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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88화 (88/100)

88화

“무슨 일 있어?”

이브는 환자실에 들어온 발레리안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레리안은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나보고 다시 감옥에 가래?”

이브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삼시 세끼 식사도 잘 나오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것도 익숙해졌는걸.”

이제 그가 자신의 문제에 신경 쓰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브도 다시 차가운 감옥에 갇히고 싶지 않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익숙해졌다고?”

발레리안은 금방 이브의 거짓말을 눈치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모았다. 면면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응……. 왜?”

“이브, 나한테만큼은 솔직하기로 했잖아.”

발레리안의 말에 이브는 아차, 했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다 솔직하게 말하란 말인가. 그건 곤란한데. 이브가 난감해하는 모습을 본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엘라의 힘이 그녀의 몸에 흘러 들어왔다.

그의 힘이 흘러들 때마다 그녀의 상태가 안정된다는 걸 알고서부터 그는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엘라의 힘을 나누어 주곤 했다.

“그럼 리안,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 솔직히 대답해 줘.”

“뭐든지.”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그의 대답에 이브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깨어나고 나서, 그를 보았을 때는 마냥 반가웠다. 하지만 조금 안정을 되찾고 정신이 또렷해지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 냈다는 사실을.

일순 이브의 눈빛이 심각해지자 발레리안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 너, 몸 상태 괜찮은 거 맞아?”

그 말을 하는 동안, 이브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심장이 뛰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발레리안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응, 당연하지. 지금 이브가 날 걱정해 준 거야?”

“……그렇게 농담으로 치부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 줘.”

이브의 말투가 조금 퉁명스러웠다.

누구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조마조마한데, 저렇게 천하태평으로 남 일을 말하듯 무심하다니!

누가 보면 그녀의 마력을 받아 낸 사람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줄 알 터였다.

그녀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눈치챈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걱정을 해 주는 것도 고맙지만, 지금의 이브는 자신만 걱정해.”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아, 이브가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환자실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우당탕하면서 뛰쳐 들어왔다. 난데없이 침입자가 나타나자 발레리안이 반사적으로 성검을 발검했다.

“으악!”

“……백작님?”

“나, 나라네! 이브의 친부! 아버지!”

성검이 목 끝에서 번쩍이는 걸 본 에스텔라 백작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해명했다. 발레리안은 빠르게 검을 거두었다.

“잠시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어서 백작의 팔을 붙잡았다. 발레리안의 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다가 사라졌다. 악마가 아님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에 있던 기사들도 다시 검을 제자리에 두었다.

곧이어 들어온 사람들을 발견한 이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니?! 이브!!”

“정신을 잃었다고 들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것이냐!”

딸의 소식을 먼발치에서만 전해 들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백작 부부는 얼굴이 잔뜩 핼쑥해진 채로 그녀 앞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브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네, 네…….”

정신이 없는 상황에 이브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저 멀리, 노아는 기력이 쇠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몰골을 보니 그녀가 없는 동안, 백작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추측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어떻게들 오신 거예요?”

이브가 의아한 듯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기실 현재 상황에서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그게, 전하께서 배려해 주셨단다.”

백작 부인이 말했다. 두 부부가 나란히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브의 몸을 계속 살폈다.

괜스레 쑥스러워진 이브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또 누구지?’

환자실의 내부는 꽤 넓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안전의 문제로 루드비히 기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고, 발레리안과 그녀의 가족들까지 있었다.

조금만 더 사람이 들어오면 실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주치의 카니엘의 문진을 예상했으나 그녀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환자실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디에고 루드비히.

루드비히 공작이자, 발레리안의 아버지인 그가 검은 슈트를 입은 채 나타났다.

“공작 각하?!”

특히 공작을 발견한 에스텔라 백작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줄 알겠네. 이브는 이마를 짚었다.

가장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하필 그녀 앞에서 맞닥뜨리다니.

‘어떻게 이 상황을 무마시키지?’

백작 가문에서 루드비히 가문에게 저지른 잘못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작이 여기서 아버지를 문책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이브는 긴장한 눈빛으로 공작을 보았다.

