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래도 역시 기념관보다는 작위랑 땅을 받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이브는 저를 설득하는 아버지를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보았다.
“저희가 지금 돈이 없어서 빚쟁이한테 쫓겨 다닌 건가요?”
이 상황에서 돈이랑 작위가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에스텔라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잠자코 들어 보거라. 이렇게 한 단계씩 차차 올라서 힘을 키우는 거다.”
뭐?
대체 한 단계씩 힘을 키워서 뭘 할 건데.
차분한 얼굴로 꺼내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이건 광기라고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만약 제가 황위를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가정해 봐요. 그러면 국사는 누가 운영하죠?”
“그야 당연히-.”
백작과 백작 부인은 나란히 이브를 보았다. 이브는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지금 백작가의 업무만으로도 과중하거든요? 그런데 나라까지 운영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원래 사람은 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면 하게 되는 법이란다.”
“……그러면 가문 일도 두 분이 다 하세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늙었단다.”
회한이 깃든 시선으로 은은한 미소를 짓는 백작 부부를 보는 이브의 심정은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노답.’
도무지 답이 없었다. 그저 제 딸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광과 권력을 누리기 바라는 단순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으냐.”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요.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는 거니까요.”
무소불위의 권력자의 과오.
그건 필연적으로 어떠한 보상과 위로로도 회복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백작 부부의 눈가에 억울함 가득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부모님의 눈물을 엿본 이브는 복잡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훨씬 전부터 고생하셨겠지.’
실제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은 결혼 과정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먼저 청혼한 건 어머니 쪽이었는데, 아버지가 번번이 청혼에 퇴짜를 놓았던 탓이다.
그 이유는 에스텔라 백작 가문에 얽힌 비밀에 있었다.
제국에서 척결 대상 1호로 꼽히는 마법사의 후예.
그런 커다란 비밀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면서 결혼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못 할 짓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청혼을 한사코 거절했지만, 어머니는 결혼해 주지 않으면 콱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말 목이라도 매서 죽는시늉까지 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기절한 아버지는 눈을 뜬 후, 끝내 진실을 고백했다.
“베로니카, 사실 저는…… 마법사의 후예입니다.”
외부인에게 섣불리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을 각오하고 어머니에게 진실을 밝혔다. 그리고 어머니는 며칠간 잠적했다가 나타났다.
“우리, 결혼해요.”
두 사람은 그런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첫아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에 부부는 안도했다.
‘100년 동안 에스텔라 가문엔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가문에서 도는 불문율의 법칙에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방심한 탓일까. 그들은 예기치 못하게 둘째를 임신했다.
처음엔 다소 당황했으나 백작 부부는 당연히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에스텔라 가문에서 100년 동안 태어나지 않았던 여자아이가 태어나 버린 것이다.
그길로 위태로운 줄타기가 시작되었다.
귀여운 막내딸이 까르르 웃을 땐 행복했으나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미래에 불안해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은 행복.
한없이 불안정한 시간 속에 백작 부부는 비밀을 삼키고 살아갔다.
‘……영 심정을 이해 못 할 건 아닌데.’
부모님이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이브의 입 안도 썼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무책임하잖아!’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이건 이거다. 그녀가 백작 가문의 가업을 물려받은 지 벌써 7년째.
초급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사람이 지나치게 영특하게 굴면 안 된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일을 너무 잘하면 업무가 밀려 들어오는 법. 적당히 어설픈 면모도 보여 줘야 한다는 걸 전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줄 그 누가 알았겠나!
그녀는 그렇게 열세 살 때부터 가문의 일을 도맡아서…….
이브는 그간의 일을 떠올리며 단호히 일갈했다.
“이쯤에서 만족하세요. 그게 우리 형편에 딱 맞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았다.
* * *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브는 익숙한 꽃집에 들러 꽃을 골랐다. 꽃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은 오늘도 방문한 단골손님을 향해 활짝 웃었다.
“마법사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이브는 낯간지러운 어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마법사라고 불릴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게 부담스러웠다.
