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사제의 탈을 쓴 악마들이 그들을 뭉근히 훑어보았다.
엘라와 마법사 일행이 여기로 곧장 온 것이 이상했는지 악마들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법사랑 엘라, 각각 하나씩 맡아.”
순식간에 악마들의 손이 마치 날붙이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빠르게 이브와 발레리안 쪽으로 도약했다. 이제껏 만났던 악마들보다 빠른 움직임에 다들 바짝 긴장했다.
악마들이 지척까지 도래하는 것을 본 발레리안은 즉각 성검을 뽑아 들었으며, 이브는 몸에 있는 마력을 끌어 올리며 영창했다.
[이엘로!]
이브는 한 손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몽둥이를 들고 악마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검도 아니고 그 이상한 무기는 뭡니까?!”
전투를 치르던 로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의 1m는 되어 보이는 얼음 몽둥이는 그녀의 몸보다 두께도 두꺼웠다.
“제가 검은 다룰 줄 몰라서요.”
그녀는 무심히 대꾸하며 달려드는 악마를 몽둥이로 후려쳤다.
퍽!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악마가 꿈틀거렸다.
“크아아악!”
그녀에게 맞아서 몸이 박살 난 악마는 그대로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생긴 건 단순한 얼음 몽둥이지만 마력으로 만들어진 탓이다.
그녀를 에워싸던 악마들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흠칫하며 물러났다.
“이쪽도 좀 도와주십쇼!”
악마와 대치하고 있던 로건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브는 못 들은 척하려다가 로건과 맞서는 악마를 몽둥이로 후려쳤다.
-퍽!!
눈앞에서 보니 무지막지하면서 살벌한 힘이었다.
이브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로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칫 말 한마디라도 잘못해서 저 몽둥이에 맞으면 그대로 세상을 하직할 것 같았다.
이브는 왠지 힘자랑을 한 것 같아서 머쓱했지만, 고개를 돌린 후 겸손해졌다.
성검으로 악마들의 목을 베는 발레리안의 몸놀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유려했다. 악마를 많이 죽여 본 능숙함이 엿보였다.
기사들은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발레리안의 뒤를 따라서 걷는 수준이었다.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쓸려고 하면 이미 악마는 발레리안의 손에 단말마의 비명도 못 지르고 저승에 간 상태였다.
지금의 그는 악마를 밀어 버리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이거 그냥…… 리안이 혼자 와도 끝나는 일이었던 거 아닐까.’
왜 그가 단둘이 와도 충분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그가 엘라의 힘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건만.
이브는 민망하면서도 저렇게 힘을 사용하는 리안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점차 교리실에 가까워질수록 모두 비장하고 진지한 낯빛이 되었다. 몇몇은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기사가 교리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히려 중간에 낙오되어 혼자 남겨지는 것이 더 위험했던 탓이다.
‘포털이 열리는 순간, 다 죽음이니까.’
무거운 사명도 한몫할 게 분명했다.
“잠깐.”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교리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그가 느리게 말을 이어 갔다.
“……악마의 기운이 끔찍할 정도로 강해. 이제껏 상대한 악마들과는 차원이 달라.”
그가 뒤를 돌았다. 그러곤 로건과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나와 이브를 제외한 사람들은 한 몸이 된다고 생각하며 싸워야만 해.”
다시 교리실에 시선을 둔 발레리안이 서늘히 덧붙였다.
“그래야만 죽는 걸 피할 수 있다.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고.”
“……이럴 수가.”
기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브의 곁으로 다가간 발레리안은 걱정이 짙게 묻어나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전투에서 이브를 배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위험한 곳에 그녀를 데려가야만 한다니, 현실에 부딪힌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내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 절대로!”
이브가 이곳에 오기 전, 성녀를 본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는 건 마법사가 유일하다고 단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떼어 놓고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이브를 성녀가 있는 곳까지 최대한 다치지 않게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그녀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응.”
이브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도 그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행여 리안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가 주변에서 그를 보호해 줘야만 했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방식을 시도해 볼까.’
이브는 발레리안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재빨리 교리실 안의 수분 흐름을 읽고 입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다들 피해!”
갑자기 소리친 발레리안이 빠르게 이브를 품에 안고 교리실 앞에서 멀어지기 위해 달음박질했다.
-쾅!!
그와 그녀가 동시에 바닥 위로 쓰러진 순간, 교리실 앞에 있던 벽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부서졌다. 잔해 속에서 악마들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평사제복을 입고 있던 악마들과 달리, 이들은 고위 사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이곳에 숨어서 몰래 마법을 쓰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한 악마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몸을 일으킨 이브와 발레리안은 얼굴을 굳혔다. 고위 사제인 미겔이었다.
그는 아리엘 대주교의 최측근 인물로 그녀가 하는 일을 밀착 보좌하는 사제이기도 했다.
미겔의 탈을 쓴 악마가 마법사와 엘라 일행을 훑어보며 입술을 핥았다.
“쥐새끼도 아니고.”
이브는 입술을 굳혔다. 미겔은 어떻게 한 거지?
