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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3화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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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대신께서 급한 일로 알현을 청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대로구나. 세실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재정 대신의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변명이었지만.’

실상 그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술을 진창 들이켜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음 날 공식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 돌았으니까.

전에도 세실레는 그것도 모르고 마냥 그를 기다렸다. 언제고 오지 않을 사람을 위해 갑갑한 예복을 잔뜩 걸친 채로.

그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무거웠다. 잔뜩 달린 머리 장식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오지 않겠지.’

설령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세실레는 하나둘, 머리 장식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녀가 황급히 다가서선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시녀, 도르데아는 고명한 로델린 백작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그녀는 세실레가 황궁에 들 적부터 세실레를 보필해왔다.

정확히는 보필이 아니라 감시를 해왔지만.

그걸 언급하지 않는 것은 세실레와 부인 간의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그러나 더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도르데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잊고 있던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내내 그녀에게 반항 한 번 못 하고 감시받던 기억들이었다.

좋은 추억일 리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세실레가 도르데아를 보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식전부터 나를 못마땅히 여겼으니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 뻔하잖아.”

“……설령 그렇다 해도 이리 방자하게 구시면 안 되십니다.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제국의 국모이시거늘.”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그러니 너도 그만 밖으로 나가 이 사실을 이리저리 떠벌리지 그러니? 새 황후가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았더라고.”

기가 막힌 세실레의 언행에 도르데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양 황망한 얼굴을 한 채 겨우 말을 이었다.

“방금 말.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 있으십니까?”

도르데아의 물음에 세실레의 입에서 실소가 흘렀다. 낯선 반응에 도르데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지금 막 황후가 된 어린 주인이 꼭 미쳤다고 생각했다.

불경한 말이라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그러나 세실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또 그것이 소문나 일파만파 퍼지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찌하여 자신이 회귀했는지. 하필이면 왜 그 시점이 식을 올린 날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걸 일일이 따져 묻기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으니까. 세실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끄럽네.”

“네? 무, 무슨.”

“시끄럽다고 했어. 날 그리 어릴 때부터 보았으면 표정만 보고도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서 파악하고 보필해야 하는 거 아냐?”

기가 막힌 언사에 도르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는 동안 세실레는 이미 탈의를 마치고 두피가 당겨질 만큼 묶은 머리끈을 풀어냈다.

도르데아는 당황하면서도 겨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실레를 달래기 시작했다.

“폐하께선 곧 오실 겁니다.”

“아니. 그럴 일 없어.”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세실레가 고개를 돌려 도르데아를 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는 투였다.

엄격하지만 달래는 표정. 과거엔 저 얼굴에 끔뻑 넘어가, 밤새 오지 않을 황제를 기다렸다.

‘거짓말,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으면서.’

세실레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와 내기라도 할래?”

갑작스러운 제의에 도르데아는 당황했다. 그녀는 유순하던 세실레가 갑자기 저렇게 바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세실레는 어딘가 달랐다. 매번 겁에 질려 울음을 꾹꾹 참아내던 어린 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도르데아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제 주인을 응시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저리 바뀌다니.’

도르데아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황실을 보필했고 그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녀의 나이 쉰, 이쯤 되니 사람의 눈동자만 들여다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세렌디 신에 맹세코 황후는 저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곱 살, 입궁하는 순간부터 차근차근 자의를 짓밟아 소극적인 아이로 만들어냈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세실레는 어딘가 달랐다. 저건 어설픈 반항이 아니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어디서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건가.’

그렇다면 소문이 새나간 구석을 찾아 입막음해야 했다. 황후의 행동에도 적절한 제약을 취해야 했다.

도르데아는 생각이 많아져 입을 다물었다. 그런 도르데아를 지켜보던 세실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그려졌다.

세실레가 반짝이는 은백색의 속눈썹을 짙게 내리깐 채 조용히 읊조렸다.

“왜 말이 없지? 감히 황제 폐하를 걸고 내기를 하자 하여 불쾌한 건가?”

“아, 아닙니다.”

도르데아는 서둘러 사과했다. 그리곤 당황했다.

‘고작 저런 여자에게 사과하다니.’

그 사실이 무척 분했지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아주 오랜 기간 갈고 닦은 본능이 소리쳤다.

