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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을 지키고 선 시종이 황제의 입장을 알리지 않았으니 정식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홀을 빠져나가려던 세실레와 어째선지 뒤편에 은밀히 자리하고 있던 황제의 동선이 겹쳤을 뿐이었다.
그가 세실레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
기억하는 것보다는 조금 앳되지만, 여전히 깊게 침잠되어 있는 목소리에 세실레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엔 낯익은 이가 서 있었다.
번듯한 차림을 갖추고 나타났던 이전 생과는 달리 폐인과도 같은 몰골을 했다는 점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지.’
세실레는 괜히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을 잘라냈다. 그러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자러요.”
세실레의 태연한 대답에 황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재차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설핏 당황한 것도 같았다.
세실레는 그것이 참으로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자신이 무얼 하든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던 사람이 아니던가.
꼭 없는 사람 취급을 해댔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황제가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평소와는 다른 강한 악력이었다.
공식 석상에서나마 형식적으로 부부 행세를 할 때도 이러진 않았었다.
게다가 그의 손은 옅게 떨리기까지 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게 고마울 리 없었다.
세실레는 고개를 들어 아르베우타를 쳐다보았다.
어째선지 아르베우타의 분위기가 전생과는 사뭇 달랐다.
검갈색의 짙은 색 머리카락이 야수처럼 흐트러졌고 다부진 눈썹 아래에 자리한 붉은 눈은 핏빛으로 일렁였다.
꼭 무언갈 원망이라도 하는 듯 원한과 증오가 어린 눈빛이었다.
피로가 지독히 쌓인 듯 눈가가 거뭇한 것도, 수십 번 입술을 짓씹었는지 이상하리만치 부어오른 입술도 그랬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사나웠다. 어째서 그렇게 변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의 그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해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분위기가 바뀐 것 정도론 세실레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찰나 그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세실레의 시선은 다시금 허공에 박혔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놔주세요.”
“갑자기 왜 이러지?”
그러나 아르베우타는 다른 말을 했다. 달라진 세실레의 행동에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그의 낯이 일그러졌다. 꼭 목전에 놓인 먹잇감을 빼앗긴 포식자 같은 표정이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세실레는 황제가 관심을 표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인상만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 아르베우타가 재차 말을 이었다.
“간밤의 일은 전해 들었어. 꼭 사람이 바뀐 것 같더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지극히 오만하고 권위적인 명령이었다. 그는 황제였으니, 그렇게 행동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건 세실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유별나지는 않다지만, 세실레처럼 반쪽짜리 황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뒷배가 되어줄 외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맥을 형성하는 것도 학식을 쌓는 것도 감시하에 이루어졌다.
철저한 훈육 아래서 그녀는 주눅 들곤 했다. 유일한 힘이 되어줄 황제마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타고나길 유약한 세실레와 강철같은 아르베우타는 좋게 말해도 잘 어울리는 배우자라고 보기 힘들었다.
황태후와 황제 사이에서, 세실레는 천천히 메말라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 끌어안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실레는 슬슬 아르베우타에게 잡힌 팔이 저려, 팔을 휘둘렀다.
“놓으세요.”
아르베우타는 순순히 세실레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째선지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입술이 쉼 없이 달싹였다.
놀란 것도 같았고 당황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세실레는 아르베우타의 감정 하나하나 헤아려주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신 한숨과도 같은 말로 그의 입을 막아버릴 뿐이었다.
“쉬고 싶었어요. 그뿐입니다.”
아르베우타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침묵하는 그를 두고 세실레가 통로로 걸어갔다.
“……세실레.”
발목께를 맴돌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애절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절절함에 세실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도 함께였다.
적막해진 공간엔 아르베우타만이 남아 자리를 지켰다.
***
세실레의 기행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온갖 귀빈이 모인 연회장에서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그날, 황제는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바쁜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 그것이 핑계임을 모르지 않았다.
잠시 얼굴 비출 시간조차 없을 리 없었다. 그것도 결혼식 후에 열리는 축하연이었다.
추문이 일어날 것을 알고 한 행동이 분명했다.
“안 봐도 뻔하지. 이번 대 황후도 곧 유폐 행인 거야.”
하인들이 수군거렸다.
내정자가 있다더라 하는 말은 숨길 일도 못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황후궁의 분위기는 사뭇 무거웠다.
