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제의 접견실 앞에 선 자비에는 복잡한 상황에 어두워지려는 표정을 능숙히 갈무리한 뒤, 노크했다.
“들어오게.”
그 안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웅장할 만큼 넓은 실내의 붉은 소파에 앉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핏기가 없는 황제를 발견한 자비에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폐하, 간밤에 강녕하셨습니까?”
자비에가 건넨 아침 인사에 황제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은 얼굴엔 수심이 안개처럼 자욱이 깔려 있었다. 아들인 자비에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폐하께서 시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
소탈하게 웃음을 흘린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에 단호히 결단을 내려야 하거늘. 이번 일은 고민이 많니라.”
황제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브 에스텔라. 황제도 어릴 적 그녀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에스텔라 백작은 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안면을 튼 사이였기에.
팔불출의 루벤 에스텔라의 성격상, 제 딸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숨기고 반역까지 도모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단순한 성미로 봤을 때 반역은 시작도 못 한 채 실패로 끝이 났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비에, 이럴 때일수록 사사로운 정에 휩싸여서 섣불리 결단을 내리면 안 되느니라. 그러다간 일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자비에가 무슨 이유로 알현을 요청했는지 짐작한 황제가 엄숙히 말했다. 제왕의 얼굴이 덧그려진 그의 모습에 자비에도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충언에 감사합니다.”
황제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앞서 말한 사적인 정을 차치하더라도 다음 난관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루드비히 공작이야.”
“……루드비히 공작께서 여길 왔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 에스텔라가 감옥에 갇히던 날, 공작이 날 보러 왔었지. 이브 에스텔라를 사면해 달라고 하더구나.”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황제는 아비로서 이 사태를 논의하고 있었다.
자비에는 접견실에 들어온 이래로 찻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이야기를 경청했다. 차는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의 눈주름이 깊어졌다. 제 아들이 차를 좋아하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느 때나 차를 입에 달고 사는 자비에가 이토록 속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엘라가 깨어난다면, 이브 에스텔라를 처형하는 건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하느니라, 자비에.”
현재 발레리안은 마법사의 마력 폭주를 막다가 엘라의 힘을 너무 과도하게 쓴 탓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디에고 루드비히에게 직접 경과를 들은 황제는 그 엘라가 한 달 뒤에 회복하고 깨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직 전후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기엔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단에도 때가 있느니라. 계속 지지부진하게 결단을 미루다간 일을 다 그르치게 되는 법이야.”
황제는 망설이는 자비에에게 단호히 일갈했다. 그때, 접견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자비에는 저 말고 다른 방문자가 있을 거란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기에 살짝 당황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아니다, 자비에. 너도 필히 만나야 할 사람이니라.”
문 너머로 들어가겠다는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지 얼굴을 확인한 자비에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희끗희끗한 푸른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힐리오스의 태양을 뵈어 영광입니다.”
대주교 아리엘.
성국에선 은연중 차기 교황으로 추대받고 있는 최고위 사제였다.
“어머, 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계시는군요!”
“오랜만입니다, 아리엘 대주교.”
아리엘은 반갑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자비에도 스치듯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자비에는 어릴 적, 그녀에 관해 황제에게 넌지시 들어 알고 있었다.
“내 아직까지 아리엘 대주교보다 성국의 광영에 관심을 가지는 신도를 보지 못했다.”
“교황보다 말입니까?”
“그래. 아리엘 대주교는……조금 남다르지.”
흘리듯 한 말이었지만 자비에는 그 대화가 기억에 남았다.
황제가 누군가를 그리 평한 건 대주교가 유일했던 탓이다.
“빨리 도착했군, 아리엘.”
황제가 너그러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가 앞에 있는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앉게나.”
“폐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그간 옥체 건강하셨습니까?”
자리한 착석한 아리엘이 황제의 안부를 물었다. 퍽 친근한 태도였다. 황제는 허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언제나 똑같지 않겠나. 악화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세.”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제가 한 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말만으로 고맙군. 세르잔은 괜찮은가?”
세르잔, 이윽고 황제가 교황의 이름을 언급했다.
교황은 이미 아스의 배 속에 들어갔지만, 아리엘은 조금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병상을 벗어나셨습니다. 먼 여정을 하기엔 아직 무리라 제가 대신 나왔지요.”
“허어, 그렇게 건강했던 세르잔이 벌써 그렇게 쇠약해졌다니 안타깝다네.”
“인간은 한 치 앞을 모르지요. 저도 언제 갑자기 쓰러질지 몰라서 근래 생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정한 대주교가 그런 걱정을 하기엔 이르지 않나? 성국의 기둥으로서 그런 걱정은 지양하도록 하게.”