환자실에 들어온 공작은 무감한 표정으로 환자실을 훑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 끝엔 발레리안이 있었다. 공작의 눈빛이 단박에 매서워졌다.

“발레리안, 네가 왜 여기 있지?”

“약혼녀의 곁에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공작은 그답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은 많은데 여기서 할 말은 아니라는 듯 꾹 눌러 참는 것이 이브의 눈에 보였다.

“고, 공작 각하.”

에스텔라 백작이 쭈뼛쭈뼛 공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마치 자수하러 온 죄인 같은 얼굴이었다.

“오랜만이군, 백작.”

“제 소중한 딸을 비호해 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하면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하는 에스텔라 백작은 눈을 붉히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곁에 있던 백작 부인도 다를 게 없는 상태였다.

“훌쩍,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도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희가 공작님께 큰 실례를 저질렀는데……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다니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급기야 백작은 공작을 향한 감사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작에게 바짝 다가갔다. 무언가 불길했던 이브가 몸을 들썩이며 아버지를 불렀다.

“지금 뭐 하시려는 거……!”

이브가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백작이 공작을 와락 껴안았다…….

“……?!”

백작이 껴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공작은 속수무책으로 포옹을 당해 버렸다. 환자실에 사람이 많은 탓에 비좁아서 피할 공간이 없던 이유도 있었다.

실내가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아…….”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린 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 바람으로 격하게 포옹을 하는 두 중년 남자.

주책맞은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던 이브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에 있던 기사들도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눈을 굴리다 노아와 시선을 마주친 이브가 입을 뻐끔거렸다.

‘왜 저러시는 거야?’

‘내가 알 바냐!’

이브는 문득 발레리안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를 슬쩍 흘끔거렸다.

당연히 그녀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발레리안은 훈훈한 광경을 본다는 듯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이쪽도 영 정상이 아닌데?’

발레리안은 양가 부모님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와 그녀의 약혼, 더 나아가 결혼에 차질이 생길 일이 없다는 것에 흡족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이브는 발레리안을 별종 보듯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 어색한 상황은 공작이 껄끄러운 목소리로 한 소리 하면서 금세 일단락되었다.

“……미안하지만, 타인과 닿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네.”

“아이고! 또 실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후다닥, 몸을 떨어트린 백작이 허허,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마침 세 분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발레리안의 말에 내부에 있던 이목이 일제히 그에게 몰렸다. 발레리안의 시선을 받은 공작은 안에 있던 기사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환자실엔 오로지 양가 가족들만 남게 되었다.

발레리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와 이브는 빠른 시일 내로 성국에 가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브도 당황한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리안이랑 성국에 가야 한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지하의 포털을 여는 일에는 한 가지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 의식의 제물이 바로 성녀입니다.”

그의 말에 에스텔라 가족들과 공작의 얼굴에 혼란스러움과 당혹감이 번졌다.

“근거가 뭐지?”

루드비히 공작이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 발레리안이 꺼낸 말이 어떤 의미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이브도 침을 꿀꺽 삼키며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녀가 모르는 근거가 있는 걸까?

“이브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게 근거입니다.”

“…….”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무조건 이브의 편을 들던 백작 부부도 못 당하겠다는 듯 뜨악한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보았다.

결국, 대화는 이브와 발레리안이 함께 성국에 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브가 회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만, 악마가 이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발레리안이 그녀를 두고 떠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행여 마력이 폭주하던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확신도 없지 않나.

그 점을 아는 백작 부부와 노아도 침묵으로써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잘되었어.’

이브 또한 그 여정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만히 포털이 열리는 걸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더불어 성녀를 구해서 포털이 열리는 걸 막는 건 마법사들의 누명을 벗길 기회였다.

일이 잘 해결된다면 가족들과 식솔들이 죄인처럼 숨어 사는 일도 끝,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닌가?

전후 설명을 들은 공작의 얼굴은 계속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잠시 둘이서 이야기 좀 하지.”

“네.”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는 비우지 못합니다.”

이브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꼴을 코앞에서 목도하자 공작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짜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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