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전과 똑같이 다시 반복될 뻔했던 악마 소환 사건은 마법사가 성녀를 본래 세계로 돌려보내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100년 전, 악마 소환 사건의 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성국이 악마 소환 사건의 주동자였으며, 마법사들은 포털을 막은 영웅이라는 것.
그 두 가지 사실은 세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충격에 빠진 제국민들은 불편한 진실에 관해 언급했다.
‘……바로 제국이 그 영웅들을 제 손으로 처형했다는 것.’
이것이 제국민들에겐 진정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제국 사람들은 밤낮없이 마법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제국의 영웅도 그렇게 모함을 당해서 죽는데, 우리 같은 시민들은 더욱 위험한 거 아니오?”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무력하게 죽을 수도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무섭구만.”
그 사실은 제국에 대한 민중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 불신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졌고, 쉬이 불식되지 않고 나날이 불타올랐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원탁 회의장.
그동안 성국의 위세에 눌려 있던 무관 귀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본보기로 일벌백계해서 제국의 위신을 세우소서!”
“맞습니다!”
성국과 친선을 유지하던 귀족들도 할 말이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 고심하던 황제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성국을 완전히 지도에서 지우도록 한 것이다.
이미 아리엘을 포함하여 고위 사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속속히 드러난 상태였다. 거기서 성국을 내버려 둔다면, 제국의 근간을 똑바로 세울 수 없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럼 마법사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성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서 멸망을 막았다는데, 보상이라도 있지 않겠나?”
“글쎄…… 마법사가 공 치하를 받겠는가?”
“왜?”
“평생 도망자로 살아갈 뻔했는데, 내가 마법사라면 내 손으로 제국을 박살 내지 않을지…….”
“어허! 이 사람아, 그런 위험한 소리를.”
“뭐, 힘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지. 대마법사는 천지를 바꾸는 힘도 있다고 하잖나.”
아무리 쉬쉬해도 다들 암암리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법사가 제국을 크게 봐주고 있다는 것을.
* * *
“사람들은 네가 제국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더라.”
병실에 들어온 노아가 세간에 떠도는 소식을 이브에게 전했다.
“……네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들이지.”
노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죽거렸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씁쓸한 듯, 찝찝한 낯이었다. 누명이 벗겨진 사람치곤 기쁜 기색은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던 건지.’
아버지와 어머니, 가솔들이 불쌍하기만 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누이도 포함해서.
“가문의 일도 귀찮다면서 억지로 하는 애가 나라를 경영해? 그게 바로 천지가 개벽할 일 아닌가?”
“그러게…….”
이브의 영혼 없는 대답에 노아는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라면 단박에 그 가문 일조차 돕지 않는 저를 공격했을 테지만 무기력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넌 대체 언제까지 청승을 떨 작정이냐?”
노아는 한심하다는 듯 발레리안의 옆에 있는 이브를 보았다.
며칠째 우중충한 낯으로 병상을 지키고 있는 이브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깨어난다고 하잖아. 그러면 곧 일어나겠지.”
노아의 낙관적인 말에도 이브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곤히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발레리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제 깨어나는지도 모르니까.”
며칠째.
굳게 닫힌 그의 눈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득함 속에 그녀는 여기 막 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 * *
발레리안이 혼수상태로 돌아오자, 루드비히 공작이 곧장 이곳을 방문해 발레리안의 상태를 살폈다.
“겉은 멀쩡하지만, 안은 엉망진창이군.”
본래라면 엘라의 힘으로 이 정도 내상은 무리 없이 극복할 수 있었지만, 힘이 불안정해진 것과 더불어 사악한 마력까지 내부를 휘젓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루드비히 공작이 말했다.
“시간이 곧 약이다.”
그 말은 치료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이브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시 지독한 무력감이 그녀를 잡아먹었다. 단순히 연인이 아파서 느껴지는 슬픔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복합적인 감정이 그녀를 휘감았다.
‘……어쩌면.’
그가 그녀의 마력을 받아 내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 아리엘의 행동을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이브는 좀처럼 후회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자책하는 이브를 물끄러미 보던 루드비히 공작은 그답지 않게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악마는 본래 노련한 협잡꾼이다. 그런 일에 휘말렸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
공작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은 그녀가 아닌, 악마에게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아들이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다.
