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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96화 (96/100)

96화

그때와 같이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한 아스모데우스가, 그녀 앞에 있었다.

위로 작게 뚫린 창살로는 석양이 지는 듯 노을빛이 지하로 스며들었다.

“불쌍하니까 내가 친절하게 알려 줄게. 마법사는 누군가를 회복시킬 능력은 없단다. 오로지 누굴 공격하고 해치는 데 쓸모를 다할 뿐이지.”

“꺄악!”

아스를 발견한 유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브의 뒤에 숨었다. 뒤에서 이브의 어깨를 붙잡는 유리의 손이 가냘프게 덜덜 떨렸다. 소년을 마주한 이브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스모데우스?”

“이런, 그새 아바론이 참지 못하고 다 불어 버린 모양이네.”

아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싱긋 웃었다.

“맞아, 나야. 여기서 또 만났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벽에 기댄 채 정신을 잃은 발레리안에게로 향했다.

“엘라한테 갚아 줄 빚이 있었는데, 일단-.”

어느새 이브의 등 뒤에 접근한 아스가 유리에게 손을 뻗었다. 이브의 시선이 유리와 아스의 사이에 날카롭게 꽂혔다.

“성녀부터 데려가야겠지.”

뒤에 접근한 아스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챈 로건과 유리가 화들짝 놀랐다.

“꺄악!”

“성녀님!”

아스에게 팔을 붙잡힌 유리는 그대로 속절없이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구할 새도 없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문양 위에 선 그는 다시 보호 마법을 걸었다.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간다는 듯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련의 모습을 본 이브는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넋 놓고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연인이 죽었다고 다 자포자기한 건가?”

“…….”

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눈썹 아래 붉은 눈동자는 조금 공허해 보였다.

“……이브 언니.”

유리의 검은 눈동자가 절망과 슬픔으로 물들었다.

역시 죽음까지 내몰았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걸까.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아리엘과 아스모데우스, 그리고 여러 악마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걸 통해 유리는 악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한지 깨달은 것과 동시에 모든 전말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법사만이 그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도.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며 견제하던 상대가, 유일한 구명줄이자 구세주였다.

‘……사실 언니가 날 구하러 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이브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목숨이 경각에 달한 모습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한 날 구하기 위해 사지로 달려들었다고?’

이브를 치료하던 내내 유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이브였다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는 게 당연해.’

지금 유리는 이브가 자신을 포기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이유도 자신을 구하느라 그랬던 것이니, 그녀가 살려 준 건 은혜조차 되지 않았다.

이브의 연인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은 이브에게 완전히 무가치해졌다.

이제까지 자신이 이브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버림받는 게 당연하다고 수긍했다.

유리는 완전히 기대를 버렸다.

“잘 생각했어. 원래 성녀랑 사이가 좋던 것도 아니잖아? 이참에 쌓아 왔던 앙갚음을 하는 것도 좋지.”

아스가 흡족한 눈웃음을 지었다.

“……벌써 달이 떴네.”

이브가 천장에 있는 작은 창문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월식의 시작이었다.

옆에 있던 로건이 당황하여 다그쳤다.

“뭐 합니까?! 이대로 다 죽자는 말입니까!”

이브는 그를 흘긋 보며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어차피 발레리안도 가망이 없는데, 비루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봤자 뭐 하죠?”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어리석은 짓을!”

무책임한 이브를 쏘아보며 로건이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이브는 거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눈만 깜빡이며 천장을 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달에 꽂혀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아주 현명한 생각이야.”

아스가 말갛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이번의 마법사는 인간과 같이 참 재밌는 구석이 있었다.

원래 인간은 주위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쉽게 전의를 잃곤 하였다.

그가 여러 번 전투하면서 느낀 감상이었다.

‘아아,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지.’

악마들은 동료의 죽음에 그리 목매달지 않는다.

날 적부터 각자도생에 길든 악마들에겐 감정적으로 휘둘릴 일이 없던 탓이다.

본질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

그런 악마들이 지하에 갇혀 있다는 게,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아스는 몇백 년 동안의 숙원을 풀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했다.

자아도취에 빠진 그는 제 손끝의 감각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알았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단다, 이 악마야.”

이브는 아스의 미소를 흉내 내듯 말갛게 눈웃음을 지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독을 품은 꽃처럼.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스가 으르렁거리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이브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로건은 위험하다며 소리쳤지만, 이브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유리 앞으로 다가간 이브는 유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느리게 눈을 끔뻑이곤 손을 내밀었다.

