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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10화 (10/110)

10

신기한 일이었다. 손등에 달빛이 스며들고 나니, 하늘의 달이 사라졌다.

믿기 힘든 현상에 세실레는 처음엔 자신이 미쳤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주변에서 일렁이는 빛무리는 진짜였다.

묘하게 빛을 반사하는 은백색의 빛이 그녀를 둘러쌌다.

검푸른 어둠과 은색의 빛무리가 뒤얽혀 오묘한 흔적을 그려냈다. 세실레는 멍하니 빛무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특별한 힘이라도 갖게 된 걸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실레는 입고 있던 로브를 손에 쥐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사라져.”

모든 과정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을 행하듯 익숙하기까지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쩡하던 로브가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잘게 부수어지는 은백색의 빛무리를 멍하니 지켜보던 세실레의 입이 벌어졌다.

“말도…… 안 돼.”

그러나 세실레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이루어졌으니까.

그녀가 말하면 길가에 시들어 있던 나무가 생기를 되찾았고 허름하여 칠이 벗겨져 있던 마차는 완전히 새것이 되어버렸으며 심지어는 입고 있던 옷가지마저 유백색의 새하얀 드레스로 변했다.

이쯤 되니 세실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게 아니라, 정말로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막연히, 이것이 그녀가 죽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무언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든, 상황이 이러하다면야 굳이 마차를 타고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세실레는 지도에서 보았던 알케덴의 위치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가자. 알케덴으로.”

그 순간 수많은 빛무리가 번져 오르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세실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툭-, 엉겁결에 세실레가 떨군 동전 주머니 하나만 조용히 흔적을 남겼을 뿐이었다.

***

이 이상 달리는 것은 한계였기 때문에 마차가 정차했다.

도시를 밝히던 불빛이 하나둘 사라지자, 그가 가지고 있던 휴대용 등불만으로는 밤길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길이 어두운지.”

투덜대던 마부는 뒤늦게 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질겁하여 세실레가 자리한 뒷좌석의 문을 벌컥 열었다.

“마님. 가, 갑자기 달이 사라졌습니다요!”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곱게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실레가 순식간에 사라진 탓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마부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 귀신에라도 홀렸나.”

떨떠름한 마부의 시야에 웬 동전 주머니 하나가 보였다.

그는 성급히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주머니 안엔 과하다 싶을 만큼의 액수가 들어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몰랐나 싶을 정도로, 그가 이끌던 마차는 번쩍번쩍한 빛을 흘리는 백마차로 변모해 있었다.

“허억!”

그를 확인한 마부가 저도 모르게 기함하며 뒷걸음질했다.

그러곤 황망한 시선으로 은가루가 부서지듯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는 백마차를 멍하니 응시했다.

***

황궁에선 파티가 한창이었다.

황태후는 간만에 즐거이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었고 그녀는 그러한 관심을 굉장히 즐겼다.

“황태후 폐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감 가득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도무지 몸을 빼려 해도 틈이 나지 않았다.

물론, 황태후가 작정하고 자리를 빠져나오고자 했으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찬양했고 아부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찬사를 받는 일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고 그녀는 그 기쁨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 후엔 친인척과 인사를 나눴다.

와중에 시간을 쪼개 세실레를 진찰한 의원에게 보고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엄포를 놓고 나서야 황태후는 기분 좋게 정원을 거닐었다.

밤하늘에 높게 뜬 달이 영롱하게 빛났다.

축제 날, 사방이 어둠을 밝히기 위한 불빛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어떤 불빛도 밤하늘을 밝히는 달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저 달에 세렌디 신이 산다지?’

황태후의 입가가 비틀렸다.

저토록 고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달마저 그녀의 발아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전 대 성녀를 내치고 황후가 되었다. 이번 성녀도 그녀가 내쳐버릴 예정이었다.

“이전에도 이번에도. 당신은 내게 졌습니다. 내가 신을 이긴 겁니다.”

황태후는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하늘을 보며 웃었다.

애당초 신이 있기는 하던가?

그게 정말이라면 제 딸이라던 성녀를 저리 방치하는 것이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아하하! 말도 안 되지!”

