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대주교님!”
로건이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아리엘을 발견한 이브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아직 아리엘이 살아 계셨다니!
머리가 헝클어져 있지만, 다행히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왜 성녀와 대주교님을 한방에 가둔 거지?’
이브 일행을 본 아리엘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흐흑……. 이브, 발레리안, 우리를 구하러 와 주었구나. 정말 다행이야…….”
공포로 얼룩진 아리엘의 얼굴엔 안도와 희망이 퍼져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로건을 이브가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왜 그럽니까?”
로건은 도대체 왜 붙잡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브는 작게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
‘왜 이렇게 매듭이 헐겁지?’
이브는 성녀와 아리엘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에 의문이 생겼을 때부터 아리엘을 묶은 매듭이 생각보다 헐겁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곧 여러 의문점 중 가장 원론적인 의문점을 끌어냈다.
‘왜? 교황은 죽였으면서 아리엘은 살려 뒀을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루비색 눈동자를 보며 아리엘은 마른기침을 기운 없이 내뱉고는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의심스러운 거구나. 충분히 이해한단다.”
아리엘의 얼굴이 침통한 빛으로 물들었다.
“성녀님을 구하려다가 파렴치한 악마들에게 묶이고 말았어. 내가 잘 숨어 있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듣던 발레리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이미 자비에로부터 대주교 아리엘에 관해 당부의 말을 들은 상태였다.
“황궁에 왔던 대주교 아리엘도 분명 악마들과 연관이 있다.”
접견실에서 대주교 아리엘의 행동이 이상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자비에가 경고했다.
그럼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황제의 부름으로 황궁에 방문했던 대주교 아리엘이 단지 인두겁을 쓴 악마거나, 혹은…….
대주교 아리엘이 악마의 끄나풀이거나.
확실한 건 눈앞에 있는 대주교 아리엘은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발레리안은 먼저 한 발 성큼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당장 끄나풀인지 알아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기절시켜서 황궁에 데려가는 게 제일 안전했다.
“리안!”
아리엘에게 다가가려던 발레리안을, 이브가 불러 세웠다. 아리엘의 품에서 이상한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발레리안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마력의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발레리안의 발아래가 검은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발레리안!”
그녀의 부름에 그가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검은 그림자가 그의 발을 콱 붙잡았다.
그 앞에 있던 아리엘은 어느새 포박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실린더였다.
발레리안을 향해 정조준한 아리엘이 힘껏 팔을 움직여 안에 있던 액체를 흩뿌렸다.
아니, 뿌렸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뒤에 있던 이브가 그 움직임을 한 발 더 빠르게 목격하면서 그의 앞을 막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
이브는 제 몸에 뿌려진 투명한 물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향긋한 꽃내음이 나는 액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어리둥절함도 잠시. 이브는 급속도로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대로 휘청거렸다.
‘뭐야…….’
눈앞이 흐릿했다.
저번과 같이 마력을 억지로 밖으로 끄집어내듯 당겨지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마력이 파도처럼 휘몰아쳐서 추스를 수가 없었다면, 지금은 모든 마력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지금 이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브에게서 이상한 징후를 포착한 발레리안이 아래에 엉킨 검은 뱀들을 성검으로 죽인 뒤,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후후후……. 흐으, 엘라를 먼저 해치우고 마법사는 아스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일이 더 쉽게 풀리겠구나.”
그녀의 말에 발레리안의 눈빛에서 푸른 불꽃이 터졌다. 그는 곧장 아리엘의 팔을 부러뜨렸다.
“아아악……! 흐흐흐.”
팔이 부러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리엘은 웃음을 흘렸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이브는 상황을 인식하려고 해도, 모든 말소리가 뭉개져서 들려와 도무지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몸이 무저갱의 아래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휘청거리던 이브가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마에 사로잡혀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이브는 음습한 미소를 짓는 아리엘을 발견했다.
‘젠장…….’
뭐라고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은데 말할 기운도 없었다.
한편 실린더 안을 본 발레리안은 냄새를 맡았다. 묘하게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이건.’
아주 옛날, 그가 어릴 적.
마물의 숲에서 대악마와 격전을 치렀을 때 그가 당했던 독이었다.
히아신스같이 생긴 하얀 꽃, 바로 ‘마력초’에서 축출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력초.’
