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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5화 (5/110)

5

“글쎄요.”

“뭐라?”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든 미천한 저의 잘못이지요.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사죄드릴 뿐입니다.”

순순한 사과였다. 흥분해 소리친 것이 우습게 느껴지는 담백한 미소는 덤이었다.

황태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저 어린것에게 무시당했다. 그녀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그리 느끼셨다면 사과드리죠.”

세실레는 미련 없이 걸음을 뗐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침내 침실의 문이 닫히고 새하얀 침의 한 자락조차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황태후는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는 아랫것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분통함에 이를 갈며 소리쳤다.

“저, 저것이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

***

황태후와의 일은 채 반나절도 가지 않아 곳곳에 퍼졌다. 완전히 왜곡된 채로.

‘첫날밤에 소박을 맞았다더라.’

‘황제는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더라.’

‘분개한 황후가 시녀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더라.’

황태후가 악의를 담아 퍼뜨린 소문이었다. 심지어 회귀 전보다 그 도가 더 지나쳤다.

그러나 세실레는 이 상황이 유별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에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엔 도르데아가 냈었지.’

이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째선지 도르데아는 유달리 얌전했다.

저번 회초리 건도 그랬다. 원래라면 당장 일어서라며 호통을 쳤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웬일이지?’

도르데아는 황태후의 측근이었다. 세실레와는 적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무슨 계기가 있었다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세실레는 눈을 감아버렸다. 설령 그녀가 소문을 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누가 소문을 내던, 어떻게 상황이 뒤바뀌던 세실레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사실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분노와 원망이 이는 동시에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느껴지는 감정은 꼭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다 귀찮아.’

세실레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

제국의 겹경사였다.

황제의 즉위식과 동시에 국혼이 치러졌다.

신의 축복을 받은 황제 내외는 선남선녀였고 젊은 피였으며 새로운 바람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따질 것 없이 경사를 축하하러 제국을 방문했다.

거리에선 매번 풍악이 울렸고 폭죽이 터졌으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황실의 연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장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연회장의 상석엔 세실레가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옆자리, 가장 크고 너른 옥좌는 비어있었다.

홀로 입장한 황후를 두고 사람들은 짜기라도 한 듯 수군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죠?”

“간밤에 황제 폐하께서 술에 진탕 취하셨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어머. 그러면 황후께서는…….”

수군거림이 끝없이 이어졌다. 황후를 흘깃거리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이미 몇몇 귀족들은 황태후가 일부러 소문을 파다하게 흘린 뒤 세실레 혼자 연회장에 앉혀 놓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세실레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궁의 실세인 황태후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황태후의 시선을 얻기 위해 더욱 입을 놀렸다.

멋대로 떠들어대는 수군거림, 날 선 시선 하나하나가 세실레를 잡아먹을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세실레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사기 인형 같은 얼굴로 주변을 훑다 이윽고 나른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몇몇은 그 자태를 보고 뻔뻔하다며 혀를 찼다.

“어차피 미래는 내정되어 있다죠. 가짜 황후 따위 언제고 내쳐질 운명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황제 폐하마저 저리 박대를 하는 거지요.”

깔깔깔, 시끄럽게 웃는 목소리가 세실레의 귓속을 후벼팠다.

분명 치맛자락을 그러쥐고 이를 악물어야만 겨우 버텼을 끔찍한 웃음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세실레 본인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

그저 영롱한 빛을 띠는 푸른색 눈동자로 좌중을 훑다,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며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몇 시간이고 반복되었다. 아침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몸이 허기를 느꼈다.

그러나 위장은 요동칠지언정 세실레는 고요했다. 허기짐 또한 제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설마 내가 미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인간의 기본 욕구조차 바라지 않게 되는 건지 의아했다.

그즈음, 그녀의 가족들과 만날 차례가 왔다.

그들은 세실레가 자리한 단상 앞에 서선, 감격에 겨운 눈으로 세실레를 보았다.

“세실레. 아니,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격양된 목소리. 그렁그렁 맺힌 눈물.

그러나 세실레는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원래였다면 예법도 잊고 달려나가 서로를 얼싸안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낯익은 사람이구나.’ 그것이 세실레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이었다.

더불어 세실레가 죽고 난 후 보았던 가족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말도 없이 죽어? 아팠으면 말을 했어야지. 황실에서 일부러 속인 것이 아니냐며 노발대발하고 있다고.’

‘이 일을 어쩔 거야! 우리도 다 같이 죽으라는 건가?’

타인의 무관심은 차라리 괜찮았다.

그러나 가족들마저 세실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여전히 바스러진 감정의 잔해가 가슴 언저리에서 불쾌한 이물감을 표했다.

동시에 세실레가 죽었음에도 슬퍼하긴커녕 죄인처럼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던 그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보기 싫어.’

그들을 마주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쳤다.

인형 같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세실레의 앞으로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고귀한 자리에 오르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세실레는 멍하니 그런 어머니의 자취를 눈으로 좇다, 조용히 읊조렸다.

“어제가 무슨 날이었죠?”

“예? 그야. 식을 올린 날이 아닙니까.”

뜻밖의 질문에 그녀의 안색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무어라 말을 더 얹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침묵하다, 멍하니 자신도 잊고 있었던 사실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니. 그날은 제 생일이었어요.”

세실레의 말에 가족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생일, 맞았다. 그날은 세실레가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보름달이 떠, 세상을 환히 밝히던 아름다운 날. 그녀는 태어났다.

하지만 성녀가 된 순간부터 그녀의 인간적인 부분은 불필요했다.

생일도 매한가지였다. 성녀에게 생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실레의 생일 또한 기억될 필요가 없었다. 도리어 경을 칠 일이었다.

게다가 황태후의 심성이 얼마나 험하던가. 이 좋은 날, 괜한 말이 황태후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일이 없었다.

세실레의 어머니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선 다급히 말을 이었다.

“어,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아직도 그런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 계시다니요.”

세실레는 그 말에도 별다른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저 놀랍다는 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저도 잊고 있었거든요.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담담한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이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알아챘다는 듯 덤덤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 생각났어요. 가족들을 보게 되어서일까요?”

세실레의 물음에 가족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떨떠름 해하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러고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다.

세실레는 그러한 가족들을 잠시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애당초 기대한 것도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피곤해. 이만 들어가서 쉴래요.”

“폐, 폐하. 지금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질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실레는 외면했다.

‘인제 와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여기서 황후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가족들의 체면도, 걱정도, 이 일의 후폭풍으로 일어날 일들도, 더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태연한 세실레와는 달리 뒤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렇듯 귀빈이 잔뜩 모인 자리에서 함부로 자리를 비웠다간 분명 말이 나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법에 엄한 황태후에게 호되게 혼날 것이 빤했다.

황태후가 알게 되면 무어라 반응할지는 뻔했다.

아직 황제가 연회장에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는데 황후가 먼저 자리를 벗어나느냐며, 난리를 칠 테지.

결국, 전전긍긍하던 도르데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세실레를 막아섰다.

“폐하. 아직 자리를 비우시기엔 이릅니다.”

“하지만 피곤한걸.”

“……제가 최대한 수습해 빨리 마치도록 해 보겠습니다.”

도르데아가 애원했다. 황실의 면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을 수도 있고 후에 벌어질 일들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분명한 점은 도르데아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황후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세실레는 금방 연회장의 비밀 통로에 다다랐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움직임에 채 불을 밝히지 못한 통로가 어두웠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내내 부재중이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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