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完)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발레리안의 곁에 앉은 이브가 방금 가게에서 사 온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꽃에 상처라도 날까 흠칫하며 손을 떼었다.
“이러면 안 되지……. 깨어나면 줄 선물이니까.”
그에게 줄 꽃 선물이지만, 그가 깨어나지 않아서 주인에게 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이 수없이 많았다.
오늘도 굳게 닫힌 눈꺼풀을 본 이브는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리안, 얼른 눈 좀 떠 봐. 내가 너무 보기 싫어서 그래? 그렇다면 여기 내가 든 꽃을 봐. 참, 예뻐. 이 꽃도 네가 참 좋아할 거야.”
능청을 떨던 이브는 이렇게 혼잣말에 익숙해진 제 모습이 신기했다. 이전이라면 절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하얀색인지 노란색인지 보라색인지……. 꽃잎은 둥근지 뾰족한지. 향기는 짙은지 은은한지……”
사실 한 달째 같은 꽃을 사 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새삼스러운 듯 조잘거렸다.
“나와 함께 이 꽃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그녀를 좀먹는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넌 언제쯤 깨어날까.”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그녀는 많은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 상황이 사실 신이 그녀에게 내리는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신에게 축복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엘라를 상처 준 것에 대한 징벌.
만약 징벌이라면 왜 잘못이 없는 발레리안이 이렇게 아파야 하냐고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차라리 그녀를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 기도가 신에게 닿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그 순간이었다.
발레리안의 얼굴이 움찔했다.
발레리안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브는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발레리안?”
그녀의 부름에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이브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라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영원히 마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흐릿하게 담고 있었다.
그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리안이라고 부르라니까, 이브.”
“정말…… 정말 발레리안이야?”
이브는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일어난 거야? 정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그녀는 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아!”
허벅지에서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당황한 발레리안이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다시 누웠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니 놀란 근육이 통증을 유발했던 탓이다.
그의 신음에 이브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치의를 불러올게!”
허둥거리며 그녀가 자리에서 떠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팔을 붙잡는 손길에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았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를 붙잡은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이브는 뿌리치지 않았다.
“……잠깐, 이브.”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의사를 부르려던 그녀는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필요한 거라도 있으면 당장 그의 앞에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혹시 목말라? 아니면 어디 아픈 거야?”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 이브는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예상과 동떨어진 말을 꺼내었다.
“잠시만 더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
발레리안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장난기가 엿보이는 미소였다.
“난 이브가 보고 싶었거든.”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이브는 곧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혹시, 들은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안, 얼른 눈 좀 떠 봐. 내가 너무 보기 싫어서 그래?”
그녀는 제가 그에게 했던 말들을 그가 들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발레리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짙어졌다.
그녀는 더듬더듬 물었다.
“호, 혹시 여태까지 했던 말들…… 다 들은 거야?”
제발 아니길.
이브는 간절히 빌었다. 한 달 동안 그의 곁에서 부린 추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깨어나지 않은 그를 붙잡고 눈물 콧물을 쏟은 건 예삿일이었고, 낯간지러운 고백도 서슴지 않고 쏟아 냈다.
‘저, 정말 의식이 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는 몰랐지!’
처음엔 그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그를 향해 그녀는 제 속내가 담긴 말을 솔직하게, 아무 말이나 거름망 없이 다 내뱉었다.
‘그걸 다 들었다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만약 그녀 앞에 접시 물이라도 있었다면 코를 콱 박고 죽어 버렸을 텐데.
“하아…… 정말 죽고 싶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발레리안이 돌연 얼굴을 굳히며 정색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이브…….”
그는 아직도 대주교의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던 이브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생생하고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진 걸 본 이브가 황급히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농담처럼 한 말에 그가 이리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이브는 곧장 당황했다.
“오래도록 잘 살 거라고 맹세해 줘.”
그녀의 사과에도 성에 안 찼는지 발레리안이 정색하며 요구했다.
이브는 왜 그런 것까지 맹세를 해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오래…… 잘 살도록 노력할게.”
“좋아.”
그제야 발레리안의 굳은 얼굴이 풀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가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았다.
“저게 그 꽃이야?”
“아, 응.”
이브는 쭈뼛쭈뼛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녀가 꽃을 집어 드는 모습은 미치도록 어색해 보였다.
“리시안셔스네.”
그가 바로 그녀가 든 꽃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금방 꽃 종류를 알아맞히라곤 예상치 못했던 이브는 그대로 멈추었다.
“어떻게 알아?”
“응, 이거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청혼할 때 줬던 꽃이거든.”
“……무, 뭐?”
