삼킨 주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있습죠.”

“밤에만 나타난다던데, 맞나?”

“네네, 그렇습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때마침 유리창 밖으로 한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골이라는 말마따나 노파는 음식점을 지나치지 않았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청명한 음을 냈다. 동시에 노파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매번 앉는 창가 자리로 가서 외투를 벗은 뒤 주인장을 불렀다.

“주문이요!”

“네! 아이고, 또 오셨네요.”

주인장은 수상한 사내를 흘긋 살핀 뒤, 곧바로 단골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 무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좌석에 착석한 채 노파를 주시했다.

다른 이들은 그녀가 황후가 맞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던 황후 폐하와 노파 간의 괴리는 엄청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아니었다. 그는 세실레가 어떠한 모습이든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베우타가 은밀히 노파의 얼굴을 훑었다.

마침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아르베우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

하늘은 비슷한 주기를 가지고 돌아갔다. 세실레의 하루도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매일 같은 거리를 거닐며 이제는 익숙해진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여어, 또 케이크 사러 가쇼?”

“그래.”

“거참, 그러다 당 걸리니 조심하쇼.”

“노인네가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러나.”

세실레는 맑게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 자기가 정말 여든 살 노파라도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세실레는 기분 좋게 디저트를 고르고 거리로 나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러나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실레는 디저트를 사고 나오는 길에 대로에서 싸우고 있는 무리를 발견하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희멀건 한 악령들이 그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낄낄대고 웃고 있었다.

악령에 홀린 인간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 줄도 모르고 온몸을 내던지며 광기를 표출해댔다.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세실레는 약간의 힘을 이용해, 그들에게 깃든 악령을 거둬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들던 두 사람이 멀뚱하게 눈을 뜨고는 서로를 바라봤다.

“아악!”

그제야 통증을 느낀 이가 배를 잡고 뒹굴자 다른 쪽이 미안하단 표정으로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세실레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악령들이 더 심하게 날뛰고 있어.’

세실레가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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