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환상 마법을 통해 100년 전 사건을 목격했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이브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자비에나 발레리안을 만나야만 해.’
하지만 발레리안은 그녀의 마력 폭주를 막느라 정신을 잃은 상태인 데다, 마법이 차단된 감옥이라 탈옥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날만 받아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이곳으로 자비에를 부를 방법이 있는지 고민했다.
슬쩍 쇠창살에 다가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간수님…….”
“뭐냐?”
“혹시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녀의 예상대로 간수들은 질색하며 극구 거절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네 녀석 때문에 지금 밤마다 악마 놈들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감히 전하를 뵙겠다는 소리가 나오나?”
노골적인 경멸이 섞인 말투에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브는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 남자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황태자의 호위 기사이자, 이제 막 단장직을 받은 로건 클라인이었다.
‘로건 클라인…… 가만, 익숙한 이름인데.’
원작을 떠올린 이브는 케케묵은 기억 속에서 그의 정보를 더듬었다.
로건 클라인, 그는 성국의 독실한 신자이자 성녀의 추종자였다.
성녀를 쫓아낸 당사자이자 마법사인 그녀가 눈앞에 있으니 꼴 보기 싫을 수밖에.
이브는 자신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자와 대화를 나눠 봤자 이득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이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왜 온 거람.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단장님이 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신 거죠?”
그녀의 질문에 로건 클라인은 더욱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황태자의 명을 받고 그녀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즉각 보고하라는 명이었다.
‘마법사가 병에 걸려서 잘못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성녀를 모함하여 제국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 자체가 악마와 한패라는 의미이거늘.
클라인은 마법사에게 우호적인 황태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의로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태자 전하의 명으로 오신 건가요?”
심지어 쓸데없이 눈치까지 빨랐다. 로건 클라인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의 반응을 본 이브는 금방 제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굴에 절로 떠오르려는 미소를 억눌렀다.
절대로, 절대로 로건 클라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
“콜록콜록.”
그녀는 거칠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클라인은 좀처럼 기침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얼굴을 굳혔다.
“뭐지? 감기라도 걸린 건가?”
“몰라요……. 며칠 전부터 이래요.”
그녀는 기침을 내뱉으며 꾀병을 부렸다.
“엄살 피우지 마라.”
한 번 면박을 준 클라인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는 간수들을 불렀다.
“마법사가 언제부터 기침을 했지?”
‘이크! 안 되는데!’
이브는 제 거짓말이 들통날 위험에 처하자, 재빠르게 입 안의 살을 물어서 피가 나오게 했다.
“콜록콜록!”
동시에 기침을 거칠게 내뱉자, 기침과 함께 핏물이 나왔다.
“녀석의 상태가 심각해 보입니다!!”
간수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동안 이브가 일부러 살갑게 대화를 건 덕분에 간수들은 어느새 그녀에게 정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들의 자식뻘 되는 이브가 막상 피를 토하자 식겁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잠깐 기다려라.”
로건 클라인은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한 차례 노려보곤 감옥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궁 주치의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막상 진료하기 위해 온 주치의는 그녀를 직접 진료하는 것을 무서워했다.
“……뭐 하는 겁니까?”
로건 클라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으로 주치의를 노려보았다.
“마, 마법사가 아닙니까? 괜히 진찰하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리고 역병에 걸린 거라면 전염의 위험성이…….”
“하아…….”
그의 얼굴에 ‘참 가지가지 하는군’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 구두 진찰을 하면, 콜록, 되지 않을까요?”
이브는 계속 입 안의 살을 씹어서 피가 끊임없이 나오게 했다.
입 안이 쓰리고 따갑긴 했지만, 자구책이 이것밖에 없다면 입 안에 구멍이라도 내는 수밖에 없다.
‘분명히 성녀가 제물이었어.’
이 상황을 황태자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백 년 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역사서엔 엘라가 악마들을 막았다고 나오지만, 정작 그 사건을 해결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마법사야.’
마법사들이 성녀를 본래 세계로 돌려보내서 포털을 다시 닫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환상을 본 이상 이브는 이대로 맥없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 노트를 꺼냈다.
“증상을 말씀해 보시오.”
“우선……. 입맛이 없고, 흉부를 찌르는 듯한 압박감에 피가 섞인 기침이 나와요. 그리고 자다가 경련도 하고…….”
이브는 생각나는 대로 심각한 증상들을 열거했다.
“으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주치의의 얼굴이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졌다. 그녀가 말한 이야기를 조합해 보자면 중증 폐병에 걸린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가만 보니 마법사의 몸이 일반인보다 더 마른 편이었다.
“원래 이렇게 마른 편이오?”
주치의가 이브를 보며 물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와 주치의 쪽을 보던 간수가 첨언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살이 쭉쭉 빠지덥니다.”
