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길면서도 짧은 듯한 하루가 지났다.
참모실에서 진행 상황을 전달받으며 소년을 기다리던 자비에는 불현듯 아무도 그 소년을 데려오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측을 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무도 입궁한 자가 없다는 건가?”
자비에는 옆에 있는 로건 클라인을 보았다.
“……예, 소년을 찾은 이가 없습니다.”
로건 클라인은 인정하기 싫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년의 신원이 불명확하다. 그 사실은 마법사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러면 이브 에스텔라의 말이 사실이란 뜻인가.”
“하지만 빈민가 출신의 소년을 하룻밤 사이에 찾아내기란 역부족입니다.”
로건 클라인의 말은 짐짓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리나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팔 하나가 없고 실명한 아이 하나를 찾지 못한다, 라.”
특징마저 뚜렷하며 거동도 불편한 아이였다. 그래서 마음이 쓰였던 자비에가 특별히 궁내의를 소년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궁내의는 소년의 집을 찾지 못하고 그냥 황궁으로 돌아왔다.
곱씹을수록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비에는 문득 소년이 들고 있었다는 책을 떠올렸다. 마법사의 마력 폭주 당시에 소년이 책을 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사람은 여럿이었다.
‘책.’
이브 에스텔라가 소년이 악마라고 주장하면서 현장에 책이 없었냐고 물었었다.
자비에는 고뇌에 빠진 채 미간을 좁혔다.
기실, 에스텔라 영애가 정신을 잃었던 사이, 발레리안이 증언을 했다.
그 소년이 들고 있던 책을 이브 에스텔라가 빼앗았고, 책이 절로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마력이 폭주했다.
그가 말한 바는 이게 전부였다.
‘그러면 그 책이 발레리안이 말한 책이라는 말인가?’
명백히 이브 에스텔라가 무죄라는 걸 입증하는 증언이지만, 문제는 그 증언을 한 사람이 발레리안이라는 점이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 일보다 더 미친놈처럼 구는 녀석이기에 증언의 객관성을 잃는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있었다.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한단 말이지.”
이브 에스텔라가 감옥에서 했던 증언과 발레리안이 했던 증언의 전후 상황이 모두 똑같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서로 말을 맞추었다고 하기엔 커다란 맹점이 있었다.
에스텔라가 증언했을 땐 발레리안이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발레리안이 증언했을 땐 반대로 에스텔라가 정신을 잃은 상태라는 것.
두 사람이 말을 맞출 기회가 없는 상황이다.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무언지, 자비에는 정확히 유추했다.
“설마…….”
로건 클라인이 얼굴을 굳혔다.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했던 탓이다.
“이브 에스텔라의 구금을 풀 생각입니까?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그때, 발레리안이 참모실로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는 이브의 환자실에 개인 기사들을 보초로 세운 상태였다.
제 손으로 직접 엘라의 힘을 사용해서 악마 판별을 끝낸 기사들이었다.
“만약 소년이 악마라면.”
발레리안의 시선이 로건 클라인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그 악마가 계획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지?”
오만하게 쏘아 대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던 로건 클라인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제국에서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엘라.
클라인도 황태자의 호위 기사 자격으로 황궁에서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정의롭다는 세간의 평판과 똑같은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엘라의 푸른 눈동자는 위압적이고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를 묶어 두는 것, 아니면…… 마법사의 죽음이겠지.”
자비에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이미 한 번 악마가 마법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발생했기에, 지금 상황에선 소년이 악마라고 가정하는 편이 아귀가 맞았다. 로건 클라인은 어떤 이유인지 그걸 인정하기 싫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이브 에스텔라를 자택으로 돌려보내는 건 위험하다. 다른 악마가 노릴 수 있으니, 이곳에서 감시하며 보호하는 것이-.”
“이미 황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지.”
발레리안이 자비에의 말을 끊었다. 첨예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자비에를 찌를 듯 노려보았다. 감옥에 갇혀 있던 이브 에스텔라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던 사건을 지적한 것이다.
자비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황궁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악마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언제든 위장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비에는 신탁을 떠올렸다.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
태양을 가리는 검은 악귀들이 세상을 비명 소리로 가득 채울 것이다.>
붉은 보름달.
그건 행성의 그림자가 달의 일부를 가리는 월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모호했던 신탁의 의미를, 며칠 전에 천문학자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야 자비에는 알아차렸다.
