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달칵. 공작은 발레리안이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하의 포털이 열리는 일에선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성녀가 제물이라.’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중앙 정치권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날조를 서슴없이 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조작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발레리안을 성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정말로 에스텔라와 떠날 생각이라면 시일을 미루어라. 아니면 차라리 다른 기사들을 붙여 줄 테니 넌 회복에 집중하든지, 둘 중 선택해.”
발레리안과 함께 유일한 엘라인 디에고 루드비히는 알고 있었다.
지금 발레리안이 얼마나 좋지 않은 상태인지.
그의 안에 있는 태양의 힘이 어떠한 형태로 요동치고 있는지.
지금 발레리안의 몸속에 있는 힘은 방대한 마력의 침입으로 불안정했다. 그걸 알면서 적진으로 향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지금 네 몸 안에 있는 태양의 힘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 알고 있느냐.”
“예.”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 성국으로 떠나겠다는 그의 말에 루드비히 공작은 벽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고집을 부리는 게 완전히 제 어머니인 멜린과 판박이군.’
피는 못 속인다는 게 이런 면에서 드러나니 착잡하면서도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금방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그 말을 하는 발레리안은 한 점의 의심 없이 확신에 차 있었다.
“마법사의 마력을 정통으로 받은 건 전례가 없는 일인데,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제 몸 상태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전혀 신뢰가 안 가는 말이었다.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 포털이 열릴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다. 하물며 회복하지도 않은 상태로 섣불리 전투에 임하다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이틀 뒤입니다.”
이틀?
발레리안의 뜬금없는 말에 루드비히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시간을 말하는 건 하나의 상황밖에 없었다. 공작의 낯이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졌다.
“포털이 그때 열린다는 말이냐.”
“예.”
굉장히 촉박한 시간이었다.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공작을 향해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붉은 달이 뜨는 날에 포털이 열린다고.”
“……붉은 달이라면 월식이군.”
루드비히 공작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평화롭고 조용한 밤하늘.
그 위엔 완전한 보름달이라고 하기엔 아주 약간 모자람이 있는 달이 은은히 떠 있었다.
이틀 뒤, 저 달이 보름달이 되는 순간.
이 평화로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이브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성국으로 떠날 채비를 꾸리고 있었다.
“이브, 몸은 괜찮아?”
발레리안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이브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사경을 오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빨랐다. 고작 며칠 새 이렇게 멀쩡해질 수 있다니, 마법사의 몸은 원래 이런 것인가?
지금은 완전히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리안은? 너야말로 몸은 괜찮아?”
이브는 슬쩍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외려 발레리안의 얼굴이 조금 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 일이 끝나면 푹 쉬면 되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듯 부드러이 덧붙였다.
“결혼도 하고.”
“…….”
괜히 부끄러워진 이브는 붉어진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채비를 꾸리는 척 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브, 그러다가 숨 막혀!”
발레리안이 화들짝 놀라며 이브를 그녀의 짐에서 떨어트렸다.
이브는 그의 과보호에 더욱 민망해졌다.
감옥에서 악마에게 죽을 뻔한 이후로, 그는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리안, 이래서 전투나 제대로 치를 수 있겠어?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리안은 본인의 몸을 더 살펴 줘.”
이브는 조금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사실 불만스럽기보다는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마력을 정통을 받아 내고 꼬박 일주일을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휴식을 좀 더 취했어야 했는데,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구하려고 악마와 전투를 치렀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른 기사들도 함께 가는 거야?”
이브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단둘이 성국에 가는 것보단 다른 기사들도 함께 가는 편이 전력 면에서나 발레리안의 안전 면에서나 나았다.
“아니. 인원이 많아지면 자연히 눈에 띄거든. 그중에 악마의 끄나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서 우리의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럼 우리 둘이서 가는 거야?”
“응. 첫 전투는 우리끼리. 그리고 상황이 안 좋을 시 이 신호탄을 쏘아 보내면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제국군이 들어올 거야.”
그는 붉은 막대기를 보여 주며 말했다.
어쨌든 전투는 우리끼리 치러야 한다는 소리인데. 이브는 걱정이 몰려왔다.
세상을 구하는 데 이렇게 단출한 인원으로 가도 되는 것인가, 하는 원론적인 의문에서 기인한 걱정이다.
‘적어도 원정대는 꾸리고 갈 줄 알았더니.’
이브가 일순 발레리안이 여행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단둘이 어딜 간다는 사실에 설레 하는 게 분명했다.
‘바보야! 우리는 격전을 치르러 간다고!’
이브는 발레리안에게 그리 소리치고 싶었지만, 기뻐하는 그의 미소를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져 입을 다물었다.
