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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1화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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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계속 현실에 안주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한차례 타국에 가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에 다다르면서부터 이능이 점점 희미해졌다. 손등의 달 문양도 차차 흐릿해졌다.

동시에 파도가 위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지도 옅게 떨렸다.

그 순간 세실레의 머릿속에 죽었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더불어 신화 속 내용까지도.

[세렌디의 딸이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대륙은 바다에 가라앉고 제국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덜컥 겁이 났다. 결국 세실레는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땅을 밟았다.

그러자마자 파도가 잠잠해졌다. 옅게 흔들리던 대지도 고요해졌다.

‘정말로 신이 있긴 하구나.’

그제야 세실레는 신화 속 내용을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지만, 슬픔은 금방 잊었다.

전과는 다른 자유로운 환경,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 덕분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지금으로도 충분해.’

라는 느슨한 마음을 가질 정도로.

게다가 알레스 제국은 온화한 기후로 유명했다. 땅은 풍족했고 언제나 먹을 것이 넘쳐, 흉년에도 굶어 죽는 이가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할까. 그만큼 알레스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굳이 다른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가 있었다. 그런 바로 달이 사라진 후 나타난 변화에 있었다.

신화에 적힌 것처럼 제국이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차츰 악령에 씌었다.

악령에 씐 사람은 폭력적으로 변했고 심하면 미쳐버렸다. 게다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달이 사라져서 악령이 날뛰는 게 분명했다. 그 모든 것이 저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 세실레는 선뜻 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언젠간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세실레는 다시금 마음을 굳혔다.

물론, 그녀를 찾는 벽보나 기사들을 볼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차차 황후가 아닌, 평범한 생활에 적응해 갔다.

처음엔 혹여나 자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며 겁에 질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세실레는 대담해졌다.

애당초 겁먹을 필요도 없었다. 밤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잡히면 도망가면 됐고 이능을 발휘할 수 없는 낮에는 거처에 숨어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대로도 괜찮겠지.’

불안을 숨기고 안일한 하루를 보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는 멍하니 같은 일정을 반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누구인지, 원래 무엇을 좋아했고 싫어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만 돌아다녀야 한다는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지난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실레는 오늘도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음식점을 방문했다. 그녀는 몇 달 사이 체득한 몸짓으로 거침없이 요리를 주문했다.

“여기 주문이요!”

“네에, 11번 테이블 주문!”

익숙한 단골의 방문에 주인의 목소리가 경쾌해졌다.

***

세실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조금 전 고민에 잠겼던 것도 잊고 곧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댔다.

‘황실 요리사보다 요리 실력이 뛰어난 것 같다니까.’

실은 조미료를 팍팍 쓴, 서민적인 음식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세실레의 순하디순하던 혀를 매료시켰다.

어쨌거나 맛있으면 그만이었다. 세실레는 참나무 빛깔의 가게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가지 않아, 종업원이 트레이를 끌고 나타났다.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은 하나둘 음식을 날랐다. 그녀의 재빠른 손길에 테이블이 접시로 가득 찼다.

그 위에는 입안을 감도는 부드럽고 진한 크림 파스타와 허브를 곁들여 구운 연어구이, 브라운 소스를 졸인 오므라이스가 있었다.

‘오늘도 맛있어……!’

한입을 먹은 세실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그녀는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즐거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고 먹던 세실레는 괜히 고개를 숙여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지나친 추태를 보였나 민망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추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그녀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여든이 넘은 노파가 먹는 양은 젊은 사람보다 뛰어난데, 기품있는 자세로 식사를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저 노파는 도대체 누구지?”

세실레가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가게의 화젯거리가 되어갔다.

세실레는 접시를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요.”

“허허, 또 오십시오!”

매번 상당한 매출을 올려주는 그녀를 향해 가게 주인이 반가이 인사했다.

그녀의 정체가 의심된다는 점과 밤에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녀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시기에 큰 매출을 올려주는 세실레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으니까.

***

“오늘도 맛있었지.”

기분 좋게 어두운 밤거리를 걷던 세실레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골목에 숨어, 이능을 사용해 거처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 웬 소년이 누워있었다. 그것도 고열에 숨을 헐떡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얼굴과 팔다리가 붉고 퍼렇게 물든 것이 누군가에게 크게 얻어맞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한 모습에 절로 안타까운 탄성이 흘렀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세실레는 소년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들고 있던 디저트 봉지를 바닥에 둔 뒤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쟀다.

손으로 후끈한 열기가 전달되었다.

