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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8화 (8/110)

8

“……무엇이?”

“당신처럼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세실레는 이 이상 더 말을 잇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명했다.

“공작부인을 내보내세요.”

“네!”

세실레의 명에 어머니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황후가 되었다고 천륜까지 저버려! 내가 너를 어찌 키웠는데!”

한 맺힌 절규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너무나 멀쩡해서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

세실레는 고개를 틀어, 화를 내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천륜이라 하셨어요, 지금?”

“그래! 너 하는 모습이 아주……!”

“제 생일을 두고 사사롭다 하신 분이 천륜이라니.”

세실레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공작 부인에게 있어선 그 어떤 분노와 원망보다도 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그사이 잠시 침묵하던 세실레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요, 공작부인.”

공작부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실레의 얼굴에 떠오른 고요한 미소는 여전했다.

방문이 닫히고 공작부인은 쫓겨났다. 그러고도 한참이 흘렀다. 분명 응어리진 감정이 표면 위로 떠오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옅은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섭섭했구나.’

세실레는 새로이 깨닫게 된 사실에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자신조차 몰랐다. 성녀가 되었으니 인세와 연을 끊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에 그저 수긍했다.

그러니 생일 따윈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 어서 잊어야 한다며 자신을 핍박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섭섭했었어.’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세실레는 은백색 속눈썹을 한 번 깜빡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만 말았다.

금세 밤이 찾아왔다.

***

세실레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홀로 방을 지키던 테레사가 그녀를 보며 짤막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평이한 물음에 세실레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제 눈엔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

괜한 간섭이었다. 감히 호위기사, 그것도 평민 따위가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주제를 모르냐고 호통을 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실레는 그저 조용히 테레사의 말을 곱씹다 나직이 웃었다.

“네 눈엔 그렇게 보여?”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뭐가 주제넘어. 그런 말 할 수도 있지.”

세실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무심코 구석에 놓인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의 여자는 초췌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기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세실레는 멍하니 손을 들어, 제 볼을 쓸었다. 그러곤 어설프지만 웃어도 보았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살아있었구나.’

기이했다. 계속해서 숨을 쉬고 있었는데, 인제와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그동안은 꼭 제 몸이 아닌 기분이었다. 멋대로 화가 났고 멋대로 아무렇지 않았다. 계속해서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이걸 어찌 받아들이면 좋은가 싶었는데, 아직 현실감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

때늦은 눈물이 흘렀다. 고이고 고였다 터진 만큼이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한없이 흐른 눈물에 얼굴이 흥건히 젖었다. 그럼에도 밖으로 흐느끼는 소리 한 점 새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호위기사밖에 남지 않은 방.

사방이 텅텅 빈 침실에서만큼은 소리 놓아 울어도 될 텐데도, 그랬다.

그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테레사의 입에서 조용한 물음이 흘렀다.

“폐하. 도망가시겠습니까.”

“…….”

“자유로이 살고 싶으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세실레는 고개를 돌려 테레사를 봤다.

하지만 테레사의 표정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세실레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위급 시에 사용하는 대피로가 황후궁에도 숨겨져 있습니다. 근위병의 대다수가 행사에 동원된 탓에 지금 수도 출입도 자유로운 편이고요.”

“그래서?”

“돕겠습니다.”

테레사가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도망칠 것인지. 그녀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장단을 겨루어 고민하기엔 세실레는 이 생활이 너무 익숙했다.

그녀는 황궁 밖의 삶을 몰랐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살았고 그 전엔 저택에 감금되어 지냈다.

태어나자마자 성녀로 지목된 이의 삶이 다 그랬다.

그래서 세실레는 바깥이 어떤지, 사람들이 어떤 식의 말을 하고 어떤 식의 옷을 입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향해 테레사가 말했다.

“황후가 아닌, 평범한 삶이 어떠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세실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아닌 삶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쉼 없이 흐르던 눈물이 멎었다.

***

너른 창이 새까맣게 물든, 밤늦은 시간이었다.

다짜고짜 집무실로 찾아온 황태후가 앞에서 얼쩡거렸다. 피곤해진 아르베우타는 읽던 서류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황후궁을 찾았습니까?”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는 허울뿐이니 조금의 관심도 주지 말라고.”

황태후의 쩌렁쩌렁한 음성에 아르베우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놓고 짜증을 표하는 얼굴에도 황태후는 거리낌이 없었다. 도리어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들곤 따져댈 뿐이었다.

