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녀에게 한눈이 팔린 아바론은 그대로 무력하게 발레리안의 손에 처단당했다.
기세등등했던 첫 등장과 달리 허무한 결말이었다.
‘마검이 있다면 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모양이지.’
그래서 그렇게 그녀의 마법에 당황했던 것이리라. 한편으론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 올 때까지 발레리안의 도움 없이 악마들을 죽일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맞닥뜨렸던 악마도 대부분이 상급 악마였다. 하지만 아바론은 달랐다.
자칭 대악마의 정예단이라는 소개가 무색하지 않게 그녀 혼자의 힘으로 죽이는 건 쉽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감옥에서 만났던 악마를 떠올렸다.
‘그 감옥에서 만났던 악마는 대체 정체가 뭘까.’
소년의 낯을 하고 있던 악마.
마법사에게 짙은 악의를 품고 있던 악마.
만약 그녀가 마력으로 악마의 마력을 얼려 놓지 않았다면, 그리고 급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발레리안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설마…….’
이 소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악마가 아닐까?
그러면 그 소년이 대악마?
“그럴 리가…….”
이브는 터무니없는 추측이라 치부하려다가 멈칫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해가 지고 있어.’
창밖을 본 이브와 일행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교리실에 들어간 그들은 각자 지하로 연결된 길이 없는지 수색했다.
문득 조각상을 발견한 이브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본 적이 있어.’
바로 환상 마법에서 보았던 그때와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조각상을 옆으로 밀었다.
-쿠궁.
밀린 조각상 아래엔 레버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 레버를 있는 힘껏 끌어 내렸다.
-쾅!
그러자 숨어 있던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통하는 길을 보던 기사들이 이걸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워했다.
그 일련의 모습을 굳은 시선으로 보던 발레리안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유리를 데리고 나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기사들이랑 기다리고 있어.”
그의 말에 이브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태까지 동행에 반대하지 않았던 발레리안이 돌연 홀로 내려가겠다니. 뭔가 이상했다.
기사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의문스럽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발레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지하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이브는 곧장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나도 같이 가. 혼자는 위험해.”
“……이브, 비켜 줘.”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발레리안의 눈빛에선 철옹성 같은 고집이 엿보였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어떤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브는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방금도 엘라의 힘을 쓰면서 힘들어했으면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아 온 이브는 알아차렸다. 그의 몸에 이상 징조가 생겼다는 것을.
자꾸만 혼자서 위험을 감내하려는 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참다못한 이브는 결국 속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쏟아 내고 말았다.
“지금 네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거 나도 알아. 그 몸으로 갔다간 무력하게 당할 텐데, 그걸 알면서 내가 널 혼자 보낼 거라고 생각한 거야?”
말을 이어 갈수록 이브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히 그가 그녀의 마력을 받아 내면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가 엘라의 힘을 사용하는 걸 볼 때마다 불안해서 그가 힘을 사용하기 전에 불쑥 마법을 쓴 것도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 이브는 가슴에 돌이라도 박힌 듯 콱 막힌 기분이 들었다.
만일 그가 자신이 다치지 않게 엘라의 힘을 더욱 사용하는 거라면…….
그 생각을 할수록 이브는 가슴에 박힌 돌멩이의 표면에 가시라도 돋은 느낌이었다.
애초에 그가 이런 상태가 된 것이 그녀와 관련 있는 게 아니던가.
“……날 걸림돌 취급을 하지 말아 줘, 리안.”
아무리 악마가 자초한 일이더라도 그녀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애써 무시하던 불안감이 비쭉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유리를 찾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보내는 게 안전하잖아. 여기까지 데리고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거야.”
루비색 눈동자에 굳은 각오가 서렸다.
이브는 그가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할 때까지, 끝까지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발레리안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나한테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
드디어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이브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은 행여 목이라도 다칠까 싶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한 뒤, 나머지 일행을 향해 말했다.
“그럼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밖으로 신호탄을 피워서 제국군에게 진격 신호를 보낼 사람이 남아 있어야만 했다.
“예.”
“넵.”
기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로건 클라인, 그였다.
그가 뻣뻣한 태도로 따라가겠다고 나서자 이브는 지하 통로를 흘긋 보며 대꾸했다.
“이후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요.”
“기사란 본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치곤 도움 요청을 잘만 하시던데…….”
“큼큼.”
그녀의 돌직구에 로건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세요.”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로건이 동행을 하겠다고 말한 의도는 빤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거겠지.’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한 그는 마법사를 엘라와 단둘이만 보내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것이다.
참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차라리 나한테는 잘된 일이야.’