“열이 심하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듯 지저분하고 위험한 곳에 누워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실레도 눈과 귀가 있는 탓에 자신이 사라진 후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시기에 악령에 미친 자들이 열이 나는 자식을 치료하기는커녕, 왜 아프냐는 이유로 폭력을 가한 뒤 거리에 내다 버리는 일이 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세실레의 안색이 굳었다.

‘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세실레가 사라진 이후부터 악령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세실레의 안색이 어두워질 무렵,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년이 세실레의 소매를 붙들며 흐느꼈다.

“아, 아파.”

“많이 아프니?”

“살려주세요…….”

소년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이대로 놔둔다면, 아마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것이 분명했다.

‘나 때문에.’

세실레는 주먹을 쥐었다.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이능을 발휘했다.

힘을 쓰자마자 천에 감싸져 있던 왼손등에서 찬란한 은백색 빛이 흐르며 세실레와 소년을 감쌌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어둡기만 했던 골목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의 들끓던 열이 내렸고 온몸을 뒤덮었던 멍이 사라졌다.

소년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세실레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소년이 잠들도록 했다.

‘잠들고 나면 모든 기억을 잊기를.’

이능이 펼쳐지기 직전, 소년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천사님, 고마워요.”

소년의 목소리에 세실레의 입가에 안타까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어 그녀의 눈동자에 슬픈 기운이 어렸다.

“난……. 천사가 아니야.”

그러나 소년은 듣지 못하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를 확인한 세실레가 소년의 머리 위로 재차 손을 가져다 댔다.

조금 전 당황해서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소년이 괜한 말을 흘릴지도 모르니, 기억을 지워야 했다.

이윽고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며 소년을 감쌌다. 그러나 빛이 그의 몸에 채 흡수되기도 전, 세실레는 손을 거두어버렸다.

“어차피.”

세실레는 폈던 손을 말아쥐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가야겠지.”

언제고 이런 광경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벌써 자리를 비운 지도, 달이 사라진 지도 이 년이었다.

이젠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곧 새로운 성녀가 나타날 테니.’

그전까지만 버티면 됐다.

***

세실레는 낡은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곳이 그녀의 거처였다.

부서진 대리석만 남은 버려진 신전을 이능으로 복구시킨 곳이었다.

신전 앞에는 고즈넉한 크기의 호수가 있었다. 곳곳엔 산딸기며 과실이 주렁주렁 맺힌 나무들로 가득했다.

정돈되지 않은 정원이 사뭇 거칠게도 보였으나 세실레의 마음에는 꼭 들었다.

게다가 신전은 우거진 산속에 있었다. 그것도 거칠기로 유명한 루렝브렌 산맥에.

주변은 빼곡하게 수풀이 돋아 발 디디기도 힘들었고 낮에도 빽빽한 잎사귀들이 하늘을 가려 햇볕조차 잘 들지 않았다.

‘내가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겠지.’

세실레의 생각은 옳았다. 실제로 누구도 세실레의 머리카락 한 올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낮엔 이곳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그늘이 드리운 나무 아래에 누워 책을 읽기도 했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시간이 나면 호숫가에 발을 담그고 놀기도 했다.

그러면 짹짹 조잘대는 새가 다가와 손등에 얼굴을 비비고 갔다.

지극히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달이 사라진 지 이 년이었다. 긴 시간 동안 세상은 혼란에 물들었다.

단지 달이 사라져, 밤이 어둠에 물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둠이 없다면 밝히면 그만이었으니까. 문제는 달이 사라지자, 밤에 악령들이 날뛰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꺄아악!”

“살려줘요!”

단지 맹수만을 걱정하며 대비했던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모조리 오판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또한 그간 그들이 신의 존재를 너무나도 당연히 여기며 오만하게 굴었음에 사죄해야만 했다.

악령으로 물든 땅.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대륙의 절반이 바다에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

“도대체 황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그리 말하는 이조차도 밤새 악몽을 꾼 탓에 얼굴이 엉망이었다.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해 홀쭉해진 볼,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그를 사람이 아니라 악령처럼 보이게끔 했다.

그건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이제 만성피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행정관 중 절반 이상이 사직했다. 다른 직종도 사정은 비슷했다.

귀족들만이 신분과 영지를 버리지 못하고 남아, 황실을 들들 볶아대는 중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신 지 벌써 이 년쨉니다! 백성들은 마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고 그나마 기력이 남은 이들은 타국으로 도망을 쳤어요. 언제까지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합니까?”

그의 발언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황후의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으니까.

이미 모든 병력을 동원해 오지 산간까지 뒤졌다. 심지어는 타국에까지 수배령을 내렸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때 좌절에 잠겨있던 누군가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어쩌겠소. 남은 것이라곤 백마차 하나뿐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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