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흐엉…… 흐읍, 일어나, 이브 언니!
아득한 정신 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이브의 머릿속에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이브는 무거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깜빡깜빡. 어슴푸레 초점이 잡히자, 검은 머리의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리?”
“흐읍…….”
유리는 정신을 차린 이브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이브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눈을 끔뻑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셨습니까?”
로건이 어물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이브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문득 강렬하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발레리안?”
발레리안이 없었다. 이브는 옆에 있던 로건과 유리에게 발레리안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그들의 표정에서 불길한 징조를 느꼈던 탓이다.
“잠깐만, 네가…… 어떻게 결계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이브는 유리가 제 앞에 있는 사실을 뒤늦게 지적했다.
“발레리안이…… 구해 줬어.”
설마, 아닐 거라 믿었던 사실이 기어코 유리의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녀가 언급해서는 안 될, 그 이름에 이브는 뻣뻣하게 굳었다.
“뭐?”
발레리안이 저 결계를 뚫고 유리를 구했단 말인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그가, 유리를?
“말도 안 돼…….”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런 재미없는 농담 하지 말라며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만약 그랬다간 온몸이 완전히…….
“잠깐만, 저 핏자국은 뭐야……?”
이브는 결계 주변에 흩뿌려진 혈흔을 보고 창백히 굳었다. 유리와 로건은 입을 다물었다.
“뭐야, 뭐냐고!”
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브가 다소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격했던 숨소리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발레리안이에요?”
로건을 붙잡고 묻는 그녀의 목소리엔 물기가 어렸다.
유리는 정신을 잃어서 상황을 모른다고 쳐도, 로건은 작은 부상을 입은 걸 제외하면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그러면 일련의 상황을 다 목격했을 터.
“……모르겠습니다.”
로건은 끝내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미 답을 얻은 이브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심장도 그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 없어…….”
이 상황이 그저 꿈같았다.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 아닐까?
‘……제대로 사과도 못 했는데, 진심을 전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고?
이브는 현실을 부정했다. 발레리안이 죽었을 리가 없었다.
넋을 잃은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발레리안이…… 주인공인데 죽을 리가 없잖아.”
그녀에게 발레리안의 존재란 그랬다. 소설 속 주인공이니까, 누군가에게 당해도 다시 금방 회복하고 일어서는 존재.
“……에스텔라 영애.”
이브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로건과 유리가 서로 시선만 교환했다.
“이브.”
주저앉은 채 멍하니 앞을 보던 이브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가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누군가 능숙히 받았다.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또 다정한 누군가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향기였다. 이브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발레리안…… 정말 너야?”
“이브는 또 깜빡했구나. 리안이라고 부르라니까.”
햇살처럼 온유한 음성, 부드러운 말투마저 발레리안, 그였다.
그를 등진 이브는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발레리안의 이목구비를 더듬으며 확인했다.
이게 허상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인하듯이.
정말 그가 맞았다. 루비색 눈동자에 눈물이 아롱지기 시작했다.
이브는 울먹거리며 대꾸했다.
“난…… 네가, 보호 마법 때문에 잘못된 줄 알았어.”
“하하,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발레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미소에 화답하며 마주 웃으려던 이브는 자꾸만 제 주위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겉도는 느낌이라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뭐지?’
그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웃어야 함이 마땅한데,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불안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이브는 곧 찾아냈다.
“발레리안…… 어디 아파?”
그의 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았다.
그녀는 혹시 몰라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손까지 차가웠다. 태양의 힘을 타고나서 다른 사람보다 몸이 따뜻한 그가…… 그녀보다 차갑다니.
“아니, 잠깐만, 밖에 좀 다녀올게.”
갑자기 자리를 피하려는 그의 행동거지가 더욱 이상했다.
이브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발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브는 월식 때까지 유리의 곁을 지켜. 나는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차원을 여는 일 자체가 달과 태양의 힘이 최대치인 월식에서만 가능했다.
별로 이상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뭔가, 뭔가 이상했다.
이브는 끈질기게 그를 붙들었다.
“차라리 같이 있는 편이 유리를 지키기 수월할 거야.”
이브가 그를 설득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발레리안-.”
“쿨럭.”
돌연 그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막고 기침했다. 이브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입을 막은 손 틈 사이로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왜 이러는 거야?”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진실만 말하는 대신, 너도 절대 진실만 말하기로 했잖아!”
답답해진 이브가 소리쳤다. 당황한 로건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소리치다간 악마들이 침입-.”