안에서 유리를 발견한다면, 그녀의 무고를 증명해 줄 제삼의 증인이 나타나는 셈이니 말이다.
다행히 발레리안도 로건의 동행을 말리지 않았다. 이브는 그 이야기를 무감한 시선으로 흘려듣는 발레리안을 보며 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건의 목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얼굴인데.’
조금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렴 어떤가 싶어서 그녀는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달이 뜨기 전에, 이 모든 상황을 일단락시켜 놓아야만 했다.
계단을 내려온 이브는 지하의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익숙한 곳이야.’
환상 마법에서 보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호텔처럼 긴 복도에 방들이 마주한 구조였다.
하지만 호텔이라고 하기엔 그녀가 갇혔던 마법사의 감옥보다 환경이 더 열악하고 낡아 있었다.
“윽…….”
심지어 어디서 역한 냄새까지 풍겼다.
이브와 로건은 나란히 코를 틀어막았다. 옆에 있던 발레리안이 중얼거렸다.
“시체 썩는 내야.”
“……!”
이브와 로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럼 여기에 사람이 죽어 있다는 건가?
‘하지만 제물 의식은 성녀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걸까. 이브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다스리며 발을 디뎠다.
하지만 앞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악취는 더 짙어졌다.
수분을 통해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방을 지나치던 중, 주위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살피던 로건이 작게 입을 열었다.
“잠깐…….”
“……?”
“이 문틈으로 뭐가 보입니다.”
그의 말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조금 낯선 옷들이 있었다. 그 옷은 위아래 한 벌의 사제복이었다.
하지만 사제복이라고 하기엔…….
‘완전히 피범벅이잖아.’
대체 누구의 옷인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옷에 선혈이 낭자했다.
자세히 사제복을 들여다보니 금실로 놓은 자수가 정밀하고 섬세했다.
아까 아바론이 입었던 고위 사제복보다 더욱.
그 옷이 누구의 것인지 단박에 알아본 로건과 발레리안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특히 로건의 얼굴은 충격으로 완전히 굳어 버렸다.
“누구 옷인데?”
이브가 묻자, 발레리안이 대답했다.
“……교황의 옷이야.”
“뭐라고?”
이브는 흠칫 놀랐다. 그런데 왜 교황의 옷이 이렇게 피범벅이 된 채 여기에 있단 말인가.
‘잠깐만.’
지금 교황은 요양 중인지라 외부인 접견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을 떠올린 이브는 한 가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도출했다.
‘만약 교황이 악마의 끄나풀이 아니라면.’
교황 세르잔은 죽었을 터.
“……그렇다면 아리엘 대주교님은 어떻게 된 걸까.”
이브는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소꿉친구이자, 어릴 때부터 친근하게 보아 왔던 아리엘 대주교.
그녀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브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빨리 성녀를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로건이 입을 열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이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했던 그였기에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긴 이런 꼴을 보고서 믿지 않으면 고집불통이 아니라 바보지.’
그들은 방을 빠져나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점점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
이브가 중얼거렸다. 로건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사람의 온기가 곧 성녀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야.”
이브가 한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악마는 없어.”
어느새 엘라의 힘을 사용하여 악마들의 존재를 파악한 발레리안이 먼저 방문을 열었다.
이브는 방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유리.”
유리는 100년 전, 김영희가 그랬던 것처럼 붉은 문양 위에 누워 있었다.
그때와 같이 유리도 정신을 잃은 채 옅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로건이 성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이브가 입을 열었다.
“가까이 가면 위험해요. 저 문양에 이상한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100년 전 마법사들이 그 문양을 발견하자마자, 먼저 문양에 걸린 마법을 풀어냈던 걸 떠올렸다.
일종의 보호 결계였다.
그러나 보호라고 하기엔 마법의 의도는 성녀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거였지만.
“주위에 결계가 있어서 닿는 즉시 폭발할 거예요.”
“뭐, 뭡니까. 이 무식한 함정은.”
로건의 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이브는 환상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영창했다. 하지만 보호 마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술식이 묘하게 달라.’
이브는 악마들이 100년 전과 다른 마법으로 성녀를 가두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빠르게 마법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환상 마법을 겪은 이후, 그녀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마치 리아 루시엘라의 기억을 물려받은 것처럼 마법적 지식이 풍부해진 것이다.
이론적인 지식이 머리에 담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해 몸에 익은 지식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부분을 해독할 수 있다면.’
결계를 바라보는 이브의 루비색 눈동자가 신비로운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으으…… 이 목소리는…… 이브니?”
누군가 이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브는 흠칫했다.
그녀가 바짝 경계하며 고개를 돌리자, 외벽에 아리엘이 밧줄로 묶인 채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