교리실에 오기 전, 사제들이 묶여 있던 곳에 미겔은 없었다.
‘설마, 미겔도 죽인 건가?’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지워 낸 이브는 발레리안을 붙잡고 속삭였다.
“내 마력을 느낀 걸 보아선 평범한 악마는 아닌 것 같아.”
“오? 잘 알아봤네.”
악마가 한 발자국 다가오며 씨익 웃었다.
“나는 대악마 아스모데우스 님을 섬기는 최정예 악마 아바돈이지.”
굉장히 으스대는 걸 좋아하는 악마였다. 그러나 단순한 객기라고 취급하기엔 그가 한 말의 내용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대악마라니…….’
기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책으로만 봤던 대악마가 실존한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발레리안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
그가 아주 어릴 때, 태양의 힘을 다루기 위해 마물의 숲으로 훈련을 나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대악마를 만났는데, 그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절명했다고 들었다.
‘만약 저 말이 진실이라면.’
성녀가 이 안에 있다는 증거였다.
저 악마의 말대로 대악마의 측근인 자가 이 안을 지킬 이유는, 이 안에 필시 중요한 게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바돈의 옆에 있던 악마가 말했다.
“아바돈 님, 아스모데우스 님께서 사적 대화는 금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랬었지.”
아바돈은 실수했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아스모데우스 님의 주의를 잊을 뻔했네. 혀를 차며 중얼거리던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너 따위가 나한테 건방지게 지적한 건가?”
“그게 아닙-.”
퍽!
변명하던 악마의 머리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렇게 한 악마가 부지불식간에 제거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주위가 얼어붙었다.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브의 붉은 눈동자는 일순 이채를 띠었다.
‘지금, 급습하자.’
이렇게 잠시 한눈팔고 있을 때 공격하는 게 상책이다.
비겁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전투에서 정정당당함을 찾는 건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이엘…….]
그녀가 입을 달싹거릴 때였다.
“……!”
순식간에 그녀 앞으로 다가온 아바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웃었다. 그의 손엔 흑색의 검이 들려 있었다. 날까지 검은색인 특이한 검이었다.
“이런 편법은 우리 사이에서도 유행이 지났는데?”
살기를 느낀 이브는 반사적으로 영창을 이었다.
[이엘로!]
투명하면서 커다란 얼음벽이 그녀 앞에 곧장 세워졌다.
-쾅!
얼음벽과 검이 마찰하면서 발생한 소음은 검과 얼음이 부딪친 게 아니라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을 뿜어냈다.
가까스로 얼음벽을 만들어 검을 막아 낸 이브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한 끗 차이였다.
아주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검에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과연 다음 공격도 막아 낼 수 있을까?”
채 안심하기도 전에 아바돈이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무슨 움직임이 이렇게 빨라……!’
그래도 여태까지 만났던 악마들의 움직임은 읽을 수 있었지만, 방금의 호기가 허세가 아니라는 듯 아바돈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주문을 외우기 위해 그녀가 입을 달싹일 시간도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검날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하얀 검날과 검은 검날이 교차하며 날카롭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
아바돈과 성검으로 마주한 발레리안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바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아, 이 검은 성검에 부서지지 않아.”
발레리안이 든 성검이 노랗고 불그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그가 엘라의 힘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흑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열에도 강하지.”
아바돈이 씨익 웃었다. 격전을 보던 기사들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엘라의 힘이 통하지 않는 검이라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이브는 번뜩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저 검에 관해 알고 있어.’
원작에서 발레리안이 유리를 납치한 악마와 격전을 벌일 당시 죽음을 앞둔 악마가 원통하다는 듯 말했다.
“내게 마검만 있었더라면! 엘라 따위는 묵사발을 냈을 텐데…….”
마검.
태양과 빛의 힘을 토대로 하는 성검과 달리 마검은 어둠의 힘을 가졌다. 오로지 성검과 엘라에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
‘그렇다면.’
반대로 차가운 것엔 약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밑져야 본전이야.’
그녀는 곧바로 마검 주위에 있던 수분을 검에 달라붙게 하여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
본능적으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바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할 때였다. 발레리안이 재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우아한 잔상을 그리며 하얗게 빛나는 성검과 마검이 부딪쳤다.
-챙!
마검이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법이 통한다는 걸 깨달은 이브는 마검의 균열을 노려보며 집중했다.
‘조금 더 차갑게……조금만 더.’
수분이 급속으로 냉각되었다. 그녀가 하려던 행동을 눈치챈 아바론이 당황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이미 발레리안의 성검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아바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 * *
“이런, 포기하시지요.”
바르작거리는 유리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아리엘의 입가에 평소와 같은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무의미한 저항은 힘만 뺄 뿐이니까요.”
“쿨럭,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유리는 도무지 대주교가 하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흐린 눈으로 미소를 짓는 아리엘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엘은 투정을 부리는 철부지를 상대한다는 듯, 시혜적인 어투로 말했다.
“다 성국을 위한 고고한 희생이랍니다, 성녀님.”
그때 문득 달칵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레버를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