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을 때, 그녀는 마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파악하고 회피했다.
그러곤 악마에게 돌진하며 달려가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지금 그녀는 마법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무력밖에는 답이 없었다.
-퍽!
아스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이 들어갔다. 그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후…….”
이브는 저릿한 손을 붙잡으며 악마를 보았다. 왠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때릴 때 죄책감은…….
‘개뿔!’
저 탈을 쓰고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인 건지, 생각만 해도 열이 솟구쳤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는 악마의 얼굴엔 티끌만 한 상흔도 보이지 않았다. 아스는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 보며 웃었다.
“이런, 내가 이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몸도 아이 같다고 생각했어? 정말…….”
순식간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그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스의 입매가 기괴한 모양새로 뒤틀려 올라갔다.
“어려서 그런지 순진하네.”
대화 내용과 달리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 증오가 한데 섞여서 진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벌레가 발악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브는 숨통이 조여들자 끅끅거리며 아스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악마의 힘이 이렇게 센 거야!’
이브는 할 수 없이 눈을 감으며 몸에 있던 마력을 최대한 발산시켰다. 아무리 마력 차단이 된 감옥이라지만, 이대로 손 놓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악마가 그녀를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손이 일순 꿈틀거렸다. 그의 손이 조금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그의 손이 얼어붙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선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마력이 나왔다.
처음 감옥에서 깨어났을 때, 몸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단단한 벽에 콱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감옥이 무슨 감옥인지 노아에게서 듣고 나서 그 기분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깨달았다.
‘리아 루시엘라.’
그녀를 통해 환상 마법을 본 뒤로, 몸의 마력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꽉 막힌 벽면에 바늘처럼 작은 구명이 생긴 것처럼.
그러나 너무 미묘한 차이라서 착각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어.’
그녀는 다시 마력을 방출하는 데 집중했다.
최대치로 마력을 방출시켜야 극소량이 나올 뿐이었지만, 아예 마력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마력으로 악마의 몸을 얼어붙게 할 생각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천천히 죽여 줄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아스의 붉은 눈동자가 짙어져 있었다.
“빨리 죽여서 내 입으로 넣어야겠어.”
“끄윽…….”
이브는 강해지는 악력에 따라 자신의 몸에 있는 마력도 가장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방금 마력을 발산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마력의 양이었다.
몸에 피 대신 얼음이 돌아다니는 듯한 한기가 그녀의 몸 마디마다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입이 덜덜 떨리고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행위가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악마를 그녀가 막지 못하면 모두가 위험했다.
“……이 버러지 같은 벌레 새끼가.”
욕설을 짓씹는 아스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 표피가 점점 얼어붙으면서 검은 피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브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력 방출을 멈추지 않았다.
“으…….”
쾅!
그녀의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녀의 숨통이 갑자기 트였다.
“콜록콜록!”
이브는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검은 피를 흘리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브!”
여기서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바로 그녀의 앞에서 들렸다.
‘발레리안!’
쾅!!
곧이어 큰 소음이 옆에서 터져 나왔다. 무언가 터지는 듯한 파열음 같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오한에 떨던 이브는 바닥에 누운 채 흐릿한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추워…….’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초점을 잡아서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 보이지 않았다. 곧 눈앞이 까맣게 암전했다.
* * *
달빛이 내려오는 깊은 밤.
적막한 교리실 안에 갑자기 거친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친, 엘라 새끼가……. 쿨럭.”
교황청의 교리실로 이동 마법을 쓴 아스가 쿨럭거리며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리엘이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왔다.
“아스! 괜찮아요?!”
“하…… 성녀, 그 계집은 어때?”
입가에 묻은 검은 피를 성의 없이 쓱 닦아 낸 그가 예민한 기색으로 묻자, 아리엘이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숨은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퉤, 계획을 전면 변경해야겠어.”
검은 피를 땅에 뱉어 낸 후, 빠르게 조각상으로 다가간 그는 조각상을 밀었다. 그 안에 숨은 레버를 끌어 내리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쿠궁, 하고 열렸다. 성녀가 갇힌 독방으로 향하자, 기이한 문장이 그려진 곳에 누워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증명했다.
