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똑똑.
황제의 접견실에 울려 퍼진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이 한 소식을 전해 왔다.
대화를 나누던 황제와 자비에는 의아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브 에스텔라 백작 영애라고 합니다.”
그들은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정확히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비에는 잠시 스케줄을 상기한 뒤, 입을 열었다.
“에스텔라 영애와의 접견 시간이 3시였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자비에도 에스텔라 영애와 폐하의 접견 시간이 한 시간 뒤인 4시로 알고 있었다.
“영애한테 다른 급한 볼일이 생긴 모양이군. 들라 하라.”
“예, 폐하.”
황제의 말에 시종은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다. 곧이어 이브가 접견실로 들어왔다.
“허억, 허억. 폐하. 안녕, 하세요.”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브는 헐떡거리며 땀을 뻘뻘 흘렸다.
먼 곳에서 쉬지도 않고 뛰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자비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뛰어올 사람이 아니었다.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하아. 접견 시간에 늦을까 봐 뛰어왔더니, 쿨럭.”
“그래서 한 시간이나 일찍 왔단 말인가.”
황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시계를 보았다.
아무리 성실한 신하들일지라도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접견실에 오는 경우는 잘 없었다.
“예……? 한 시간이요?”
황제의 말을 듣고 이브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자비에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시간을 착각했나 보군.’
왠지 이럴 거라 생각했다. 일전에 자비에와 위장 약혼과 관련하여 몇 번 만났을 때도, 그녀는 오차 없이 시간을 지켰다.
그런 사람이 폐하와의 접견이라고 한 시간 일찍 올 리가 없었다.
“혹시 폐하께서 급한 일로 부르신 게 아닐지 우려하여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자비에가 입을 열었다. 이브는 그의 말이 맞는다면서 동조했다.
“후욱……. 맞아요.”
대답하는 그녀의 숨은 여전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짜 넌 죽었다.’
이브는 다시 노아를 속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면 저는 이만 자리를 뜨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그래, 들어가 보아라.”
황제의 축객령이 떨어지자, 자비에가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이브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에게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후우. 완전히 숨을 가다듬은 이브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똥개 훈련을 시켰다, 이거지.’
어떻게 보복할지 그녀는 단계별로 상상을 이어 갔다.
처음엔 주먹질이었으나 상상의 끝엔 능지처참 상태로 널브러진 노아가 있었다.
하지만 겉으론 다소곳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폐하.”
“아아, 여기 앞에 앉게나. 에스텔라 영애.”
이야기가 길어질 거란 소리였다.
이브는 황제가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 대충 예상했다.
‘성국이랑 관련한 이야기겠지.’
그간 가족들과 가솔들이 죄인처럼 숨어 지내고, 그녀가 발레리안에게 했던 삽질을 떠올리면 이 대담이 딱히 달가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거쳐 가야 할 관문. 지금은 기분이 태도가 되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황제는 마주 앉은 그녀를 보며 천천히 본론을 꺼내었다.
“그래……. 그간 일로 영애를 포함해 백작가의 사람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는 건 짐도 알고 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너무 많은 일과 고난을 겪었다.
감사 인사를 건넨 그녀는 묵묵히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솔직한 그녀의 반응에 황제는 웃음을 흘릴 뻔하였다.
결단코 이 사안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지 자비에가 왜 이브 에스텔라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쌍한 순정으로 끝날 것이 훤히 보이는 짝사랑이었기에, 황제는 속으로 자비에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이번에 자칫 제국에 큰 우환이 생길 뻔한 걸 막아 준 그대의 공로도 알고 있니라. 그 공을 생각해 작위와 영지를 내리도록 하겠다.”
“……제게 공 치하를 내리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상이라니. 가문의 영광이라며 감읍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브는 그러지 않았다.
으레 황제에게 치하를 받는 귀족들과 그녀의 상황은 전혀 달랐기에.
“마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공에 대한 치하는 나중에 깨어날 발레리안에게만 내려 주세요.”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다.
차를 마시던 황제는 그녀의 말에 눈썹을 슬그머니 올렸다.