영롱한 달 아래에 핀 꽃을 형상화한 궁전이었다.
중심에 자리한 술성을 기본으로 총 일곱 개의 궁이 각각 배치되었다.
궁과 궁 사이를 수놓은 정원 또한 볼만한 거리였다. 새하얀 꽃이 핀 정원 위엔 연무가 그칠 날이 없었다.
술성을 두른 너른 호수 탓일 수도 있었고 지형 탓일 수도 있지만, 신화에 의하면 세렌디 신이 자신의 딸을 대지에 내려보내며 안타까워 흘린 눈물의 흔적이라고 했다.
안개 때문인지 황후궁은 내내 흐릿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자마자 감탄사가 터질 만큼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백옥의 아름다운 성, 자정의 달을 맞이하는 궁전.
그러나 새 주인을 맞이한 황후궁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제 주인의 행색처럼 어딘가 넋 놓은 듯한 기색이기도 했다.
“왜 저러시는 건지.”
도르데아의 입에서 한숨이 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세실레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표적인 황태후 측근이었다.
세실레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들은 황태후는 곧장 도르데아에게 은밀한 임무를 전했다.
***
도르데아는 황후의 침실을 정돈하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엔 황후궁의 소속이 아닌 시녀가 서 있었다. 황태후 궁의 시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도르데아를 향해 손짓하더니, 누가 볼 새라 재빠르게 약을 건넸다.
도르데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약을 건네받자 황태후 궁의 시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황후의 차에 약을 타시오.”
“뭐, 뭐라고?”
“무어 그리 놀랄 일이라고? 이미 내정된 일이지 않소.”
시녀의 말에 도르데아는 제 품에 안은 약을 바라보았다.
물에 녹이면 무색무취를 띄는 독약이었다.
도르데아는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리실테 꽃을 정제해 만든 가루였다.
하루 한 스푼 씩 몇 년을 먹이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약이었다.
천천히 식욕을 잃다, 나중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병자를 돌보던 이들마저도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기로 유명한 약이었다.
도르데아는 약봉지만 더듬거렸다. 당황한 듯 보이는 그녀를 보며, 황후궁의 시녀가 눈을 흘겼다.
“실수 없이 하시오.”
황태후 궁의 시녀는 자리를 비워버렸다.
그러나 도르데아는 생각에 잠겨 차마 독약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황태후가 황후를 처리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반쪽짜리 황후였고 진정한 황후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기가 지나치게 빨랐다. 아마도 황후의 달라진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일 테다.
‘황태후께선 벼른 칼날을 두고 볼 위인이 아니시지.’
도르데아는 황후가 언제고 이리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죄책감이 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국을 위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황후 위는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다. 한낱 고리타분한 신화에 의해 결정될 자리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어째선지 이 일에 손을 대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이 사실을 밝히고 황후의 편에 서거나 이제껏 했던 대로 황태후의 편에 서야 한다.’
하지만 세실레가 바뀌었다 한들 그뿐이었다. 도리어 그녀는 황태후와 맞설 의욕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 황후를 믿을 수 있나?’
도르데아는 자문했다. 깊이 고민하느라 테레사가 다가온 줄도 모를 정도로.
“그게 뭡니까?”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르데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테레사가 앞에 서 있었다.
“이건…….”
도르데아가 주저하는 모습에 테레사의 눈이 흉흉히 빛났다.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선, 이미 무엇인지 짐작하곤 떠보는 게 분명했다.
‘실수했다.’
도르데아의 낯에 아차 싶은 표정이 어리는 사이 테레사가 도르데아에게서 봉지를 앗아갔다.
그녀는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는 도르데아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다시 이런 짓을 벌이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도르데아의 손에 힘이 실렸다. 테레사는 근본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엔 황제가 있었다.
제아무리 황제가 세실레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지만 황태후와 황제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황태후가 어린 아들의 수렴청정을 한답시고 자꾸만 황권을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었다.
장성한 황제가 어머니의 간섭을 달게 여길 리 없었다.
황제가 세실레를 어찌 여기던, 독약 건이 알려지면 황태후를 압박할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찌 될지는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었다.
도르데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테레사 앞에 뻣뻣했던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모른 척해주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하죠.”
테레사가 품에 봉투를 넣었다. 그러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시 이런 일을 벌이면 그 목이 멀쩡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