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녀의 회복을 이유로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한 상태였다.
그러한 휴식을 가지게 된 건 루드비히 공작과 발레리안의 강경한 주장에 의한 것이었다.
‘해가 저물면 엘라의 힘도 약화된다고 했지.’
이브와 발레리안, 그리고 로건 클라인과 기사들 소수가 황궁의 정문으로 향했다.
“이브, 조심히 다녀와야 한단다.”
“이브, 무슨 일이 있으면 발레리안만 구하고 냅다 도망치거라!”
“……우욱, 너한테 음식 냄새 오진다.”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노아가 나와 한마디씩 하며 이브를 배웅했다.
어머니의 말만 새겨들은 이브는 마찻길에 올랐다. 마차 옆에 나란히 붙은 로건 클라인이 창문을 두들겼다.
“그 소환 의식이 사실이라면 성국에 정말 성녀가 있는 겁니까?”
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국에 있는 게 가장 위장하기 쉬우니까 거기 있을 거예요.”
이브는 환상 마법을 통해서 보았던 100년 전의 과거를 떠올렸다.
거기에 있던 전대 성녀, 김영희도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피로 그려진 문양 위에 누워 있었다.
“그렇다면 성녀님은 살아 계십니까?”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그럴 거예요.”
“…….”
로건은 영 믿음이 안 간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그녀가 그러한 대답을 내놓은 것에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본래 열악한 상황에 놓인 보통의 사람이라면 탈출을 꾀하기 마련이다.
성녀가 필요한 악마들이라면 성녀의 탈출 시도를 석연치 않게 생각할 터.
그들에겐 성녀의 목숨을 끊어 놓는 편이 제물을 보존하기 편할 것이다.
‘하지만 김영희는 숨을 쉬고 있었어.’
숨이 붙어 있었다. 그건 단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제물로 쓰기 전에 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유리의 생사도 희망적이란 얘기였다. 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발레리안은 묘한 눈길로 보았다. 유리를 구하러 가는 이브의 얼굴에는 사감이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성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으레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른 성녀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 없을 터였다.
오히려 성녀가 잘못되거나 죽었다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발레리안조차도 성녀가 제물로 쓰인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유리의 생사 따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이브의 평화와 안전뿐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을 모르는 이브는 오래전부터 발레리안, 그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저 도덕심과 사명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의로운 기사라고.
‘설마…… 그래서.’
발레리안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가 그에게서 도망친 이유가, 그러한 착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런 착각을 알면서도 모른 척 묵과했던 행위가 스스로 덫을 설치한 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발레리안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브.”
“응?”
“나는 이브의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야.”
느닷없는 그의 고백에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고해성사인가?
‘고해성사는 내가 리안한테 해야 하는데……?’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뜨뜻미지근한 그녀의 반응에 발레리안이 굳은 얼굴로 반박했다.
“난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어. 이브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던 거지.”
워낙 반박하고자 하는 의지가 맹렬하게 느껴졌던 나머지,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웬 이기심 타령이람.
그리고 그가 이기적이라는 말도 당최 수긍이 안 되었다.
“……이기적인 사람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이브는 조심스레 오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본인밖에 모르는, 후안무치를 뜻하는 거잖아.”
음, 제대로 알고 있군.
‘그럼 이기적인 건 내 쪽이 아닌가 싶은데…….’
혹시 발레리안이 돌려서 그녀를 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그런 성향은 아니란 걸 알기에 이브는 그 가능성을 금방 지워 냈다.
‘그러면 대체 왜 저런 말을 꺼내는 거지?’
반면, 그 말을 하는 발레리안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비장해 보였다.
왜 그렇게 본인의 이기심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걸까.
도통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 * *
맑은 하늘, 태양이 눈부시게 지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아래 고결하리만치 새하얀 첨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정한 신의 피조물이라 불리는 교황청.
저곳에서 성녀를 이용해 제물 의식을 펼칠 거라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교황청과 제물 의식이라니, 극단적인 괴리감을 느낀 이브는 침을 삼켰다.
“……도착했습니다.”
옆에서 같이 말을 몰면서 따라붙던 로건 클라인이 마차의 문을 두들겼다.
마차 문을 열고 나오자, 로건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이곳에서 제물 의식이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까?”
“아마도요.”
“아마도는 무슨……!”
“여기서 제가 직접 제물 의식을 본 게 아닌데 어떻게 확언을 하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성녀의 생사를 묻지 않나, 직접 보지 않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고 있었다.