이브는 더듬더듬 되물었다. 공작님이 공작 부인한테 청혼할 때 줬던 꽃?
“몰랐어? 그래서 공작 성 화원에 리시안셔스가 많이 피어 있잖아.”
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이브는 잠시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정원에 꽃이 많다는 사실만 떠오를 뿐이었다.
행여 리시안셔스를 봤더라도, 그때 당시엔 그 꽃이 리시안셔스라는 걸 몰랐을 터.
그녀도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접하게 된 꽃이었다.
“꽃말도 ‘영원한 사랑’이라서 내가 좋아하는 꽃이야.”
발레리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양 같은 미소. 저 미소를 보기 위해 얼마나 염원하고 기다렸던 건가.
이브는 가까스로 식혔던 두 뺨이 다시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발레리안이 짓궂게 물었다.
“이브도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병문안을 올 때마다 꽃을 들고 온 이유도 그 꽃말 때문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부끄러워 대답을 회피했다. 거기서 답을 얻은 발레리안의 미소가 묘하게 굳어졌다.
“이브, 나 기뻐해도 되는 거 맞아?”
“……ㅇ.”
“뭐라고? 안 들려.”
발레리안은 그녀의 작은 말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이브가 기겁하며 그의 행동을 말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데, 움직이면 어떡해!”
“하지만 이브의 말소리가 잘 안 들리는걸?”
“……그러면 큰 소리로 말해 줄게.”
척척, 발레리안의 앞에 다가간 이브는 용기를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아마도…… 기뻐해도 되는 거 맞아.”
그녀의 말뜻이 뭔지 이해한 발레리안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이브는 그의 반응이 이상해서 당황했다.
“리안, 괜찮은 거 맞아? 역시 몸이 안 좋은 거야?”
“…….”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괜히 불안해진 이브가 의사를 부르러 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지만, 발레리안이 또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 이브…….”
“뭐?”
“이게 꿈은 아니겠지?”
이게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인가. 그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던 이브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진심으로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냐고.
“……꿈, 아니야.”
그녀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빠짐없이 전해지도록.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엔 환희와 기쁨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그녀의 말로 확신을 얻은 발레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미안해, 이렇게 늦게 말해서…….”
그러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도르륵 굴렸다.
‘말할 수 있다, 이브 에스텔라.’
이 새삼스러운 상황이 왜 이렇게 낯간지럽고 쑥스러운지 모를 노릇이다.
일전에 그런 낭만 없는 고백도 곧잘 했으면서 말이다.
다시 얼굴이 붉어진 채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리시안셔스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꽃의 은은한 향내가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꽃은 그들의 미래를 얼핏 보여 주는 듯했다.
“발레리안, 나랑 다시 약혼해 줄래?”
그들을 비추는 햇빛이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완결>
<에필로그1-1>
어느덧 완연한 봄이라는 듯 바람결을 따라 벚꽃의 잎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저게 마법사의 기념관이구나'
황제의 명으로 장인으로 저명한 건축사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 위용에 걸맞게 아름답고 정밀한 건물 앞에 선 이브는 작게 감탄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 푸른 벽돌의 기념관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롲잡았다.
그러나 건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브는 북적거리는 인파에 살짝 당황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되게 많네."
'휴.
만일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다. 발레리안과 나란히 온 터라, 인파에 질식해서 죽는다는게 뭔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다행이야."
발레리안이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마법사들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가 말했다. 이브도 그 말에 동의했다. 넓은 지평선 위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것보단 사람이 북적거리는 편이 나았다.
주위를 훑어보던 그녀는 이상한 광경도 발견했다. 누군가 노점을 꾸린 채 꽃으로 만든 장식을 팔고 있었다.
이브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법 노점상?'
아무리 여기에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허가 받지 않은 곳에서 이런 식으로 장사하는 건 곤란했다.
'장사까지 잘되잖아?'
심지어 실력도 좋지 않은데, 장사가 잘되는 게 참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에 이상한 꽃 장식을 쓰고 다니는 행인들을 살펴보았다.
대체 이런 걸 돈 주고 파는 양심 없는 장사꾼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다른 곳에 가서 장사하라고 말해 줘야지.'
척척, 걸어가던 이브는 낯익은 장사꾼의 얼굴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어머니, 아버지?"
이브는 황당한 시선으로 노점상, 아니 백작 부부를 보며 아연히 중얼거렸다.
'엄마랑 아빠잖아!'
그녀를 알아본 백작 부부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들 뒤쪽에서는 노아가 이마를 짚은 채 탄식을 흘리고 있었다.
영락없이 강제로 노력에 끌려온 사람의 행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