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세실레는 거울 앞에 섰다. 드레스룸의 거울은 언제나처럼 화려했으나 거울 안에 자리한 그녀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랐다.
테레사가 전해준 의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순한 드레스는 활동성 고려해 재단되었는지 몹시 편했다.
구김이 잘 가지 않는 소재의 치마는 허리 부근을 꽉 잡아당기면 밑단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갔고 굽 없는 신발은 폭신폭신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차림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처음 거울을 보았을 무렵엔 어색했는데, 그새 적응되었는지 편했다.
가슴이 뛰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행위에 잊고 있던 열망이 불타올랐다.
오묘한 기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밌다.’
세실레의 눈가가 작게 휘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테레사는 바삐 손을 놀렸다.
머리를 꽉 조여 매고 피부색을 어둡게 하는 분을 칠하고 터번을 둘러썼다.
그마저도 불안했는지 꼼꼼히 로브까지 챙겨 입혔다. 그 안으로 은백색의 머리카락도 숨겨버렸다.
그러고 나니 세실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꼼꼼히 뜯어보면 세실레라는 걸 알아보겠지만 수많은 인파 사이에 섞일 테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테레사는 그 외에도 세실레에게 주의 사항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바깥세상을 거의 알지 못하는 그녀였으니 아주 사소한 것부터 가르쳐야 했다.
“비밀 통로를 벗어나면 바로 마부를 찾아 남부의 알케덴에 가겠노라 말하십시오.”
“알케덴이라면…… 바닷가에 있는 무역도시?”
“네. 거대한 항구가 있는 무역도시입니다. 그곳에서 머무시다 적당한 시기에 출항하는 배를 타십시오. 우선은 대륙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응, 그럴게.”
세실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는 그 외에도 패물을 담은 주머니를 품에 넣어주며 말했다.
“황실의 인장을 새기지 않은 보석들만 따로 모았습니다. 필요하실 때 차근차근 팔아 돈을 마련하시되 천만 레든 이하로 부르면 팔지 마십시오.”
“……정말 고마워.”
생각보다 세심한 배려였다. 테레사가 이렇게까지 저를 위하는지 세실레는 여태껏 몰랐었다.
그녀는 언제나 구석에 서서 묵묵히 호위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테레사는 별다른 말 없이 대꾸할 뿐이었다.
“이제 떠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테레사가 벽에 달린 거대한 풍경화를 밀어냈다.
그러자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오갈 수 있는 크기였다.
빛 한 점 없는 통로는 어두웠다. 하지만 세실레는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도리어 가슴이 두근거리며 세차게 뛰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테레사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이제야 살아있는 사람 같으십니다.”
“그래?”
“예. 허니 부디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테레사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였다.
세실레는 그제야 테레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를 도와줬다고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이리 친절을 베풀어주는지 모르겠다. 듣기로 그녀는 평민이라 했으니, 문책을 당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을 게 분명했다.
고민하던 세실레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쩌려고.”
“저는 이미 알리바이를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러니 어서 떠나세요.”
“그렇지만…….”
“빨리 가셔야 저도 수월해집니다.”
테레사는 끝없이 재촉했다. 세실레는 겨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뗐다.
저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테레사만이 알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굳건했다.
인제와 물러서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 나중에 꼭 다시 보자.”
세실레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테레사는 액자를 바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의 시선은 여전히 액자 뒤, 세실레가 사라진 곳을 향해 있었다.
“곧 다시 뵐 겁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세실레가 사라진 곳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걸음이 어색했다.
일곱 살 이후로 뛰어본 적도 황궁을 벗어난 적도 없었다.
통로 안은 어두웠다. 세실레는 손에 든 등불 하나에 의지해 더듬더듬 걸어야만 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무엇과 통해 있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쥐가 찍찍대는 소리도 들렸다.
태어나서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일부러라도 걸음을 빨리했다. 서둘러야 한다는 테레사의 말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이 앞서, 밭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체력이 나빠,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목에선 피 비린 맛이 났다.
그녀는 되는 대로 벽에 몸을 기대며 뜨겁게 이마를 적시는 땀을 닦아냈다.
뒤죽박죽이던 숨결이 진정되었을 무렵엔 어째선지 웃음이 흘렀다.
“하, 하아, 하…….”
숨이 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웃음소리가 어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실레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번져갔다.
입꼬리가 씰룩대어, 세실레는 자신의 입가를 몇 번이고 만져보았다.
‘웃는 건가.’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거리낌 없이 웃는 중일지도 몰랐다.
세실레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환한 빛이 새고 있었다.
이제 곧 밖이었다.