유리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어색하게 붙잡았다. 이브는 살짝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유리를 그녀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작은 행동이 유리에겐 구원, 그 자체였다.

그러는 동안, 아스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핏발이 선 시선으로 일련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보호 마법을 해독했다고?’

그 짧은 순간, 복잡한 술식이 얽힌 마법을 해독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왜 저러는 겁니까?”

이브의 곁에 온 로건이 물었다. 이브는 그의 물음에 감옥에서 아스와 격전을 치렀을 때를 떠올렸다.

정확한 시점은 바로 그가 그녀의 목을 졸랐을 때.

제 목을 조르는 그의 손으로 마력을 흘려 보내니 미세하게 그의 움직임이 둔감해졌었다.

그래서 유리를 붙잡은 즉시, 이브는 유리와 맞닿은 그의 손에 마력을 흘려 보냈다.

유리에게서 느껴지는 신성력과 마력에 구분이 가지 않도록.

‘그리고…….’

일부러 자포자기한 척, 유리를 놓아줌으로써 그가 방심하도록 유도했다.

그사이에 이브는 그 안에 걸린 보호 마법을 해독했다.

또한, 그의 안에 맴돌고 있던 그녀의 마력이 그의 체내에 속속히 박혀 들기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했다.

이브의 붉은빛 눈동자가 창살을 향했다. 태양이 저물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월식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의 발아래에 커다랗고 밝게 빛나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아스의 검은 마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서 이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무형의 벽에 막혀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흐트러졌다. 이브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소용없어.”

이브는 방금의 보호 마법을 응용해서 적용했다.

마법진 안에 선 유리는 이별을 직감하고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언니.”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

이브가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온하면서도 묘하게 힘이 없는 듯했다.

“나도 그럴 테니까.”

그리고 그 안에 다른 마법진도 하나 더 생겼다. 그건 아스의 발아래에 떠올랐다.

붉은빛이 일렁이는, 불길한 색을 띤 마법진을 보는 이브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서렸다.

심연보다 어둡고, 얼음보다 냉담한 조소였다.

월식이 시작되자 마법진이 동시에 발광했다.

* * *

보라색의 빛무리에 휩싸인 채 몸이 붕 떴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려앉은 유리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떴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여긴…….”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아주머니가 다그쳤다.

“유리야, 빨리 학교 가라니까-! 어머! 너 몸이 왜 그래?!”

“흐읍, 엄마아!”

엄마를 알아본 유리는 눈물을 와앙, 터트리며 엄마를 껴안았다.

그렇게 완전히 돌아왔다. 따스하고, 정겨운 집으로.

* * *

황금색 갑옷을 입은 제국군은 성국의 중심인 교황청을 둘러싸고 있었다.

혹여라도 안에 들어간 마법사와 엘라의 일행이 신호탄을 쏜다면, 즉시 진격하기 위함이었다.

‘신호탄은 없다.’

그렇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너무 상황이 처참해서, 신호탄을 피워 올릴 틈도 없는 것인가.

월식이 시작되자, 도열한 기사들은 긴장 어린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황태자, 자비에도 있었다.

주위 기사들과 관료들이 모두 황태자의 출정을 말렸다.

불시의 상황에 군대에게 명령을 내릴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결국 자비에는 성국행을 택했다.

어차피 차원의 문이 열려서 악마들이 소환되면, 아비규환이라 지휘는 무의미했다.

‘차라리 적진에 가서 싸우는 게 제국민을 위한 길이다.’

자비에는 그리 판단을 내렸다.

“……저기에 빛이 떠오릅니다!”

한 기사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비에의 시선이 빠르게 빛을 쫓았다.

‘마법이다.’

검을 들고 있는 자비에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기사들도 공포에 빠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비장한 얼굴로 전의를 다졌다. 제국군들 사이에 긴장의 끈이 팽팽히 당겨질 무렵.

“……전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비에와 기사들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황청 내부에서 달려 나온 로건 클라인이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환자가 있습니다!!”

자잘하게 타박상을 입은 듯한 로건 클라인의 행색도 영 좋아 보이진 않았다. 환자가 본인이라는 뜻인가?

‘혹시 악마의 양동작전?’

악마는 타인으로 위장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자비에가 얼굴을 굳히고 있을 때, 옆의 기사가 기함하는 얼굴로 손가락질했다.

“어어어어. 저, 저 사람은…….”

다른 기사들도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기사들의 반응에 자비에는 이상함을 느끼고 기사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로건 클라인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곤 체통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흐읍, 흐윽!! 누가 리안 좀 살려 주세요!”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눈물 바람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등에 발레리안을 업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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