“미쳤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끼어든 익숙한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언제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자비에가 팔을 꼰 채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고 있었다.
이어 이브에게로 시선을 옮긴 자비에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 두 사람만 보낼 수 없습니다. 로건 클라인, 그대가 일행을 꾸려서 동행하도록.”
“제가 말입니까?”
옆에 있던 로건 클라인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로건과 눈이 마주친 이브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시선을 담고 있는 눈빛을 외면한 채 딴청을 부렸다.
자신을 의심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꾀병으로 황궁의를 불러낸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비에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하…….”
이브는 금방 납득했다. 마법사와 마법사의 편을 드는 엘라.
그 둘만 보내기엔 조금 석연치 않다 이거지.
모든 일을 섬세하게 고려하며 처리하는 자비에다운 판단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드비히 경.”
로건 클라인은 마뜩잖은 얼굴로 발레리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악수로 인사를 청한 광경이었으나, 그 손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발레리안은 천연스럽게 이브에게 말을 걸었다.
“이브, 배고프지 않아?”
“……응? 으응, 배고파.”
가볍게 로건을 무시한 발레리안의 모습에 당황하던 이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본다면 내민 손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무시였다.
인상을 찌푸린 로건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꽂혔다. 명백한 적의였다.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
이브는 만만한 게 나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동행을 고려하여 심신을 다스렸다.
-똑똑.
이어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환자실로 음식 냄새가 폴폴 풍기는 트롤리가 들어왔다.
‘뭐지?’
이브와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한 시선으로 트롤리를 보았다.
그 안에 당황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었다.
발레리안이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긴 여정이 될 텐데 이브의 속은 든든하게 채우고 가야지.”
배고프냐고 묻더니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식사하라니.’
그러나 이브는 트롤리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환자실 테이블에 때아닌 음식들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속……? 리안의 속은?”
마치 자신은 안 먹는다는 얘기처럼 들리지 않나.
이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발레리안이 헤실거리며 대꾸했다.
“난 이미 여기 오기 전에 먹고 왔어. 이브 혼자서 마음껏 먹어.”
그러니까 이걸 다 나 혼자 먹으라는 거지.
이브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풀 코스로 음식을 주문했을 때보다 가짓수도 다양할뿐더러 양도 많았다.
‘저기요, 족히 10인분은 될 것 같은데요……?’
이브도 살면서 이만큼의 양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자비에도 음식의 양이 조금 심각해 보였는지 그답지 않게 입을 열었다.
“이걸 영애가 혼자 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음식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아.”
“이브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살이 빠졌다고 들었어. 이 정돈 먹어서 보충해 줘야 해.”
발레리안이 갑자기 이브가 감옥에 갇혔던 일을 언급했다. 그 말을 하는 발레리안은 몹시 불쾌해 보였다.
마치 숙녀를 굶긴 후안무치를 보는 듯한 따가운 시선에 자비에는 괜히 뜨끔하여 변명했다.
“힐리오스 제국 여성의 평균 식사량과 균형 잡힌 영양소를 고려하여 배정한 식단이었다.”
“이브한텐 턱도 없이 부족해.”
“……리안.”
완전히 먹보가 된 기분에 민망해진 이브는 발레리안을 불렀다.
그녀를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는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브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먹고 바로 나가야 하니 여기에 대기하고 있는 편이 낫겠군요.”
로건 클라인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환자실 안에 있는 간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동행하기로 한 몇몇 기사들도 로건 옆에 서 있었다.
‘뭔데!’
그러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음식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이브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식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태세라 이브는 눈물을 머금고 포크와 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식이 오기까지 빨리 먹어 둬야 해.’
지금 창밖은 환한 낮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급했다.
“음식은 입맛에 맞아? 이브?”
이곳에서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건 발레리안,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발레리안의 예상과 기대대로 그녀는 테이블의 음식을 싹싹 비워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실 안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정말로 그 많은 음식을 다 비울 줄은 몰랐는지 경악이 서린 듯한 눈빛들이었다.
‘나도 이걸 다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브도 새삼 자신의 위장에 감탄했다. 이건 거의 먹으면서 소화시킨 게 아닌가 의심이 되는 식사였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흐뭇하게 웃던 발레리안이 냅킨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나도 손 있어……. 리안.”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는 것이 쑥스러웠다. 이브는 민망한 얼굴로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해사하게 대꾸했다.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응……. 그래.”
평소라면 극구 스스로 닦겠다고 우겼겠지만, 여러 일을 치르면서 이브는 그의 말과 행동에 약해졌다. 아무래도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게 분명했다.
‘뭐, 리안이 좋다는데.’
이브는 아무렴 어떤가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떠나야 합니다.”
그때 달콤한 분위기를 깨트리는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건 클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