‘감히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대개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레가 시선을 거두고 나서야 도르데아는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숨을 참고 있다는 것마저 깜빡 잊을 정도로 긴장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는 달리 그녀의 어린 주인은 도르데아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짙푸른 색의 깊이 있는 청안이 탁했다. 눈물이 고인 것도 상념에 잠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또렷이 벽 한구석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꼭 죽은 이의 것 같았다.

조금 전의 매서운 태도는 어디로 가고 순식간에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오랜 병자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상하다 여길 정도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도르데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실레에게 먼저 오지랖을 부려보기로 했다.

그건 일곱 살 세실레가 처음 황실에 들어와 울었을 적에도 건넨 적 없는 상냥함이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도르데아의 뜬금없는 물음에 세실레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말했잖아. 졸린다니까.”

“그럼, 취침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까는 안 된다면서?”

“……황제 폐하께서 늦으셨으니 이는 황후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

갑자기 도르데아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나 세실레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은 지금 이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잘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럼 잘래.”

세실레의 허락에 도르데아는 서둘러 방을 밝힌 불을 껐다. 그러곤 공손히 허리를 굽혀 밖으로 나갔다.

“그럼, 푹 쉬십시오.”

“그래.”

세실레는 나른히 대답했다. 눈꺼풀이 두어 번 깜박이다 말고 그대로 감겼다.

순식간에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도르데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황태후에게 알려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

느른한 숨이 흘렀다. 내내 시달렸던 몸이 눕자마자 통증을 호소했다.

이전이었다면 아파하는 모습을 들킬까 걱정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 통증마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아프구나.’ 정도의 감상이 다였다. 그리 인지한 세실레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잠들기 직전, 세실레는 옛날의 꿈을 꾸었다. 그건 그녀가 황궁으로 끌려오기 전 보냈던 시간이었다.

유달리 특별한 기억은 없었으나 그랬기에 더욱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남은 기억이 몇 없다는 거였다.

그저 정원의 화단을 어머니와 손수 가꾸었었고 그 화단에서 새하얀 백합이 피어나곤 했다는 것.

여동생과 함께 그네를 타고 놀다, 무릎을 다쳐 호되게 혼났던 것.

그리고.

그녀가 황궁에 오기까지의 배고프고 괴로웠던 기억.

이윽고 이제는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조용히 베갯잇을 적셨다.

***

날이 밝았다. 식을 올렸으니 연회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황후로서 귀빈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일정이 빠듯했다.

도르데아는 침착한 목소리로 세실레를 깨웠다. 어젯밤의 불미스러운 일은 모두 잊은 듯한 태연한 낯이었다.

“기침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실레는 눈을 떴다. 잠이 덜 깨선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세실레의 표정엔 한 점 변화도 없었다.

그저 잠시 이불자락을 쥐었다, 조용히 손에 힘을 뺄 뿐이었다.

세실레는 멍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앞에 선 도르데아를 보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아?”

선선한 목소리였다. 세실레에게선 비참함도 두려움도 엿보이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황태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닐진대.

그에 한참 말을 고르던 도르데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폐하, 아시겠지만 황태후께서 간밤의 일을 추궁하실 겁니다.”

“네가 내 걱정을 해주다니, 놀랄 일이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네가 내 걱정을 하다니 놀라워서.”

세실레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특별할 것 없는 일을 읊는다는 양 상투적이기까지 했다.

도르데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간밤의 일을 새신부의 흔한 심경의 변화로 치부해버렸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장 힘들어지는 건 황후 본인이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세실레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세실레는 황태후를 가장 무서워했고 이렇듯 혼날 일이 있으면 크게 겁에 질렸다.

그런데 지금 황후의 모습에선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내 그녀를 곁에서 지켜 봐온 도르데아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도르데아는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훈육 시녀였다. 그녀의 만행을 두고 봐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어제야 사정이 딱해 봐줬다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두면 황태후에게 혼날 것이 자명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제 선에서 끝내는 게 나았다.

도르데아는 품에서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태후가 도르데아에게 황후를 회초리로 훈육할 수 있는 권한을 준 덕이었다.

‘사단이 나기 전에, 먼저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겠지.’

도르데아가 회초리를 막 들어 올리던 차, 조용히 앉아 있던 세실레가 고개를 틀었다.

세실레는 일전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도르데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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