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랬다. 백마차.
오직 그것만이 세실레가 남기고 간 유일한 흔적이었다.
허름한 삯 마차에서 보석가루라도 바른 양 번쩍거리는 백마차로 변모한 그것은 밤이 되면 더욱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백마차를 황후궁에 옮겨 놓자, 보호하기라도 하듯 안개가 마차를 꽁꽁 둘러쌌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덕분에 거짓을 고한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던 마부는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소리를 지르던 이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것이 신의 이능이 발한 흔적임을.
그리고 세실레를 비롯한 역대 성녀들이 진짜였음을.
“세렌디 신께서 분노하신 것이오.”
누군가의 말에 회장은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아무도 이의를 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세실레가 사라진 그 날, 황태후는 쫓기듯 신전을 찾았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멀쩡하던 신관들이 모두 잠든 것이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 보아도 그들은 죽은 듯 깨어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신전에 배치된 신관들도 매한가지였다.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렸던 이들을 비웃듯이, 신관들은 그들을 가장 필요로 여기는 시기에 잠들어버렸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의 수장 격인 세실레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예측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희망은 사라졌고 이젠 모든 게 끝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마다 악령이 날뛰었고 제국은 천천히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신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사실에 가장 겁에 질린 것은 황태후였다.
그녀는 자신이 하늘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친 이후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에 대단히 겁을 집어삼킨 채였다.
거기에 더해 악령이 매일 밤 찾아와 그녀를 괴롭혀댔다.
불면증, 우울증, 신경 쇠약, 정신 착란.
그녀는 수많은 정신 질환을 진단받았고 결국 스스로 궁에 갇혀 몸을 떨며 살았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세실레에게 해왔던 만행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귀족들은 저들 또한 신벌을 받아 저리 미치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 바빴다.
***
눈 부신 햇살이 불 꺼진 집무실을 환히 밝혔다. 그러나 집무실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잘 정돈된 듯 보이는 집무실 바닥 여기저기 무언가 깨져있었고 옷 군데군데가 뜯어져 있었다.
새하얀 옷깃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까맣게 죽었다. 그의 목에 매달린 펜듈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얗던 펜듈럼이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 물이 넘치기 직전의 물컵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가슴 부근을 맴도는 달 문양의 펜듈럼을 쥐어본 아르베우타가 대기 중인 기사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인가?”
“……그, 그것이.”
“아직도 찾지 못했는가.”
황제의 중얼거림에 기사는 몸을 떨다, 머리를 조아렸다.
변명 따윈 하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행동이었다.
아르베우타는 더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지친 낯을 들어 제 뒤에 선 테레사를 보았다.
입을 다문 그녀를 보며, 아르베우타가 이를 갈았다.
“어서 말해.”
“저도 모릅니다.”
“성녀의 수호자인 네가 모른다고?”
아르베우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추궁했다.
하지만 테레사의 표정은 덤덤했다. 도리어 거만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황제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레사의 시선이 아르베우타의 목덜미로 향했다.
아르베우타의 피부는 새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기가 그를 집어삼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괴물이 되어 제 손으로 제국을 파괴한 뒤, 미쳐버릴 터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여행자처럼 사라진 세실레의 자비만을 갈구하다 천천히 죽어가겠지.’
테레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져가, 아르베우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죽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세실레도 죽어.”
“아니요. 그분은 영원하실 겁니다. 당신만 죽는 겁니다.”
테레사의 속삭임에 아르베우타의 낯이 굳었다.
그는 불문율을 깨고 테레사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나 테레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속삭일 뿐이었다.
“이제라도 감히 하늘을 넘봤던 대가를 치르셔야죠.”
“세실레만 찾으면 널 죽여버리겠어.”
“어디 한번 해 보시지요.”
테레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분노한 아르베우타가 테레사를 집어던지듯 내치고는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테레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경멸하는 시선으로 황제의 자취를 훑을 뿐이었다.
***
아르베우타는 거칠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피곤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말짱해 보였다.
도리어 살이 조금 빠져 늘씬해진 턱선과 매섭게 치켜진 눈매가 더욱 그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유명한 미남답게 사교계에서도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게다가 그는 지난 이 년간, 제대로 자지 못하고도 유일하게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반듯한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역시 황제라며 칭송했지만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아르베우타는 이미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그가 사실은 세실레를 찾아 헤매느라 무려 반년 동안이나 궁을 비웠으며 그러다 괴물의 힘이 각성하려 하여 어쩔 수 없이 황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믿었고 여전히 그들에게 아르베우타는 건실한 황제였다.