겉으론 겸양의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속은 완곡한 거절임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특히나 마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말은 대놓고 말하는 거나 진배없었다.
‘……그래, 영애의 생각은 다를 줄 알았지.’
황제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어제 오후. 황제는 에스텔라 백작 부부를 황궁으로 따로 불렀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작위와 땅을 내리겠다는 말에 백작 부부는 반색하며 좋아했다.
단순히 재물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죄인으로 숨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한 것이다.
‘원래부터 백작 부부가 순진하고 단순했다는 걸 알고 있었건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황이 지나치리만큼 원만하게 흘러가자 황제는 혹시 몰라 에스텔라 영애를 불렀다.
이 일의 당사자는 백작 부부보단 이브 에스텔라에 가까웠으니.
예상대로 이브 에스텔라는 제 말에 함의된 뜻을 파악하고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백작 부부가 아직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던 모양이고만.’
황제의 눈가에 주름이 짚어졌다. 고민하느라 잠시 다물었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진심으로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로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일은 짐도 유감과 사과를 표하고 싶구나. 그 뜻을 충분히 전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 성싶으냐.”
조금 편해진 그의 말투에 이브는 그가 진심으로 묻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길 원하는 시선을 읽은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음…….”
그러던 중.
문득 감옥에서 보았던 환상 마법, 100년 전의 마법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아! 리아 루시엘라.’
또랑또랑하며 단호하게 부르던 여자들의 목소리.
마법사들은 이브를 재촉하며 성녀를 구하기 위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들을 막기 위해 수많은 악마가 그녀들 앞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두려움 한 점 없는 얼굴로 악마들과 맞섰다. 어느 한 명이라도 물러나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용감했었어.’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몰려오는 악마들의 모습은 이브조차 조금 겁이 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 용맹함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제국은 진정한 영웅을 저버렸다.
‘이대로 나 혼자 작위랑 땅만 받고 끝내면…….’
수북이 쌓인 먼지 아래 퇴색되는 책 표지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희생도 잊힐 것이다.
이대로 누명만 벗겨진 채.
결심이 서자 이브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신이 황제에게 받아 내야 할 것이 명확히 그려졌다.
“단지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눈을 깜빡이던 이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법사들의 노력이.”
그녀의 말에 황제는 엄중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도록 하겠다.”
* * *
병실에 돌아온 이브는 희번덕거리며 안을 훑었다.
흡사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 같은 광경이었다.
“……그 자식, 빨리도 튀었네.”
쳇. 눈치는 빨라 가지고.
노아는 보복이 무서워서 일찌감치 도망간 게 틀림없었다. 이브는 혀를 차며 발레리안의 옆에 풀썩 앉았다.
햇살 아래에 유려한 미남자가 누워 있었다. 흡사 곤히 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언제쯤 깨어날까.’
벌써 의식을 잃은 지도 2주가 넘었다.
“리안, 오늘 폐하께서 나를 부르셨어.”
그녀는 그의 곁에서 앉아 오늘 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이라도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허공에 흩어지기만 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우울한 그녀의 표정과 달리 입에서 흘러나온 어조는 여상하고 밝았다.
혹시라도 듣고 있다면 목소리에 우울함을 묻히고 싶진 않았다.
한편 자비에는 망부석이 되어 그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 장면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히 열린 문틈에 의한 것이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제발, 제 동생 좀 말려 주십시오, 전하.”
황궁에서 징세관으로 일하는 노아는 자비에와 마주칠 때마다 청승 떠는 제 동생 좀 말려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그 말에 자비에는 발레리안의 상태가 심각한가 싶어서 친히 발걸음을 했다.
노아의 말대로 발레리안은 그리 상태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당장 지금이라도 눈을 뜬다 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영애에게 이런 면도 있었군.’
자비에는 노아의 말처럼 그녀의 행동이 청승으로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진심만 보였을 뿐이다.
그런 이브를 한참 보던 자비에는 야트막한 미소를 흘렸다. 미련한 자신에 대한 자조였다.
남몰래 품었던 마음을 접은 자비에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이 지독히도 푸르르고 맑았다.
……눈치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