이 꽃의 독은 마력이 없는 일반인에겐 효력이 없지만, 마력을 가진 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엘라도 일종의 태양의 마력을 가진 존재인지라, 이 독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력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일반인과 달리 엘라는 마력이 없으면 태양이 없는 식물처럼 시들어 버렸다.
독에 당한 당시, 무력해진 그를 구해 준 건 아버지였다.
발레리안은 아버지에게 받은 엘라의 힘으로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예전에 얼핏 읽은 고서에서 마법사는 마력이 곧 생명이라고 읽은 적이 있-.
사고가 거기까지 이르자,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루, 루드비히 경. 에, 에스텔라 영애의…… 호흡이 이상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로건이 재빨리 이브의 상태를 확인한 후, 소리쳤다.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발레리안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아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졌다.
그의 몸이 태양 같은 광휘로 완전히 뒤덮였다.
그를 붙잡던 검은 그림자들이 파스슥 사라졌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빛은 곧장 아리엘에게 향했다.
“아아악!”
빛을 정통으로 맞은 아리엘은 온몸이 타는 열기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방금 팔의 뼈가 부러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손끝부터 점차 녹아내리고 있는 공포스러운 광경에 아리엘은 몸을 덜덜 떨며 호소했다.
“바, 발레리안! 이건 다 성국을 위한 일이었단다……! 너, 너만은 나를, 이해해 줘야 하지 않겠니?”
아리엘은 간절한 표정으로 발레리안을 쳐다보았다.
“그게, 성국을 위한 길이라면.”
주변의 뜨거운 열기와 달리 아리엘을 보는 푸른 눈동자는 서릿발보다 차가웠다.
“성국은 없어지는 게 맞습니다.”
“아아아악! 시, 신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리엘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점점 녹아내리는 아리엘을 내려다보는 발레리안의 얼굴은 백지 같이 무감했다.
그러나 푸른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분노가 용솟음치는 그의 눈빛은 용암보다 더 뜨겁게 이글거렸다. 이대로 엘라의 힘으로 그녀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성검을 발검하여 그녀의 앞에 선 발레리안은 가차 없이 그녀의 목을 베었다. 아리엘은 그대로 쓰러졌다.
성검에 죽은 사제.
세상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보던 로건은 뒤늦게 이브 에스텔라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걸 깨닫고 다급히 외쳤다.
“숨을 쉬십시오! 영애!”
발레리안은 곧장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브.”
그녀의 얼굴을 만진 발레리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인간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가웠다.
감옥에서 그녀를 구출할 때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눈을 감은 이브는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숨결이 미약해지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직감했다.
이대로 이브를 놔두면 죽는다는 것을.
그는 황급히 이브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엘라의 힘을 쏟아부었다.
노랗고 불그스름한 빛무리가 이브의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굳게 닫힌 그녀의 눈꺼풀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체온도 돌아오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를 회복시킬 때와 달리, 엘라의 힘이 스며드는 게 아니라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 안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면서 생명력까지 잃었다는 것을.
태양의 힘은 마력을 채울 수는 있어도 훼손된 생명력을 복구하는 힘은 없었다.
“경……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로건은 가망이 없다는 듯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발레리안도 이 이상 엘라의 힘을 불어 넣는 게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이브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발레리안의 모습은 비참해 보였다.
무력하게 연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로건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일단 성녀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
로건의 말에 발레리안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엔 기이한 광채가 흘렀다.
발레리안은 쓰러진 유리를 쳐다보았다.
성력이 가장 많은 유리라면 이브를 살려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사로잡힌 그가 일어나 유리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루드비히 경! 여기엔 보호 결계가 걸려 있다고 아까 영애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턱대고 접근하는 건 위험합니다!”
로건은 유리에게 다가가려는 발레리안을 만류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거침없이 유리에게 다가갔다.
“…….”
그의 말대로 유리에게 다가갈수록 기분 나쁜 무형의 기운이 느껴졌다.
기분이 더러울 만치 음습하고 어두운 마력이었다.
진득하게 엉겨 붙은 마력에 발레리안은 제 안에 있던 태양의 힘을 방출했다.
하지만 이만한 힘으로는 마법이 깨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이브의 숨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어 태양처럼 따뜻하고 강렬한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