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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86화 (86/100)

86화

잠시 뒤, 자비에가 황궁의들을 대동한 채 이브가 누워 있는 환자실로 들어왔다.

황궁의들은 이브의 주위를 빙 둘러싼 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마력의 부작용으로 몸져누운 환자는 처음 본 의사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쉽게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잘 먹고 잘 쉬는 게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입니다만…….”

“그런 얘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발레리안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의 표정은 고요했지만, 의사들을 향한 푸른 눈동자는 맹렬하게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같았다. 자비에는 치미는 한숨을 참으며 중재했다.

“발레리안, 100년 만에 나타난 마법사를 정확히 진료할 수 있는 의사는 없다.”

“그러면 이브를 여기에 둘 이유가 없지.”

발레리안의 말엔 거침이 없었다.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날 여기에 둘 이유가 없다니.’

그러면 자신을 여기서 빼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설마……아니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곧 두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그의 행동에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돌연 그녀를 안은 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발레리안!”

예기치 못한 발레리안의 행동에 자비에가 맹렬히 소리쳤다.

“에스텔라 영애는 황궁을 벗어날 수 없다.”

자비에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발레리안과 이브의 주변을 에워쌌다.

금방이라도 뇌관이 터질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자비에와 시선이 마주친 이브는 그의 눈빛을 읽고,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몸이 안 좋아, 잠시 쉬고 싶어.”

“조금만 참아, 이브. 더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콜록콜록!!”

발레리안이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브는 더욱 거칠게 기침했다. 거의 토할 기세로 기침을 이어 가니 그제야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서둘러 그녀를 내려놓았다.

등 뒤로 푹신한 느낌이 들면서, 수백 개의 날이 서 있는 것 같던 첨예한 분위기도 한층 누그러졌다.

“어……?”

문득 기침하던 이브는 제 입을 막은 손을 내려다보고는 당황했다.

기침하는 척 손으로 막았건만, 그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옮겨졌다. 이브의 손에 묻은 피를 본 그의 얼굴이 방금보다도 더 하얗게 질렸다.

“잠시 몸 상태 좀 살피겠습니다.”

황궁 의사 중 가장 연로해 보이는 사람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궁의부 최고 권위자이자, 황궁의 카니엘이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분인데?’

그녀는 머지않아 그가 불로초 카빌라의 진위를 감별해 준 황궁의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쩐지 그녀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는 사람을 또 맞닥뜨리게 되니 머쓱하고 쑥스러워졌다.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습니까?”

카니엘이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문진을 시도했다. 이브는 당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을까.

“네, 엄청요.”

하지만 곧 카니엘과 눈을 마주한 이브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또 알아차렸다. 그가 지금 허위 진찰을 하고 있다는 것.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인데?’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머쓱히 시선을 돌리는 게 그 반증이었다.

‘하기는.’

진료가 가능했다면, 아까 전에 진료를 보면서 진단을 진즉 끝내 놓았을 것이다.

이 사달이 마법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해 벌어진 일이었기에 카니엘은 필사적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이리라. 전후 상황을 파악한 이브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장단에 맞추었다.

“네…… 지금 이런 상황도 스트레스인데요.”

여기서 무고한 사람이 발레리안에게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

그게 그녀와 연관된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군요. 그러면 더 안정을 취하셔야겠습니다. 제가 처방전을 내려 약을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걸 먹으면 차차 나아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브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상황을 지켜보던 발레리안의 눈빛이 살짝 유순해졌다.

“내가 소란을 피워서 자극이 되었나 봐. 미안해, 이브.”

“괜찮아,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자비에는 저 둘을 보자니 스트레스로 위장이 아파 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위장 쪽에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곧잘 이랬다.

“카니엘, 조금 있다가 내 집무실로 와 주시오.”

“전하께서도 어디 편찮으십니까?”

자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발레리안, 에스텔라 영애와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줬으면 하는군.”

자비에의 요청에 발레리안은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말해도 요지부동일 것 같은 그 모습을 보니 자비에는 위통이 더 심해지는 듯했다.

“에스텔라 영애의 향후 거취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브는 지금 무력해. 내가 옆에서 지켜야만 해.”

발레리안은 사위를 날카롭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누가 악마로 위장하여 숨어들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졸지에 숨은 악마 취급을 받은 기사들은 욱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미 악마가 간수로 위장해서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는 기사단 내에 일파만파 퍼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들의 실책이다.”

자비에는 잘못을 인정했다. 감옥에 악마가 숨어든 걸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간수들 몇 명이 희생당했다. 더불어 이브 에스텔라까지 죽음의 문턱을 오갔지 않나.

마법사들의 감옥은 황궁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했지만, 악마들의 출현이 빗발치고 있는 지금.

아무리 감옥 안이 침입당한 것이라도, 황궁 내라면 그 어디라도 감시와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황실에선 엄중히 살펴야 할 중대 사안이었다.

“…….”

환자실 안이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기사들은 주군을 사과하게 만든 자신들이 한심해 자괴감이 들었으며, 자비에는 제도의 수뇌부들이 모인 곳이 뚫릴 뻔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분위기 뭔데.’

여기서 가장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사람은 이브 에스텔라.

그녀 혼자였다. 도르륵 눈만 굴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힐끗거린 자비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대화를 나눌 컨디션이 아닌 듯하니, 나중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환자실을 나섰다.

문을 탁 닫은 후, 자비에는 참모실로 향했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걷던 로건 클라인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자작극은 아닌지 의심하셔야 합니다.”

“마법사의 피가 검은색이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비에가 단호히 로건의 말을 일축했다. 감옥에 남은 혈흔엔 검은 피도 같이 있었다. 악마가 침입한 흔적이었다.

“…….”

로건 클라인은 할 말이 없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비에는 며칠 전, 정신을 잃은 채 감옥에서 발레리안에게 안겨 나온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섬뜩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애써 그 감각을 지워 낸 자비에의 녹안이 어둡게 빛이 났다.

‘악마가 마법사를 죽이려고 했다.’

그건 이 사건을 관통하는 사실이자, 모든 걸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지하 세계의 포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이를 악마가 노리고 있다.

아무리 역사에 무지한 이라도, 이 부분은 짙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악마들 사이에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도…….’

최소 상급 이상의 악마가 마법사를 특정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 자체는 다시 한번 재고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는 문득 마지막으로 이브를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제물이 성녀였어요.”

“다쳤다고 했던 그 소년, 신원은 제대로 파악이 되었나요?”

“그 소년이 악마니까요.”

확신에 찬 이브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100년 전 악마 소환 사건의 배후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비에는 사촌 누이, 오필리아 글렌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회신.

[예전에 독서 모임에서 역사서를 읽은 적 있어요. 당연히 그 역사서엔 100년 전 악마 소환 사건도 언급되어 있었죠. 하지만 뭔가 숨겨진 게 있는 것 같아서 성전에 간 적이 있는데,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어요. 특히 마법사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서요.]

오필리아의 편지는 혼란만 가중시켰다.

“다들 빠짐없이 왔군요.”

참모실로 들어온 자비에는 원탁에 앉은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전하.”

모두 무관 귀족들이었다. 자비에는 그들에게 하나의 종이를 돌렸다.

그 종이에는 누군가의 초상화와 신원이 적혀 있었다.

“지금 내가 건넨 종이 속의 소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이게 뭡니까? 전하?”

무관들은 각기 제 손에 있는 종이를 보고 상황을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비에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까지, 그대들이 찾아 와야 할 소년입니다.”

그가 손으로 탁탁 테이블을 두들겼다.

“바로 내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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