그 상황에 대한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며 원망할 법도 한데, 공작은 작은 사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처음부터 진실을 밝혔더라면…….”
이런 최악의 상황은 면하지 않았을까.
이브는 계속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발레리안의 진심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고, 그녀와 가족의 안위만 염두에 두었다.
공작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이브의 표정은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이가 그녀 탓이 아니라고 입을 모아도 정작 당사자의 귀엔 닿지 않는 것이다.
이브의 속내를 훤히 읽어 낸 루드비히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도 멜린을 잃고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멜린이라면…… 루드비히 공작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브는 공작이 갑자기 사별한 전 부인을 언급하자 조금 당황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의 죽음과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이브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멜린 루드비히.
10여 년 전.
발레리안의 친어머니이자, 루드비히 공작 부인이었던 그녀는 친정에 가던 중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게 세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브도 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지. 그날 아침엔 내가 엘라로서 활동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을 해치겠다는 협박장이 왔다.”
그날을 회상하며 담담히 말을 이어 가는 공작은 얼핏 평소와 똑같아 보였지만, 푸른 눈동자에 비친 음울함이 완전히 가려지진 않았다.
“당연히 나는 변변찮은 뜨내기의 편지로 치부했다. 예전에도 이런 협박장은 심심치 않게 왔었으니까. 행여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오만했다. 그리고 그날 밤, 멜린이 친정에 가는 사이에 실종되었지.”
“설마…….”
“그래, 악마들의 소행이었다. 그녀의 실종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이브는 숨겨진 죽음의 내막에 숨을 멈추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엘라로서의 활동을 멈추었다.”
돌연 디에고 루드비히가 엘라로서 악마를 처단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일은 이브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예견하지 못했기에 깜짝 놀랐다.
“빈 껍데기만 남은,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렸지.”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나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멜린의 죽음이 내 탓이라고 자책하며 죄책감에 휩싸인 채 허송세월을 보냈지. 너 또한 이 죽음이 온전히 내 탓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아니에요. 악마가 저지른 짓에 왜 공작님이 책임을 느끼셔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루드비히 공작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브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니 상투적인 말로 듣지 마라. 정말로 네 탓이 아니니.”
이브는 그의 진심 어린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발레리안의 다정함은 어쩌면 루드비히 공작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닐까.
다만 발레리안을 보는 공작의 시선이 조금 복잡해 보였다.
“그래도 발레리안은 나보다 낫군.”
“……?”
“나처럼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고 구했으니까.”
루드비히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병실을 나갔다.
* * *
그때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회상에 잠겨 있던 이브는 노아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아직 차도가 없냐?”
“응, 늘 그렇지…….”
발레리안 옆에서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날이 맑을 때마다 그가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커튼을 걷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발레리안 곁에 붙어 있던 이래로, 하늘에 구름이 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마법으로 하늘에 있는 수분을 밀어내서 인위적으로 맑은 날씨를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발레리안이 조금 더 빨리 회복할 거야.’
단지 한 사람을 위해 날씨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물론 옆에 있는 노아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완전 극성이라고 난리 치겠지.’
이브는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괜히 옆에서 얼쩡거리는 노아를 흘겨보았다.
그가 용건 없이 그녀를 찾아올 리는 없을 텐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람.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온 건데?”
“아, 맞다.”
노아는 까먹을 뻔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정확히 3시에, 폐하께서 널 뵙자고 하셔서 이 얘기 전하러 왔다.”
참, 친절한 오라비가 아니냐?
노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이브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렸다.
오늘 식사가 참 맛있었다는 듯한 여상한 말투였지만, 정작 말 내용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방금 굉장히 불길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뭐? 잠깐, 3시?”
이브는 황급히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병실에서 폐하의 접견실까지는 걸어서 40분, 뛰면 20분…….
개같이 뛰면 15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 그걸 왜 지금 말해!”
버럭 소리치는 그녀에게 노아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네가 기운이 없어 보이길래 활기 좀 북돋아 주려고-.”
퍼억!
그녀는 단박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노아의 명치에 주먹을 꽂고는 병실을 뛰쳐나갔다.
“내가 없는 동안, 리안 잘 보살피고 있어!”
“으, 으헉…….”
노아는 이미 맞은 부위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병간호는커녕 아무래도 자신도 발레리안 옆에 나란히 몸져눕는 신세가 될 것 같다고.
노아는 아득해진 머릿속으로 구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