“월식까지 얼마나 남았지?”
아스가 물었다. 아리엘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그가 월식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 상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열흘 남았습니다.”
“하…… 너무 긴데.”
아스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마법사가 정신을 잃은 게 그에겐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마법사가 알아 버렸어.”
“무얼 말이지요?”
“제물이 성녀라는 사실.”
아스가 전한 소식에 아리엘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그럼 죽이셨습니까?!”
“아니.”
아스는 다시 치미는 토기에 퉤, 뭔가를 뱉었다. 검은 피들이었다. 방금 엘라와 벌인 격전으로 내장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몇백 년 동안 만나 온 엘라 중에서도 더럽게 힘이 강한 놈이었다.
일부러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해 마법사를 마력 폭주 상태로 만들었건만.
‘다 쓸데없는 일이 되었다니.’
그는 계획이 틀어져 버리자 이를 아득 갈았다. 특히 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건, 타격이 컸다.
케케묵은 앙심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일 심산으로 늦장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답지 않게 사감을 떨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한 그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한꺼번에 처리할 거야.”
엘라와 마법사, 그리고 제도민까지.
그는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작심하셨군요.”
아리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지하 포털이 열리면, 악귀들로 제도가 아비규환이 될 터였다.
자연스레 제국은 몰락하게 되고, 제국민들은 성국에게 매달리게 될 것이다. 성국의 광영이 도래할 날이 멀지 않았다.
“열흘,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기다림이 길게 느껴지겠네요.”
아리엘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몇백 년을 기다렸는데, 열흘쯤은 기다림도 아니지.”
아스모데우스의 붉은 눈동자가 창살을 뚫고 들어온 달빛 아래에 희번덕거렸다.
“그때까지 누구도 성녀를 데려가지 못하게 지켜.”
“본부 받들겠습니다.”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사제들이 성녀들 주위를 에워쌌다.
사제들은 모두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웃고 있었다.
* * *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선 안 되었는데…….’
‘어서 성녀를 구해야 해…….’
또, 그 목소리.
이브는 저번에도 들었던 여인들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복잡한 환상들이 한데 얽혀서 잠을 방해했다. 하지만 잠에서 도무지 깨어날 수가 없었다.
‘너무 피곤해…….’
자꾸만 몸이 저 까마득한 아래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겨우 잠이 들었지만, 이번엔 무언가가 툭툭 얼굴 위로 떨어졌다.
‘이번에 또 뭐야…….’
무시하고 계속 자려고 했지만, 따뜻한 물이 쉴 새 없이 툭툭 얼굴 위로 떨어져 짜증스러웠다. 누군지 몰라도 단잠 좀 그만 방해하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녀는 부스스 눈을 떴다.
오랜만에 빛을 보니 눈이 부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발레리안……?”
그녀는 흐릿하게 보이는 잔상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브…….”
발레리안은 깨어난 이브를 보며 맑은 눈물을 후드득 쏟아 냈다. 이브는 그 모습이 꿈인가 싶었지만, 맞잡은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녀는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무사히 깨어났구나, 발레리안.”
진심으로 기뻐하고 싶었지만, 정작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발레리안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할 기운도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푹신한 촉감을 보아선 자신은 침대 위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침대는 없었다. 매일 밤, 딱딱하고 차가운 맨바닥에서 잠이 들었었는데. 더듬더듬 흐릿한 기억을 되짚던 그녀는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자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뚜렷해졌다.
“그 악마는 어떻게 되었어……?”
악마를 떠올린 발레리안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목에는 악마가 목을 조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뭐, 뭐가 잘못된 거야?”
그에게서 쉬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몸을 들썩였다.
놀란 발레리안이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며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안심시키듯 미소지었다.
“이브는 걱정할 필요 없어. 회복에만 전념해.”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외부 요인으로 마력이 차단된 상태에서 억지로 사용하려던 행위 자체가 위험한 것이었다.
외벽이 단단하게 막힌 출구 없는 공간 안에서 사람이 나오려면, 그 벽을 부수는 방법밖에 없다.
사람을 마력이라고 생각하고, 그 벽이 이브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발레리안은 상상만으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녀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