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이브…….’
발레리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미칠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그가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쉬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당황했다.
‘이건…… 끈?’
마치 노끈처럼 생긴 붉은색의 끈이 그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옆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놀라며 방을 뛰쳐나갔다.
“이게 뭐지?”
남아 있던 기사들에게 발레리안이 물었다. 몽롱했던 정신이, 작금의 상황을 깨닫자마자 빠르게 뚜렷해졌다.
“각하의 명이십니다.”
“무슨 헛소리를…….”
발레리안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아버지가 무엇 하러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헛소리가 아니다.”
그때, 루드비히 공작이 발레리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묶인 채 노려보는 발레리안을 본 공작은 옆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은 눈치껏 방을 나갔다. 이로써 루드비히 공작과 소공작,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발레리안의 면면은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끈을 끊어 내려고 했지만, 그의 무력이 통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점차 노란 빛에 휩싸였다. 마치 태양처럼 평범한 사람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막대한 엘라의 힘을 방출했지만 그를 묶은 밧줄은 요지부동이었다.
“소용없다.”
공작이 단호히 말했다. 발레리안이 하,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엘라를 묶는 용도로 만들어진 겁니까?”
“마법사의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무모한 짓을 했으니 묶어 놓은 것이다.”
공작의 말에 발레리안은 자신이 쓰러졌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이브의 몸에 엘라의 힘을 쏟아붓다가 역으로 그녀의 마력을 받아내느라 기절하고 말았다.
뒤늦게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발레리안이 다급히 물었다.
“이브는 괜찮은 겁니까? 제가 정신을 잃고 며칠이 지났습니까?”
발레리안의 초조한 안색을 본 루드비히 공작이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브 에스텔라는 괜찮다.”
“……정말입니까?”
발레리안은 공작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난동이었다. 그 난리를 목격한 시선마저 한둘이 아니었다.
필시 그녀의 정체가 황제에게 전해졌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발레리안이 크게 몸부림쳤다. 루드비히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발레리안,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 이브 에스텔라에 관해선 내가 손을 쓸 테니 회복에 집중해라.”
“황실이 문제가 아닙니다!”
크게 소리친 발레리안의 눈이 이글거렸다.
이어서 무언가 후드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리안을 묶어 놓았던 끈들이 억센 힘으로 끝내 끊어지고 말았다.
루드비히 공작은 그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죄를 지은 엘라를 묶어 놓기 위해 제작한 특수 재질의 끈이었다. 이 끈이 근 몇백 년 동안 끊어진 적이 없었던 터였다. 그를 스쳐 지나간 발레리안이 짓씹듯 말했다.
“악마가, 이브를 노릴 겁니다.”
* * *
“으음, 곤란한데.”
은밀하게 누군가와 접선한 아스는 흐음, 비음을 흘렸다. 이렇게 빨리 엘라가 회복할 줄이야.
‘영약을 먹은 마법사의 마력을 받았는데 지금 깨어났다고?’
그건 계획이랑 많이 어긋나는 사실이었다.
사실을 전해 준 아스의 세작, 루드비히의 사용인이 살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잔금은…….”
“아, 돈을 원해?”
아스는 씨익 웃었다.
“그런데 어쩌지. 계획이 이렇게 되어서 돈을 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뭐?!”
아스는 그대로 앞에 있는 루드비히의 시종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시종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말라 비틀린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스는 벌레를 죽인 듯한 태연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어쩌지요? 이렇게 엘라가 빨리 깨어날 줄은…….”
옆에 후드를 쓴 채 서 있던 아리엘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엘라가 마법사를 구하기 전에 내 쪽에서 처리하는 수밖에.”
“그렇군요. 시장하진 않으세요?”
“난 저렇게 나이 든 녀석은 입맛에 안 맞아. 더 좋은 먹잇감도 있으니까.”
아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브 에스텔라. 영겁의 세월 동안 마주한 마법사들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백 년 전에도 똑같은 마법사를 본 적이 있었지.’
리아 루시엘라. 그 마법사 때문에 그의 계획이 백 년 뒤로 미루어졌다.
마력 폭주로 이브의 몸에 내재된 마력의 양을 본 아스는 그 뒤로 줄곧 그녀를 잡아먹고 싶었다.
“후딱 해치우고 올 테니 그때까지 성녀를 잘 보살피도록 해.”
아리엘에게 말하는 아스의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짙은 악의와 앙금이 채 감추어지지 않았다.
* * *
감옥 안, 다시 혼자가 된 이브는 고민에 빠졌다.
“휴, 이걸 어떻게 알려야 할까…….”
이브는 자비에조차 제 말을 믿지 않는 듯하여 난감해졌다. 그걸 믿지 않는다면 다르게 전달할 방법을 세워야 하는데, 마땅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손 놓고 처형 날만 기다릴 수는 없는데…….”
