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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4화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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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나 때리게?”

“당연하지요. 근본 없는 말투부터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그래. 어디 한 번 때려봐.”

세실레는 고개를 틀어 다시 벽을 응시했다. 때리라 하더니 치마를 걷는 것도 아니고 여상스러운 행동을 했다.

당황한 도르데아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새파랗게 어린 세실레의 건방진 행동에 분노해서는 아니었다.

‘왜 팔이 안 움직이지?’

분명 회초리를 내려치려 했는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무형의 힘이 그녀를 붙들기라도 한 듯이.

도르데아는 지금 겁에 질려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내가 겁에 질렸다고?’

고작 황후를 때리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각하고 나자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회초리를 들 재간은 없었다. 이마에서 뚝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겨우 숨을 들이켤 수 있게 된 가슴이 거칠게 헐떡였다.

그러는 중에도 세실레는 고요했다. 그녀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왜? 그만두기로 했어?”

“…….”

“난 맞아도 괜찮은데.”

그녀의 말이 도르데아에게는 달리 들렸다.

‘감히 네가 나를 훈육하려 하느냐.’고 혼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방정맞은 행동을 해 혼났을 때가 이랬을까?

도르데아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아주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결국 도르데아는 눈을 질끈 감고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지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별다른 쓴소리도 없이 세실레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도르데아는 그 변화가 의아하면서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세실레의 시선은 여전히 구석을 향해 있었다.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는 몽롱한 눈빛.

그것이 유달리 새하얀 세실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그녀가 꼭 신적인 존재처럼 보이게끔 했다.

‘……허울 뿐은 아니란 건가.’

기실 성녀란 명칭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간 성녀란 존재들이 특출난 힘을 내보인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귀족들의 입에서마저 불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진실일지 거짓일지 모르는 신화에 사로잡혀 황후를 간택한답니까?’

그건 도르데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세실레 대신 훨씬 더 교양 있는 가문에서 황후가 나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 시간을 기점으로 천천히 바뀌어 갔다.

세실레를 지켜보고 있자니 세렌디 신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설핏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고작 열여덟의 어린 황후를 보고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왜 갑자기 변했지?’

도르데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도리어 의아해졌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지?’

‘신에게 무어라 언질이라도 들은 건가?’

‘원래 성녀 출신의 황후란 이러한 건가?’

온갖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가설이 틀렸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장 전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전대 성녀는 세실레가 태어나자마자 내쳐져 별궁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어찌 처사가 그리 잔혹하냐고 따져 묻기엔 내내 이어진 역사에서 성녀들의 최후가 그러했다.

황제는 성녀인 황후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으며 제 딸을 황후로 만들지 못한 귀족들은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다.

치열한 황궁에서 아무런 세력도 없는 성녀가 버틸 리 만무했다. 결국 새로운 성녀가 태어나자마자 전대 성녀는 내쳐졌다.

유폐된 성녀들은 채 일 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도 대우가 험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아사했다.

입에 아무것도 넣지 못한 채 시체처럼 누워만 있다 끝내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죽어버렸다.

같은 역사가 반복되니 이젠 전대 성녀였던 황후를 내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죽하면 그것이 세렌디 신의 뜻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황후라면…….’

도르데아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의 황후라면 역사가 바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됐다.

세실레가 진짜 황후로서 자리를 공고히 한다면 위험해지는 것은 그녀였다.

훈육 시녀랍시고 제 몸에 손을 대던 이를 황후가 살려둘 리 만무했으니까.

‘나는…….’

도르데아는 세실레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입술을 악물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침묵에 잠긴 침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노크도 통보도 없이 누군가 함부로 황후의 침실에 침입한 것이다.

하지만 따져 물을 것도 없었다.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황태후 폐하!”

시녀들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태후는 그들의 인사를 곁눈질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현 황제의 어머니. 성녀 출신이 아님에도 당당히 황후의 자리를 거머쥐어 이제는 황태후가 된 여자.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완벽히 차림을 갖추었다.