[이엘로.]
이브는 곧바로 출입구에 얼음 장벽을 만들었다. 그 벽은 웬만한 악마들도 뚫고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단단하고 두꺼웠다.
지금 악마의 침입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차례 숨을 몰아쉬던 발레리안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이브.”
“결계구나.”
이브는 그의 상태에 대한 원인을 금방 찾아냈다. 방금 결계 주변에 있던 흥건한 피.
이렇게 절실하게 그녀의 추측이 빗나가길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불행한 추측은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저 피가 발레리안의 것이란 사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결계를 깨면서 몸이 망가진 거야.”
이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게 많았다.
당장 실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느새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발레리안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조금만…… 쉬고 있을게. 미안해, 이브. 도움을 주지 못해서.”
“……그게 무슨 말이야.”
도움을 주지 못했다니. 이브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타박하려던 순간이었다.
발레리안의 눈이 스르륵, 점차 감기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브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 그는 명백히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리, 리안!”
“잠깐만…… 아주 잠깐만.”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눈을 감으면 괜찮아질 거야. 내 상태는 내가 더 잘 아니까…… 이브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발레리안! 정신 차려!”
이브는 발레리안이 제 코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평화로운 낯이지만, 그 모습을 보는 이브는 종말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흐윽, 발레리안…….”
옆에서 울먹거리는 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이브의 붉은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그래, 유리가 있었지!
원작의 여주인공이자 성녀.
그녀라면, 발레리안을 회복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가 릴리트에게 당했을 때, 그를 회복시켜 준 것이 그녀가 아니던가.
“유리, 제발 발레리안을 치료해 줘. 부탁할게.”
이브가 유리의 손을 잡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건 불가능해.”
유리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유리가 안절부절못하며 거절하자 이브는 초조해졌다.
“내가 원망스러워서 그래? 그렇다면 내가 다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할게……. 유리야. 응?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게!”
이브가 정말로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애원하자, 유리는 기겁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게 아니야! 언니…… 이브 언니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다, 다 내가 오해해서 시작된 일인걸.”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이브는 유리가 머뭇거리는 것이 이해가 안 되어 날카롭게 물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이럴 새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악마들이 침입하면……. 무력해진 발레리안이 제일 먼저 위험해질 터였다.
“사실, 이브 언니를 되살리느라 내 성력을 너무 많이 소진해 버렸어…….”
“……뭐라고?”
이브의 눈이 커졌다. 유리가 울먹인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로건이 상황을 설명했다.
이브가 대주교가 뿌린 독에 당한 뒤, 그녀를 살리기 위해 발레리안이 성녀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전투 불능이라는 걸 직감한 발레리안이 제 상태를 이브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 것까지.
이브는 로건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연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그가 그녀를 구하려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로건이 진실을 말한다는 걸 이성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브는 쉬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발레리안을 치료할 수 없다고?”
“흐윽, 미안해…… 언니.”
유리가 눈물범벅으로 사과했다.
“왜, 날 살린 거야? 넌 발레리안을 좋아했잖아! 그러면 리안부터 치료했었어야지…….”
유리를 다그치는 이브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한 가지 사실을 통렬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유리를 원망한다고 해서 발레리안이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 하지만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 흐윽.”
유리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방금, 이브가 깨어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엘라의 힘으로 깨어난 유리는 제 앞에 나타난 발레리안의 모습을 보며 환희를 느꼈다. 그러나 난장판이 된 상황을 뒤늦게 눈치채고 당황했다.
“제발, 이브를 살려 줘. 난 이브가 없으면 절대 살아갈 수 없어…….”
울컥 피를 토해 내는 와중에도 발레리안은 눈물을 흘리며 부탁했다. 심각한 건 그도 매한가지거늘. 그의 진심을 엿본 유리는 결국 이브를 살려 주었다.
이브는 발레리안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브는 이토록 무력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야. 이대로 포기하기엔 일러.’
이브는 그에게 접근했다.
그가 엘라의 힘으로 그녀를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차르륵.
일말의 희망을 부여잡고 그녀는 그에게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나 전혀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마력초와 같은 독으로 당한 게 아니라 마법에 의해 내상을 입은 게 원인이었기에.
“……이럴 수가.”
이브는 절망했다. 그녀가 차갑게 식은 제 이마를 짚으며 방법을 강구했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그 침통한 분위기를 깨트리며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통속극이네.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그랬어. 아리엘이 아주 큰 역할을 해 주었다니, 의외인걸?”
이브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감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