“식사는 거른 적이 없는데, 살이 이상하게 빠지더라지.”
옆에 있던 간수들도 맞장구를 쳤다. 간수 아저씨들……. 그렇게 말씀하시면 입맛이 없다고 했던 제가 뭐가 되나요.
이브는 차라리 입맛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말걸, 후회했다.
“충분한 영양식을 섭취하는데도 살이 빠진단 말이오?”
주치의의 얼굴이 심각한 낯빛으로 굳어졌다.
“예, 전하께서 영애의 식사만큼은 신경 쓰라고 하셔서요.”
“하이고…….”
주치의는 탄식을 흘렸다. 식사도 잘하는데 살이 빠진다라.
몸이 영양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일반인보다 기초대사량이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걸 모르는 주치의의 표정은 암담해졌다.
“처방 약을 가져오도록 할 테니 식사는 거르지 마시오.”
“콜록, 감사, 콜록, 합니다.”
로건 클라인과 주치의가 자리를 떠났다. 간수들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마법사라고 인간이랑 다를 바 없이 허약하기 짝이 없구만…… 쯧쯧.”
그녀를 보는 눈빛엔 채 감추지 못한 걱정들이 묻어났다.
“콜록, 콜록. 하이고…….”
이브는 병자인 척 골골거리며 맨바닥에 누웠다. 이제 이 차갑고 딱딱한 바닥도 익숙해져서 잠이 드는 게 어렵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정말 아픈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 이브가 벌떡 일어났다. 반가운 흑발의 미남자가 그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전하!”
“…….”
역시 꾀병이었군. 자비에의 얼굴엔 그리 적혀 있었다.
이브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를 보던 자비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져 있군.’
자비에는 일전에 발레리안과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무슨 영애의 간식을 그렇게 많이 사 가지?”
“이브가 좋아하거든.”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그렇게 먹으면 좋던 음식도 물릴 것 같은데.”
그때, 황궁에 방문한 발레리안은 에클레어, 밀푀유, 마들렌…… 등등, 열 가지가 넘는 황궁 간식들을 맛별로 다섯 가지씩 챙기고 있었다.
처음엔 본인이 먹기 위해 챙기는 것인가 싶었더니 다 약혼녀의 것이란다.
그러나 오십개가 넘는 간식은 한 영애가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아아, 이거, 이브는 이틀이면 다 먹어.”
말갛게 웃으며 말하던 발레리안을 향해 자비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식사량을 늘려야겠군.’
자비에가 미간을 좁히는 걸, 불쾌해한다고 오해한 이브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정말 속여서 죄송한데…… 전하한테 할 말이 있었어요.”
이브는 간수들 쪽을 흘긋 보았다. 자비에는 한숨을 내쉬며 간수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게나.”
“예, 전하.”
드디어 자비에와 이브가 단둘이 남았다. 그들 사이엔 여전히 차가운 쇠창살이 있었지만, 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제물이 성녀였어요.”
“그게 뜬금없이 무슨 말입니까?”
“지하 세계의 포털을 여는 데 필요한 제물이요.”
“……그게 무슨.”
자비에의 얼굴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었다. 이브는 갈등했다. 이 감옥에서 본 환상 마법에 관해 말할까 말까.
마법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고민에 휩싸인 그녀에게 그는 싸늘히 일갈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려고 꾀병을 부린 겁니까?”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에요!”
이브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분위기로는 감옥에 숨겨진 환상 마법조차 거짓으로 치부할 성싶었다.
“다쳤다고 했던 그 소년, 신원은 제대로 파악이 되었나요?”
“아직은, 안 되었습니다.”
그 소년의 신원을 파악하기 전에, 이브 에스텔라의 목이 잘리기 직전이라는 걸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지금 대주교의 강경한 주장까지 더해져 그녀의 처형을 미루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브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소년의 신원부터 파악해 보세요. 아마 찾기 쉽지 않을 테지만.”
“아직까지 소년이 악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까?”
자비에가 서늘히 말했다.
“내가 직접 그 소년을 만났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간 소년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이제 하다 하다 어린 소년을 악마로 모는 건가.
실망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비에는 그녀를 외면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감옥 밖으로 나와 궁전을 거닐던 그는 마음이 착잡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리엘 대주교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참고로 성녀님이 깊이 상심을 하신 터라, 외부 외출이나 외부인을 만나기 힘든 상태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이 왜 이 순간에 떠오른 걸까.
성녀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대주교의 말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정말 성녀가 제물이라서?’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끝내 자비에는 이 순간 생각난 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독서 모임의 주최자이자, 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사람.
그리고 그의 조언자이자, 든든한 아군에게.
* * *
한편 루드비히 공작 성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공작 각하!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발레리안의 곁을 지키던 기사가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