화사하게 부풀려 묶은 머리와 주름 한 점 보이지 않게 공들여 한 화장. 화려하게 펼쳐진 드레스의 주름마저 흠잡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황태후는 고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여전히 침상에 걸터앉아있는 세실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곤 얇은 침의 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르데아. 어찌하여 황후의 의복이 저리 가벼운가?”

명백히 추궁하는 투였다. 황제가 침실에 들지 않았는데 감히 예법을 무시하고 예복을 벗었느냐고 묻는 게 분명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도르데아는 재빨리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황태후는 미련 없이 도르데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되었다.”

그녀는 대신 아직도 조용히 앉아만 있는 세실레의 앞으로 가서 재차 물었다.

“황후. 그대가 말해보시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오만한 목소리였다. 즐거워하는 것도 같았다.

황태후는 세실레를 좋게 보지 않았다. 황태후 또한 전대 성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후는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 선택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고리타분한 역사서에 적혀있는 신의 딸 같은 헛소리와는 달리 자신은 진정한 황후의 자질을 갖춰 이 자리에 오른 것이라 여겼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황제의 짝을 이미 점찍어 놨다.

아주 기품있고 교양있는 아이였다. 가문도 학식도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황실에 기대어 밥벌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세렌디테 가문과는 천지 차이지.’

황태후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맺혔다. 언제든 차기 성녀는 태어날 예정이었다.

언제고 새로운 성녀가 태어나면 세실레는 끝이었다.

‘얼굴만 반반한, 자격 없는 황후는 이제 쓸모 없단 게지.’

황태후는 그때까지 세실레가 분수를 잊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으레 그래왔듯이 세실레의 기를 죽이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반병신으로 만들어, 폐위되는 날까지 꼭두각시로 삼을 예정이었다.

‘지금쯤이면 잔뜩 겁을 집어먹곤 몸을 떨고 있겠지.’

황태후가 느른히 눈을 깔며 세실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세실레가 알아서 잘못했다 빌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세실레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고고한 자세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태후는 세실레의 태도가 어이없고 기가 차, 들으란 듯 거칠게 한숨을 뱉어냈다.

“허!”

그러나 세실레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를 두고 볼 황태후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언성을 더욱 높이며 말을 이었다.

“그 뻣뻣한 태도는 뭐지? 귀라도 먹은 게냐?”

하지만 놀랍게도 세실레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황태후가 손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세실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었다.

이전이었다면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하려는 것인가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태후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녀는 지금 세실레의 기운에 압도되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대한 위압감이 이 좁은 공간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숙여, 경배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황태후는 뻣뻣하던 고개를 반쯤 숙였다,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는 중에 세실레가 황태후를 지나쳤다.

곁을 스치는 얇은 옷자락이 흘린 자취에 황태후는 서둘러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곤 조금 전 치욕스러웠던 상황에 열이 받아, 이를 갈며 소리쳤다.

“어딜 가는 게냐!”

팔이 잡힌 세실레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는 곧 고요히 고개를 돌려 황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씻으러 갑니다.”

“뭐라?”

“아침이 되었으니 씻어야지요.”

태연한 답이었다. 되려 조금 전 소리친 황태후가 민망해질 정도로 세실레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은백색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옅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조용히 다물린 입술이 고요한 궤적을 그렸다.

황태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같잖은 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잘난 척을 해대?’

황태후는 머리끝까지 오른 분기를 겨우 억누르며 조용히 읊조렸다.

“네가 지금 황후가 되었다 하여 이리 오만방자하게 구는 게냐?”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만 세실레는 정적에 가까우리만치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리지도 고민에 잠기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미동조차 없는 움직임은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는 황태후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기묘한 분위기에 황태후가 눈을 크게 떴을 무렵, 세실레의 입매가 둥글게 말렸다.

세실레가 정적을 깨고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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