그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한 간수가 다가왔다.
“벌써 식사 시간이에요?”
식사 시간까지 아직 멀었는데…….
이브는 아까 전에 식사를 한 걸 상기한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간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식사 시간이지.”
이브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알던 간수가 아니었다.
“……당신, 누구야.”
겉모양만 똑같았다.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그래, 마치 아론의 탈을 쓴 악마를 마주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다.
‘설마!’
이브는 선득해진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감이 좋은 마법사네.”
간수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 깜짝일 새에 그녀가 본 적이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녕? 우리 구면이지?”
소년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한쪽 시력을 잃고 손을 잃었다던 소년은 멀쩡한 모습으로 버젓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악마였구나. 하지만 이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을 텐데…….”
이 감옥은 마력을 쓸 수 없는 특수 재질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의 악마가 겉모습을 바꾼 건 분명히 마법이었다.
아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없이 가벼운 태도였지만,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묵직하고 음습했다.
“악마의 마법은 마법사랑 조금 다른 궤를 타서, 이 마력 차단벽이 먹히지 않거든.”
오직 마법사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감옥이란 의미였다. 이브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식은땀을 흘렸다.
“간수들은 어떻게 했어?”
“시끄럽게 굴길래 다 내 입 속으로 넣었지.”
입 속에 넣었다고?
설마 그 의미가…….
이브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아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악의가 다분히 섞인 미소였다.
“마법사들 때문에 내가 몇백 년이나 허비한 줄 알아?’’
아론에 이어서 간수들까지.
그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악마들에게 무고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무력함과 분노가 그녀를 짓눌렀다.
“……미친 악마가 천 년을 허비하든 말든.”
적의 서린 그녀의 말에 아스의 미소가 한층 비릿해졌다.
“내가 마법사란 족속들이 어땠는지 잠깐 잊고 있었네. 이렇게나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건방졌었지, 응?”
“성녀를 제물로 쓰려다 실패해서 꽤 마음이 쓰렸나 보네.”
이브는 이죽거렸다. 이 악마의 농간에 놀아나서 가족들과 그녀가 죄인처럼 숨어 지내고, 발레리안에게 상처를 주었던 걸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맞아.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이곳에 직접 찾아왔지.”
아스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우리 이제 이런 시시한 대화는 그만두고, 본론에 들어갈까?”
그녀를 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악마가 염력이라도 쓴 듯 벽에 그녀의 몸이 이끌렸다. 이브가 저항할 새도 없었다.
퍽!
“윽!”
이브는 벽에 부딪힌 고통으로 신음을 흘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괜한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꽤 자비로운 편이니까 아프지 않게 사지만 부러뜨리고 죽여 줄게.”
“으, 사지를 부러뜨리는데 아프지 않게는 개뿔…….”
마법사에 대한 앙심이 꽤 짙은 모양이었다.
그래, 몇백 년 동안 성녀를 이용하여 지하의 포털을 열려고 시도했는데, 마법사들이 족족 수포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열이 받을까.
그래서인지 바로 죽일 생각은 없다는 듯, 천천히 고통을 줄 요량으로 그녀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마법을 쓰고 있었다.
“그거 알아? 네가 여기서 죽으면 엘라는 완전히 인간에게서 돌아설 거야.”
“뭐……?”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 악마의 즐거운 음성을 들은 이브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난 마법사의 죽음을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 인간의 짓으로 꾸밀 작정이거든. 아, 내 뱃속에 들어간 간수들은 내 아이들이 대신 역할 해줄 거야.”
완전 범죄까지 계획했다는 뜻이었다.
“이 미친 자식이…….”
“악마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지.”
아스가 눈을 휘며 과장스레 허리를 굽혔다. 어릿광대 같은 몸짓이었다.
이브의 머릿속은 이 악마가 하려는 미친 짓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분명 성녀가 제물로 쓰이면.’
유리도 죽고, 그 뒤에 포털이 열려서 수많은 제국민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만약 악마의 말대로 그녀의 죽음으로 발레리안까지 인간을 외면하게 된다면?
‘악마의 소굴이 될 거야.’
산지옥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곳에서 본 환상 마법으로 직접 목격했다.
100년 전, 반쯤 포털이 열린 제도의 모습은 가히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옥, 이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아비규환이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아스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반대쪽 벽으로 이끌렸다.
-퍽!
“윽!”
이브는 침음을 흘렸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양 미치도록 아팠다. 아마 일반인이었으면 방금 벽에 한 번 부딪힌 거로 기절했을 터였다.
‘방금 봤어.’
하지만 그녀는 아스가 마법을 쓸 때, 마력의 흐름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찰나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