황태후의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술기운에 취한 황태후의 몸이 방향을 잃고 흐느적댔다.

비틀거리는 중에도 그녀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을 꼽으라면, 자신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천하를 다 제 손에 쥔 기분이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어?”

그녀의 입에서 의문이 흘렀다.

그러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한 손을 들어 눈을 비비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졌나.”

그것도 아니라면 술기운 탓일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히 떠 있던 달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었다.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달이 사라지는 것과 더불어, 세상은 차차 암흑으로 물들어갔다.

아무리 횃불을 가져다 주변을 비춘다고 해도 달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 컸다.

게다가 어제가 바로 보름이었기에 차이가 더욱 극명했다.

손바닥 크기만 하던 크고 둥글던 달이 차츰 빛을 잃었다.

흐릿한 먹구름에 가려졌다기엔 날씨가 너무 맑았다.

그러니 정말로 그녀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달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다시금 이 세상을 새카만 어둠으로 밀어 넣기 위해서.

불현듯 황태후의 머릿속에 신화 속 내용이 떠올랐다.

[세렌디의 딸이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대륙은 바다에 가라앉고 제국의 축복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신화 속 내용이 꼭 이 장면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황태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게, 게 누구 없느냐!”

황태후의 부름에 덩달아 넋을 놓고 있던 시종이 황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예, 예.”

“당장 황후궁으로 가서 황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라. 그, 그래. 아까 진찰하였단 의원도 데리고 가!”

“네!”

시종이 황급히 달려나갔다. 그럼에도 황태후는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으며 점점 흐릿해지는 달을 지켜보던 그녀는 결국 더한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신전으로 달려갔다.

기품이니 교양 따위를 논하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허둥대는 걸음에 하마터면 치맛자락을 밟아 넘어질 뻔하면서.

***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그간 당연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달이 돌연 모습을 감추었다.

흥겹게 흐르던 노랫소리는 뚝 그쳤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짜기라도 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수군대기 시작했다.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겠다.’고.

황궁의 대연회장에서 즐거이 춤을 추고 있던 사람도 거리에서 노닥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이들도 하나같이 낯을 굳혔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버벅대다, 마침내 혼란에 빠져 아우성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 엄마아…….”

사람들은 밤이면 등불을 켰다. 집마다 벽난로가 있으니 난로를 지펴 방을 밝혀도 되었다.

그러니 달 하나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존재가 사라지자 그 자리로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였다.

응당 누리는 권리라 생각했던 달은 빛을 잃었고 적막한 어둠만이 하늘을 메웠다.

그에 모두가 통곡하며, 잊고 있던 신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찾지도 않던 신을 부르짖으며 황후는 무사하냐며 세실레의 안위를 물었다.

그러나 황실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말 없이 기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황제가 직접 나섰다는 소문마저 돌았지만, 아무도 세실레를 찾지 못했다.

모두가 애타게 세실레를 찾았다.

그녀의 존재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녀가 탔다고 추정되는 백마차 한 대만이 며칠 뒤에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사이 세실레는 평온한 삶을 살았다.

막연하게 상상만 해봤던 자유였다. 아니,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녀는 몰랐으니까.

‘험하고 더러운 사람들로만 가득하댔지.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세실레는 바깥을 구경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활기차고 즐거웠다.

사람들은 거침없이 그녀를 대했다. 처음엔 그들이 낯설었지만 세실레는 차차 적응해 갔다.

세상은 혈혈단신으로 살아남기엔 벅찬 곳이 맞았다. 하지만 세실레에겐 돈도 능력도 있었다.

밤이 되면, 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세실레는 추적당하는 신분이면서도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어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즐거워.’

신기하고 재밌었다. 묘한 흥분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마음껏 시내를 거닐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격을 물어 흥정했고 넋 놓고 밤바다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슨 고민을 했는지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테레사의 말대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알케덴은 항구도시였다. 거리엔 매일같이 야시장이 열렸고 인파로 벅적댔다.

오늘도 어두운 거리에 불빛이 가득 찼다.

세실레는 시끌벅적한 알케덴의 거리를 걷다가, 익숙한 단골집에 들러 품 안 한가득 디저트를 사들였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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