그 사실이 어쩐지 지긋지긋하여, 그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목에 매었던 크라바트를 풀어헤치고 뛰듯이 걸어, 저 멀리 자리한 황후궁을 향했다. 마치 유일한 안식처라도 찾듯이.
마침내 황후궁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아주 옅게 남은 세실레의 흔적을, 기운을 좇았다.
지친 시선이 황후궁의 정원을 훑었다. 그곳엔 여전히 희뿌연 안개가 끼어 오묘한 광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베우타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뿌연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꼭 아르베우타를 피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결국 그가 앉은 자리만 맑게 개었다.
그 사실에 짜증이 난 아르베우타가 하늘을 향해 와락, 소리를 질러대었다.
“꼭 이래야 합니까!”
분노를 토하는 그의 목소리에 대기가 찢어질 듯 거칠게 공명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하늘은 답이 없었다.
세렌디 신은 아르베우타를 지독히도 미워했으므로.
제 딸의 마음을 훔친 도둑이라 저주하였으므로.
외침에 답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놓아줄 생각도 없었다.
설령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곳에 와, 또다시 세실레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환히 웃어주는 그녀를 향해 수줍게 손을 내밀 것이다. 아주 오래전 옛날에 그러했듯이.
아르베우타는 젖은 흙을 움푹 들어 제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곤 깊이 숨을 들이켜며 속삭였다.
“세실레. 도대체 어디 있어.”
잘난 얼굴이 지독한 괴로움을 표하며 일그러졌다.
그러나 세실레는 더는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제발 돌아와 줘.”
이년 간 그는 세실레의 모습을 수십 번 곱씹었다.
이전 생들과는 달리, 그를 향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심한 말을 읊조리던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세실레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함부로 접근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그때는 펜듈럼에 금이 갔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결코 이런 실수를 하진 않았을 터였다.
아르베우타의 손이 목에 걸린 펜듈럼으로 향했다.
언제나 견고했던 펜듈럼엔 금이 가 있었다. 이년 전, 세실레가 황궁을 떠난 후부터 생긴 흔적이었다.
펜듈럼은 신이 그에게 내린 제약을 상징했다. 펜듈럼에 금이 갔다는 뜻은 신의 제약에 틈새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붙잡을 것을.’
아르베우타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가에 괴로운 감정이 일렁였다. 푹 숙인 얼굴이 침울했다.
그사이 다가온 기사가 아르베우타의 뒤에 부복하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무얼.”
“알케덴에서 천사를 보았다는 소년이 나왔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아르베우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사라니, 의미불명의 단어였으나 아르베우타는 그것이 세실레를 지칭한다고 확신했다.
설령 아니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어디든 단서가 있는 곳이라면 달려갔으니까.
아르베우타가 희열 어린 목소리로 명했다.
“당장 출발한다.”
***
세실레를 찾는 것이 제국의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덕분에 그녀를 수색하는 인원들도 조직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제국 각지에 기사단이 분포되어 모든 흔적을 긁어모았고 오직 황명만 따르는 친위대도 수색 중이었다.
그렇게 각지에 분포되어 있던 이들 중, 뛰어난 이들만이 색출되어 알케덴으로 모였다.
혹여나 세실레가 눈치채곤 도망쳐버릴까 싶어 그들은 모두 변장한 뒤 각 마을 곳곳에 배치됐다.
주변 마을, 심지어는 으슥한 산속까지 완전히 둘러싸 도망갈 틈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를 찾는 원정의 가장 우두머리에 선 이는 아르베우타였다.
그는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알케덴으로 달려가, 천사를 보았다던 소년을 직접 만났다.
아르베우타 또한 변장했으나 타고난 위압감과 기세를 숨길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그를 보며, 소년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자, 잘모태써요.”
또래에 비해 말이 어눌한 아이였다.
비단 겁에 질려서라고 하기에는 정신연령도 조금 어려 보였다.
그러나 아르베우타로선 소년이 뱉은 말이 설령 거짓이라 하더라도 제 귀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만큼 절실했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저가 미쳐버릴 테니까.
곧 한계였다. 그에겐 더 버틸 힘도 여력도 없었다.
아르베우타의 얼굴에 어설픈 웃음이 어렸다.
상냥하기는커녕 기괴해 보이는 미소에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괜찮으니 편해 말해 보렴.”
“으, 으흑.”
“하아, 도대체 왜 우는 거지?”
참다못한 아르베우타의 입에서 짜증이 흘렀다.
그러한 행동에 아이가 더욱 겁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울먹이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곤 제 머리만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러자 보다 못한 수하가 나서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착하지? 저 아저씨 말고 형이랑 놀자.”
그의 말에 아르베우타가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