“오늘 사 가시는 꽃은 개관식에 가져갈 거예요?”
“아.”
이브는 그 말을 듣고서야 오늘이 마법사들을 기리는 기념관의 개관식이 열리는 날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어제 부모님이 옷을 사고, 부지런을 떨었던 거구나.’
부모님이 부재하셔서 주변에 마실이라도 나갔나 했는데, 웬 짐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게 아닌가.
모두 부티크에서 쓸어 오다시피 한 신상 옷들이었다.
웬일로 부지런하게 많은 옷과 신발을 산 건가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개관식에서 입을 것들인 모양이었다.
그녀보다 마법사 기념관 개관식을 더 기대하는 눈치였다.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정말 단순한 분들이었다. 그녀는 그런 부모님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어디서 사기라도 당해 오는 게 아닌지.
이브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조금이라도 꽃을 더 팔 수 있지 않을까. 장사꾼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난 개관식에 갈 생각 없어.”
“예에? 왜요? 마법사를 위한 기념관이잖아요.”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꽃을 팔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주인공이 개관식에 빠진다는 것에 더 놀란 것이다.
“마법사님이 빠진다고요?”
“응.”
그녀는 무심히 대꾸하곤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앞에 선 곳엔 화사하게 핀 리시안셔스가 있었다.
“최대한 상태가 좋은 걸로 줘.”
“네, 네.”
익숙하게 주문을 받은 소년은 싱그러운 상태의 리시안셔스를 포장해서 그녀에게 건넸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꽃은 청혼할 때나 사는 꽃인데, 누구한테 주는 건지 여쭤봐도 돼요?”
“안 돼.”
“넵.”
이브는 단호하게 소년의 호기심을 잘라 냈다. 성실하긴 했지만, 이 소년은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었다.
특히 마법사인 그녀와 관련된 일이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자니 살짝 마음이 약해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마법사님이요? 아…… 혹시 엘라 님?”
꽤 눈치가 빠삭한 소년이었다.
이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꽃을 받고 값을 치렀다. 그러곤 사뿐한 발걸음으로 꽃 가게를 나섰다.
그녀가 올라탄 마차는 어느덧 루드비히 공작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레리안의 의식불명이 길게 이어지자, 루드비히 공작이 황궁에 있던 그를 공작 성으로 옮겼다.
공작 성이 황궁보다 일조량이 더 풍부하다는 이유였다.
‘일조량이라니.’
완전히 식물 취급이 아닌가.
발레리안이 식물이라면…… 만약 내가 든 꽃과 같다면.
그는 필시 해바라기였을 게 분명하다며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햇빛을 좋아하는 해바라기의 특성이 그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리고 꽃말이 ‘일편단심’이라는 것까지.
그런 꽃을 꺾을 뻔한 사람이 그녀, 자신이었다.
“…….”
이브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았다.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가는 풍경들이 시선에 잡혔다.
이렇듯 그가 깨어나지 못한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녀도 낮엔 그를 보러 가고, 밤엔 백작저의 업무를 하며 일상생활을 보냈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이 생각만큼 죽을 것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무언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색채로 가득했던 세상이 무채색으로 시들어 버린 느낌이었다.
문득 눈물이 툭 흘렀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눈물을 훔친 이브는 공작 성에 들어갔다.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씩씩한 태도였다.
발레리안의 방에 노크한 후, 문을 연 이브의 눈빛엔 희망이 스쳤다.
이 안에서 깨어난 발레리안이 그녀를 반겨 주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곤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발레리안 곁에 주치의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는 이브를 보며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가 많으세요. 발레리안 상태는 좀 어떤가요?”
그녀의 물음에 주치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입니다.”
“그렇군요…….”
이브는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다. 언젠간 깨어나겠지. 그러나 실망감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를 힐끔 본 의사가 말했다.
“그럼 저는 잠시 자리를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그녀를 지나쳐 방을 나서는 의사의 입가엔 채 감추지 못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물론 이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