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91화 (91/100)

91화

“그럴 리가……. 지금은 오후 기도 시간인데.”

발레리안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전 기도 시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오후 기도 시간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삶의 소중함에 관해 신에게 감사를 올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야. 공기 중에 느껴지는 수분이, 너무 차가워.”

“……차갑다고?”

“응.”

그 말에 발레리안이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얼굴을 굳혔다.

“잠깐만.”

이번엔 그가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그녀는 주위의 공기가 따뜻해지자, 그가 엘라의 힘을 방출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 인간은 없어.”

‘인간은?’

말의 뉘앙스가 뭔가 이상했다. 이브가 의문을 미처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악마만 득실거려.”

“……그게 무슨.”

발레리안의 말을 들은 기사들의 혈색이 파리해졌다.

“……몇이나 되는데?”

이브의 물음에 발레리안은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좁혔다.

“적어도…… 열은 넘어.”

기도실 안에 이렇게 많은 악마가 안에 있다는 건, 지금으로선 하나의 이유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브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안에 지킬 거라도 있는 모양이야.”

아마 그 지킬 사람은 성녀, 이유리일 터.

일면 그녀도 악마들이 성녀를 제물로 쓴다는 걸 믿지 못했다.

‘원작에는 없던 내용이니까!’

그러나 감옥에 있던 환상 마법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법사의 주장에 신빙성이 짙어진 상황이 벌어지자 로건을 비롯한 기사들은 일제히 마른침을 삼켰다.

“리안…… 괜찮아?”

미묘하게 창백한 그의 혈색을 본 이브는 황급히 발레리안의 손을 잡았다.

손이 너무 차가웠다.

태양의 힘을 타고나서 본래 평범한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그가 이토록 몸이 차갑다니. 이브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

“난 괜찮아. 조금 긴장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것뿐이야?”

이브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런 대치 상황을 숱하게 겪어 왔을 그가 새삼스럽게 온몸이 차가워질 정도로 긴장한다고?

‘설마 내 마력을 받아 낼 때 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이브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곤 수렁에 빠진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묻더라도 그는 끝내 괜찮다고 말할 게 분명했다.

‘……이대로 전투를 치르게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아니요.’였다. 하지만 발레리안이 없다면 전력에 큰 손실이 일어날 터.

제국의 명운보다는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신중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발레리안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어차피 그녀가 그에게 전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라고 해도, 외려 한 발자국 앞설 사람이 그였다.

은근히 고집이 강하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이브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차라리 리안이 최대한 엘라의 힘을 사용하지 않게 만드는 거야.’

그녀는 빠르게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이브-.”

그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가 빠르게 입으로 주문을 외었다.

[이엘로.]

차르륵.

공기 중 수분이 얼어붙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쇄도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으아악!”

“마법사다!!”

악마들의 비명이 기도실 안에서 들렸다. 도저히 사람의 비명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짐승같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단박에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

마법사가 이상한 언어로 중얼거린 직후, 갑자기 안에서 흉측한 비명이 들렸다.

정황상 마법사가 한 일이라 직감한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브.”

그녀가 갑자기 돌발적으로 행동한 이유를 깨달은 발레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갑자기 악마들이 왜 비명을 지른담?”

이브는 모른 척 외면하며 문을 슬쩍 열었다. 문틈 안에는 악마들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럴 수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기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가히 경이롭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악마 토벌에 주로 파견을 나가는 기사들은 이렇게 손쉽게 악마들을 처단한 힘에 압도당해 헤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브를 보면서 발레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는 뜨끔했지만, 끝내 모른 척했다.

“이제…….”

다음 난관에 봉착했다.

“악마들이라면 제물을 어디에 숨겨 둘까.”

그게 가장 핵심 문제이자, 어려운 문제였다.

당연하게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일 터. 그러나 그러한 공간은 발레리안조차 알지 못했다.

“……발레리안!”

또, 눈을 감으며 엘라의 힘을 사용하려는 발레리안을 발견한 이브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집중이 흐트러진 그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눈을 떴다.

“……여기서 미리 힘을 뺄 필요 없잖아. 그러다간 결정적일 때 힘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이브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거니와 이로써 그가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었으면 했다.

“일단 여기에 숨겨진 통로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자.”

이브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기사들도 함께 기도실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브도 그 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럼 여기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

-삐이.

갑자기 머릿속에 이명이 울리더니 주위 소음이 아득하게 들렸다.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이브는 급격하게 몰려오는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기야!’

‘김영희가 여기 있어!’

억지로 주입되는 듯한 누군가의 기억 편린이었다.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이브는 괜찮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방금의 환청과 기억을 더듬으며 입술을 딸싹였다.

“성녀는…… 교리실 지하에 있어.”

“……교리실에는 지하가 없는데, 숨겨져 있었나.”

발레리안이 중얼거렸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로건이 질문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대대로 제물 의식이 열리는 공간이 있어요. 그 공간을 제가 방금 마법으로 알아냈어요.”

사실 자신의 마법으로 알아낸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이유를 둘러댔다.

뭐든지 마법으로 해결했다고 하면, 저쪽에서 무어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예상했듯 로건과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발레리안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교리실로 간다.”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기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도실과 교리실은 거리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약 교리실에 성녀가 있다면, 그 주변엔 기도실보다 훨씬 많은 악마가 존재할 거란 얘기와도 같았으니.

각자 각오를 다진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기도실에서 나와 은밀히 교리실로 가는 길.

이상하게도 복도를 걷는 내내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한 교황청은 낯설면서도 생경하며…… 불길했다.

“…….”

다들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주변에 악마들이 잠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괜히 소리로 관심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잠깐. 어디서 이상한 소리 안 들립니까?”

로건이 멈칫하며 귀를 기울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서쪽에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울음소리네요.”

같은 소리를 들은 이브가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의 울음소리보다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혹시 우리의 경계를 분산시키기 위한 악마들의 연막인가?

이브는 재빨리 눈을 감고 주변 수분들의 온도에 집중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 갔다.

“……서쪽에 인간들이 있어. 그것도 수십 명…….”

“교리실로 가는 길이군요.”

로건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발레리안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가 말한 쪽을 보았다.

“진짜 사제들은 다 묶어 놓은 모양이군.”

그들은 빠르게 교리실 쪽으로 향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렸다. 로건이 굳은 얼굴로 문을 슬쩍 열었다가 닫았다.

“진짜로…… 사제들이 있습니다. 모두 밧줄에 묶여 있습니다.”

로건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는지 악마들의 속셈을 모르겠습니다.”

그 답은 이브의 입에서 나왔다.

“악마들의 원기 회복에 좋은 게 성력이거든요.”

“무슨……! 보양식이란 말입니까?”

로건이 경악했다. 인간을 보양식처럼 두었다가 잡아먹는다니.

토기가 절로 치밀었다.

“지금 구하면 악마들의 이목이 몰릴 거야.”

이브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일단 성녀를 구하고, 이들을 구하는 게 순서였다. 그리고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다니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었다.

묶인 사제들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을 때였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몇몇 기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사제, 아니 사제로 위장한 악마들을 본 이브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