“충언에 감사드리옵니다.”
아리엘은 후후,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녀를 보던 황제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스쳤다.
“……그렇네만, 이번 일은 짐 또한 예상을 못 했지.”
아리엘은 황제가 입에 올린 ‘이번 일’이 무얼 뜻하는 건지 알고 미소를 삼켰다. 미소를 지운 그녀는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사특한 마법사입니다. 일부러 엘라에게 접근하여 약혼을 한 게 틀림없습니다. 당장 처형식을 거행하시지요.”
단호하게 말하는 아리엘은 일견 단죄를 주장하는, 신앙심 깊은 신도처럼 보였다. 황제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대답이 나온 쪽은 황제가 아닌, 자비에였다.
“에스텔라 영애는 발레리안과 파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다면 돌연 파혼을 선언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 정체를 들켜 엘라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웠나 보지요.”
짐짓 모순을 지적하는 듯 보이지만, 아리엘은 황태자가 마법사를 비호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느새 마법사가 황태자까지 홀린 건가?
‘하긴. 황태자와 약혼하려고도 했었지. 요망한 마녀 같으니.’
이브 에스텔라를 향해 속으로 욕을 뇌까린 아리엘은 겉으론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마법사가 일전에 태자 전하께도 접근하지 않았나요? 일을 치기 전에 잡아서 천만다행이옵니다.”
“영애가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자비에가 바로 반박하자, 아리엘은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태자 전하, 부디 제국의 미래와 안전을 생각하시옵소서.”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황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주교의 말이 맞네. 마법사가 엘라에게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그 문제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지.”
“사실, 노아 에스텔라가 저에게 왔었습니다.”
황태자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자비에에게서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황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비에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에스텔라 영애가 폭주하기 전에, 이 편지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평범한 편지가 아니더냐.”
황제가 편지를 의아한 시선으로 보았다. 자비에는 아리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혹시 대주교. 이 편지가 뭔지 알아볼 수 있습니까?”
“글쎄요……. 노아 에스텔라가 누이를 살리기 위해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닐지요?”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무의미한 발버둥. 노아의 행동을 그리 단언하는 그녀의 태도가 묘하다. 자비에는 그러한 제 생각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접 살펴보게.”
황제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편지를 집어 든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성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그녀는 이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녀에겐 익숙한 기운이었다.
‘아스모데우스.’
거의 40년 넘게 같이 지내 온 악마의 기운을 모를 리가.
아스가 이브 에스텔라에게 보낸 편지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능숙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눈엔 그저 평범한 안부 편지 같군요.”
자비에는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던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녹안이 어둡게 침잠했다.
아리엘 대주교.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흠, 그럼 대주교의 뜻은 그러하단 말이지.”
황제의 물음에 아리엘은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알겠네. 먼 곳에서 손수 발걸음을 해 주어 고맙군.”
“태양을 뵈어 영광일 따름이지요. 언제든 불러만 주시옵소서.”
“허허, 누가 대주교의 말재간을 따라가겠나. 세르잔의 부재로 더는 성국을 비울 수는 없을 테니 속히 돌아가 보게.”
황제의 미소를 본 아리엘은 마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양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대로 나가려는 대주교를, 자비에가 붙잡았다.
“아리엘 대주교.”
막상 그녀를 불렀지만, 마땅히 추궁을 할 여지는 없었다. 자비에는 일순 머리를 스쳐 간 한 사람의 안부를 입 밖으로 꺼냈다.
“성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성녀의 안부는 예상했던 질문이었지만, 이 순간에 그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조금 당황한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을 입에 담았다.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고 요양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자비에의 낌새가 무언가 수상하다고 여긴 아리엘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덧붙였다.
“참고로 성녀님이 깊이 상심을 하신 터라, 외부 외출이나 외부인을 만나기 힘든 상태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행여 황제나 황태자가 성녀를 황궁으로 부를까, 꺼낸 말인 듯했다. 하지만 자비에는 그 말이 도리어 수상하게 느껴졌다.
“……성국에 우환이 많군요. 고민이 많겠습니다.”
“후후……. 원래 인생사가 그런 거 아닐는지요. 걱정해주어 감사합니다.”
접견실을 나가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보던 자비에는 미간을 좁혔다.
교황에 이어 성녀까지. 모두 요양 중이라는 점이 이상했다.
* * *
햇살이 따스하게 직광으로 내려오는 정원.
정원 주변에는 푸른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도열한 채 서 있었다.
그 햇살 아래에 금발의 미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이브.’
발레리안, 그의 손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