“얼굴은 반반한 여인이니 음심이라도 동하더이까? 그러시면 말씀을 하시지요. 제가 뒤탈 없이 즐길 여인들을 잔뜩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무어 그리 부끄러워하세요.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닙니까.”

뻔뻔한 작태였다.

이전이고 지금이고 그의 모든 것을 조종하려 드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르베우타는 반복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다. 가뜩이나 생각할 것이 많아 머리가 아팠다.

그는 황태후의 말을 흘려들으며 낮의 일을 떠올렸다.

‘어째서 바뀐 거지?’

분명 그가 알던 세실레가 아니었다. 분위기도 태도도 말투도 확연히 달랐다.

꼭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프다고 했지.’

신경이 쓰였다. 신경을 써선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시선이 갔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깨어났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괜찮아졌느냐고 묻고 싶었다.

어째서 기력이 쇠했는지 시비들을 문초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됐다.

아르베우타는 충동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아직도 무어라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 그를 향해 버럭, 짜증을 쏟아부었다.

“지금 어미의 말을 무시하시는 겝니까!”

“……바쁩니다.”

아르베우타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 딱딱한 표정엔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그는 읽었던 서류를 읽고 또 읽으며 귀를 막았다.

냉랭한 태도에 황태후는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꾹 누르며 애써 화기를 억눌렀다.

그러곤 사근사근한 말투로 아르베우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잠시 어미 좀 보아요.”

“바쁘다 했습니다.”

“걱정이 많겠지요. 심란한 거 다 압니다. 하나 제가 누구입니까. 걱정일랑 말고 푹 쉬세요. 어미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니.”

아르베우타의 입매가 서늘히 닫혔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모양새를 훑던 황태후의 입꼬리에 교묘한 미소가 어렸다. 황제가 제 말을 잘 이해했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그제야 황태후가 집무실을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코를 찌를 듯 독한 향수 내가 남아있었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한 아르베우타가 짜증스레 읊조렸다.

“창문을 열어.”

“예.”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얼굴엔 지친 기색이 만연했다.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휴식을 취해보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에 좀처럼 쉴 수 없었다.

‘세실레.’

아르베우타는 머릿속으로나마 익숙한 외양을 덧그렸다.

바람이라도 불면 사라질 듯 유약해 보이던 세실레였다. 그러나 어젯밤부터 그녀의 태도가 바뀌었다.

‘설마.’

아르베우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다급히 자물쇠로 잠가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딸칵.

막 잠금이 풀리는 차에 황급히 들어온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급한 일입니다.”

“말해라.”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셨답니다.”

“……뭐?”

그 순간 피로에 젖어 있던 아르베우타의 적안이 번뜩 떠졌다.

당황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아르베우타에게로 다시금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졌다.

“더불어 달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해하기 힘든 말에 아르베우타는 서둘러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가 새까맸다. 마땅히 은백색의 빛을 뿜어내야 할 달이 사라진 탓이었다.

바로 어제가 보름이었고 밖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러니 하늘엔 크고 둥근 달이 환히 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달이 모습을 감췄다. 이미 바깥에선 혼란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베우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세실레 때문이다.’

그녀가 사라져서, 달이 사라진 것이다.

판단을 마친 그가 서둘러 반쯤 열린 서랍에서 펜듈럼을 꺼냈다.

새하얗던 펜듈럼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깨진 펜듈럼을 확인한 아르베우타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그가 잇새를 짓씹으며 말을 뱉었다.

“당장 황후의 뒤를 쫓아. 수도를 폐쇄하고 친위대를 보내.”

“예, 폐하!”

세실레가 도망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실레, 도대체.”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감히 부를 수 없었던 이름을 계속해서 말했다.

“세실레, 세실레.”

그러나 펜듈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금이 간 상태 그대로, 새하얀 빛을 고아하게 내뿜을 뿐이었다.

펜듈럼을 지켜보던 아르베우타가 단숨에 밖으로 도약했다.

그가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세워 명령했다.

“내 말을 준비해.”

그제야 금이 간 펜듈럼이 슬금슬금 까맣게 물들었다. 이전 보다 확연히 느린 반응이었다.

금이 간 틈새로 마기가 빠져나가는 탓에, 반응이 느려진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새빨간 눈동자에 안광이 어렸다. 펜듈럼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어쩌면 길고 긴 저주의 끝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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