‘밖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바깥에 나갔던 시간은 살던 곳에서 황궁으로 이동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마차에만 있었다. 그녀는 저택과 황실이 아닌 다른 풍경을 단 한 번도 눈에 담은 적이 없었다.
평범한 백성들이 어찌 사는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돈을 주고받고 물건을 거래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도리어 기분 좋은 떨림이 그녀를 가볍게 휘감았다.
“공기부터 다른 것 같아.”
세실레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일어났다. 그러곤 빛과 바람이 새어드는 곳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마침내 북적이는 대로의 바로 뒷골목, 황궁과 이어져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후미진 곳에서 세실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 웅성대는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
단단히 변장한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축제라 떠들썩한 분위기라지만, 이 시간에 마부를 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실레는 구했다.
일곱 살 이후론 처음으로 마주한 바깥이라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제법 능숙한 처사였다. 곧바로 거리에 정차한 마차를 찾아낸 것이었다.
‘가문의 문양도 없고 허름한 걸 봐선 삯 마차가 분명해.’
세실레는 짧은 바깥 상식으로 추측했다. 때마침 마차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다.
세실레는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도 영업하나?”
“아, 지금은 좀 곤란한데.”
“금액의 두 배를 쳐주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길이 사람으로 꽉 차서 움직이기가 힘들단 말이야.”
세실레는 마부가 가리키는 길을 바라보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태연한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사람이야 며칠 전부터 많았을 것이고, 한창때에 일을 쉬었을 리도 없으니, 돈을 더 내라 이건가?”
정확한 지적이었다.
마부는 손님이 넘쳐나는 대목을 틈타, 몇 배씩 웃돈을 얹어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리 말하면 세실레도 알아서 물러설 줄 알았다.
그녀의 차림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부유해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돈깨나 있는 여잔가 보지?’
마부는 노골적으로 세실레를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였다.
겹겹이 옷을 둘러 입은 데다 로브를 걸쳐 외양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잘 먹고 살지도 못한 듯 마르고 가냘픈 몸뚱이 어디에서도 돈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부는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아냈다.
세실레의 목소리엔 묘한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행동 하나하나 헛됨이 없이 깔끔했다.
그는 이번 연회 동안 소위 돈 냄새를 풍기는 인간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평민과는 달리 절제되고 깔끔한 동작을 했다. 자연스레 하대하는 어투가 몸에 밴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비슷했다. 마부는 세실레가 아닌 척을 하지만 고귀한 신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는 진짜다.’
저런 이들은 돈의 개념이란 것이 없었다.
그 말은 그가 원래 가격의 두 배를 부르든 스무 배를 부르든 아무 말 없이 돈을 낸다는 뜻이었다.
생각을 마친 마부가 모자를 고쳐 쓰며 친절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물론입죠, 마님. 타십시오.”
“그럼 실례하겠네.”
세실레는 거리낌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마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제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테레사가 한 말이었다.
그 말마따나 지금 이 마부가 그녀를 이상한 데로 데려갈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세실레는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었다. 어찌어찌 알케덴에 잘 도착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위험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불량배가 시비를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 불안해야 했다. 항시 긴장하고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근대지.’
세실레는 손을 들어 제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쿵쿵, 쉼 없이 도약하는 심장의 움직임이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장이 뛰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저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것, 그뿐이었다.
***
세실레는 무사히 수도를 벗어나 알케덴으로 향하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천운이었다.
하필이면 황명을 전달하던 기사가 갑작스러운 복통에 낙마했고 때마침 주변에서 일어난 범죄에 수도를 지키던 근위병 상당수는 자리를 비웠다.
게다가 성문 앞에 줄을 서고 있던 취객끼리 싸워 난동이 일어났다.
겹겹이 겹친 사건 사고에 근위병들의 피로는 극에 달했고 그들은 평범해 보이는 세실레 일행을 구태여 막아서지 않았다.
덕분에 세실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도를 벗어났다.
그녀가 황궁과 멀어질수록 차차 자취를 감춰가던 달 이, 이제는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세실레의 손등 위는 은은한 은백색 달로 차차 물들어갔다.
둥글고 고운 선을 가진 달이 하늘에 떠 있던 모습 그대로 그녀의 왼손 위에 올라와 앉았다.
놀라기도 잠시, 세실레는 혹여나 빛이 샐까 싶어 가지고 있던 천으로 손등을 가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안으로 손을 꽁꽁 숨겼다.
왼손이 완전히 보이지 않고서야 세실레의 시선이 흘끗 창밖을 향했다.
바깥은 검푸른 어둠에 물들어 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세실레는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이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