“만약 봤다면 진작에 제가 성녀를 구했을 거예요.”
“…….”
그것도 맞는 얘기라 로건은 조개처럼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성국에 성녀가 있는지 없는지를 왈가왈부하는 행위 자체가 시간 낭비이거늘.
‘어차피 자비에가 다른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기사들을 풀어놓았겠지.’
아마 제국 전역엔 자비에의 명으로 성녀를 찾는 기사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터였다. 로건 클라인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여기서 굳이 성녀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하냐고 묻는 저의는 하나였다.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의심하는 것.
아마 원작의 인물 중에 기존 설정에서 가장 벗어나지 않은 인물을 뽑으라면 그녀는 단연코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꼽을 수 있을 듯했다.
“이브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단박에 로건 클라인의 말뜻을 알아차린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이곳에 성녀가 갇혀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면 어떻게 할 거지?”
로건 클라인은 욱한 얼굴로 딱딱히 말했다.
“그러면 사과드리지요.”
“근거 없이 누구를 멸시하고 모독했는데, 단순한 사과로 끝내진 않을 테고.”
발레리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이 팔이라도 내놓을 건가?”
“……리안.”
이브가 놀라서 발레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사한테 팔을 내놓으라는 건 기사직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발레리안은 로건 클라인의 어깨를 툭 밀치며 뇌까렸다.
“왜 대답이 없지? 근거도 없이, 그저 사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사람을 의심하고 처형장에 보낼 생각을 하면서, 팔 하나 내놓을 자신감은 없는 건가?”
오, 지금 되게…… 인성 파탄자 같은걸.
왠지 발레리안 휘하에 있는 성기사들이 그에게 꼼짝을 못 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처음 보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이브는 숨을 삼키며 눈만 도르륵 굴렸다.
“……실언했습니다.”
로건 클라인은 끝내 제 잘못을 인정했다. 이브는 딱히 사과를 바라진 않았지만, 빨리 이 상황을 일단락시키고 싶었기에 순순히 사과를 받았다.
“괜찮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마지못해 사과한다는 게 얼굴에서 보이는 것 같죠.
이브는 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모른 척 외면했다.
“경비가 굉장히 삼엄합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난감한 듯 말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에 이브와 발레리안의 시선이 바로 교차했다.
그들이 어릴 적, 성국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에 발레리안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용하던 개구멍이 있었다.
이브가 발레리안을 향한 릴리트의 급습을 방어하기 위해 숨어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 구멍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긴 바로 기도실로 통하는데.’
지금은 사제들이 한창 기도실에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기다리는 게 좋겠어.”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같은 통로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과 이브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로건과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군소리 없이 그들을 따랐다.
이브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인지라 해가 조금 더 빨리 졌다.
곧 수많은 악마와 상대해야 하는데, 태양이 지면 전력이 우리 쪽한테 불리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비밀 통로를 본 로건의 얼굴에 의심과 의아함이 공존했다.
“비밀 통로니까 알게 된 이유도 비밀이에요.”
대답하기 귀찮았던 이브는 대충 둘러댔다.
기도실 바로 앞에 당도한 이브가 옆에 있던 발레리안에게 속삭였다.
“차라리 지금 들어가는 게 어떨까?”
이브의 제안에 발레리안이 고민에 빠진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를 보던 이브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은 내가 한번…… 인원을 확인해 볼게.”
“그게 가능해?”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이용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무고한 사제가 다치는 거 아닙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로건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이브는 눈을 끔뻑였다.
“물에 맞았다고 다치는 사람 봤나요?”
“파도에 맞으면 기절도 가능합니다.”
“그러면 제 마법이 탄로 날 텐데, 이렇게 몰래 잠입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이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단박에 로건 클라인을 향해 발레리안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가 박혀 들어갔다.
로건 클라인은 할 말이 없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도해 봐서 나쁠 거 없어요.”
이브는 눈을 감고 주변에 있는 수분을 느꼈다. 정확히는 수분에서 느껴지는 온도였다. 인간이 있다면 그 주변의 수분은 미묘하게 온도가 높을 터였다.
이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브, 왜 그래?”
발레리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역시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건 시기상조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 아픈 거야?”
이브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안에…… 한 명도 없어.”
“뭐?”
“기도실에, 아무도 없다고.”
이 시간에, 기도실에 아무도 없다니.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