신탁이 바로 월식을 가리키고 있음을.
그리고 100년 전, 지하와 지상 사이를 잇는 포털이 열린 날도 붉은 달이 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모든 정황이 이번의 월식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자비에도 이번엔 쉬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월식까지만이라도 영애를 황궁에 두어야만 해.”
“월식?”
발레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왜 하필 월식이냐고 묻는 시선이 명명백백 드러났다.
자비에는 눈짓으로 로건 클라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선을 받은 로건은 마뜩잖은 얼굴로 참모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자비에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월식에 포털이 열린다는 신탁을 받았다.”
이야기를 들은 발레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원을 잇는 포털을 열기 위해선 단순한 마력으론 불가능해. 인간의 힘으론 범접할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엄청난 힘이 필요하지.”
자비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에스텔라 영애는 포털을 열기 위한 제물이 성녀라고 주장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포털을 여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포털을 열기 위한 제물.
신의 대리자, 신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성녀가 제물로 쓰인다는 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차원을 여는 것은 막대한 힘, 신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으니.
같은 생각을 한 발레리안은 자비에의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이브 에스텔라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감옥에서 마력을 썼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니까.”
자비에는 부하들을 시켜서 감옥 안을 수색하게 했다. 그런데 이브 에스텔라가 머물던 감옥의 벽면 사방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수분이 차서 그런 게 아닌, 인위적으로 젖은 벽이었다.
혹시 몰라서 자비에는 에스텔라 영애가 정신을 잃은 동안 고대의 역사서까지 다 찾아보았다. 마법사의 마력 차단 감옥이 이전에도 뚫린 사례가 있었는지.
결론은 없다, 였다.
그러면 이브 에스텔라가 첫 사례자라는 소리였다.
‘하필 100년 만에 나타난 마법사가 어떻게 대마법사일 수 있는 건지…….’
여태까지 유일한 대마법사는 리아 루시엘라, 단 한 명이었다.
그녀는 제국 역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마법사였다. 그런데 백 년 만에 나타난 마법사가 또 대마법사라니.
신의 장난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리안이 카빌라를 먹인 것이 그 원인이라는 걸, 자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계속 침묵을 유지하던 발레리안이 자비에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이브가 그럴 리 없어.”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지는 모르는 법이지.”
발레리안이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 행동하자, 자비에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더 심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폐하의 생각보다는 옳은 결단이 중요한 시점이지. 만약 마법사를 그대로 구금하고 성녀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성녀가 정말 소환 의식의 제물로 쓰인다면-.”
자비에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 세상은 멸망이다.”
“…….”
발레리안은 침묵했다. 자비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발레리안도 본능적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에스텔라 영애가 마음먹고 악마를 소환하려 한다면, 막을 사람은 엘라인 너밖에 없다.”
자비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걸 인정했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이를 막을 수가 있을까.
이번에 감옥에 가둔 것도, 그녀가 마력 폭주를 하다가 정신을 잃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정신을 잃어서 가능한 일이었지.’
자비에는 발레리안을 보았다.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자비에의 녹안은 총명하게 빛이 났다.
이미 엘라가 마법사의 편에 선 이상, 마법사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이브 에스텔라의 곁에 있겠다는 네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하나의 결론밖에 없지.”
자비에의 목소리가 적막한 참모실에 나직이 내려앉았다.
“발레리안, 에스텔라 영애와 함께 성녀를 구해라.”
이건 황제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명령이었다.
* * *
창살을 뚫고 들이치는 달빛 아래.
피로 그려진 문양 위에 누워 있던 유리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굴려 사방을 둘러본 유리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안심하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흑…… 흑.”
복받치는 설움에 눈물을 흘리며 팔에 꽂힌 호스를 보던 그녀는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신음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발레리안을 좋아했던 것?
이브 언니를 모함했던 것?
이 성국에 있는 사람들을 믿었던 것?
애초에…… 이 세계에 온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었을까?
“아!”
또, 이 두통이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이 두통에 유리는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유리야! 엄마가 방 어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니?
-기특한 우리 딸, 성적 많이 올랐네.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와 잔소리, 따스한 손길.
이 세계에 오기 전, 그녀의 기억 편린이었다.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그저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리는 달빛을 보며 눈물을 툭, 흘렸다. 누가 좀 구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