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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80화 (80/100)

80화

“아직 너랑 어머니랑 아버지가 잡혀가지 않은 걸 보면 희망은……. 아니, 조만간 잡힐 수도 있겠네.”

이브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아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그사이에 무슨 일이 또 생긴 거야?”

“응, 소년으로 위장한 악마가 내 폭주에 휘말린 선량한 민간인 행세를 하고 있어.”

“뭐?!”

노아가 기겁하며 그게 진짜냐고 재차 물었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처형일이 확실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확 앞당겨질 거라는 게 누가 봐도 자명한 사실이지.”

“뭐? 그러면 어떻게 해!”

노아가 기함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나뒹굴면서 거친 소음을 일으켰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에 감옥 간수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제 오라버니가 실수로 넘어뜨렸어요.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브가 깍듯하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사과했다.

“조심 좀 하지……. 그리고 면회 시간은 오래 못 준다. 원래도 안 되는 건데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을 넓게 쓰셔서 가능한 일이니까. 알겠느냐?”

“네, 감사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간수님들.”

툴툴거리며 핀잔을 건네던 간수들이 다시 제자리로 복귀했다.

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 평소와 다르게 간수에게 친절한 그녀가 이상했다. 노아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괜히 뻗대다간 맞기나 하지. 아픈 건 사양이야.”

사형수들이 처형대에 오를 때, 오히려 행복한 듯 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로 간수에게 맞다가 그 폭력에 해방감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한숨을 내쉬며 간수 쪽을 흘긋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무언가 은밀한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책이었다.

그러곤 재빨리 쇠창살 사이에 넣어 주었다.

“이게 뭐야?”

“유일한 구명줄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쓸모없는 종이책이 될 수도 있는 책이지.”

감옥에 들어오면서 간수들이 철저하게 소지품 검사를 했을 텐데, 이 책을 들고 온 게 용했다.

“이걸 어떻게 들고 왔담.”

그녀가 그 부분을 짚자, 노아가 으스대며 말했다.

“책을 펼쳐 봐.”

“뭐야…… 다 숫자잖아.”

“응. 숫자로 암호를 만들었지.”

“뭐?”

“내가 이 나라의 징세관이잖아. 숫자 몇 개 보여 줬더니, 세금 징수 기간이라고 세금책으로 착각해 주던데?”

간수들이 이렇게 허술했다니. 이브는 헛숨을 내뱉었다.

하긴, 숫자에 약한 그녀만 해도 숫자만 보면 뭔지 몰라도 일단 납득하고 넘어가는 편이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노아가 징세관이 될 수 있던 이유가 산수 쪽에선 명석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내가 숫자에 대한 해석을 적어 놓은 쪽지를 줄 테니까 시간 있을 때 읽어 봐. 들키진 말고.”

“여기에 그러면 그 무고의 증거가 담겨 있는 거야?”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를 바꾸는 일밖에 없으니까.”

“마법사의 무고를 증명하라고……?”

그것참, 희망적으로 들리네요.

“난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왜 나한테 주는 거야?”

“……내가 읽은 책이 아무래도 여길 가리키는 것 같아서.”

노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감옥 안을 향했다.

“들어 보니까 여기가 대대로 마법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다나 봐. 그래서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마력 차단용 특수 재료로 지어진 건물이라나.”

이브는 제가 갇힌 공간을 보았다. 겉보기엔 평범한 감옥에 불과했다. 한번 마법을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바로 단두대로 끌려가서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를 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뭔가가 있다는 뜻인가?’

정확히는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였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찾아낸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네가 갇혀 있던 동안, 나랑 어머니랑 서재를 아예 뒤집어엎었어.”

노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널 구할 수 있는 건 이런 방법밖엔 없으니까.”

이브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단서를 찾기 위해 짧은 시간 내에 서재를 얼마나 조사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고마워.”

막상 고맙다는 말을 하니, 낯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저쪽도 피차일반인지, 표정이 썩어 가고 있었다.

민망해진 이브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제 가서 아버지 병간호나 해. 여차하면 데리고 수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좋고…….”

“이미 저택 밖에 황실 기사가 쫙 깔렸거든?”

이브는 아차, 했다. 감옥 안에만 있었더니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수도를 벗어나 도망치기는 이미 글렀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노아의 말대로 해 볼 수밖에 없네.’

이브는 노아에게 받은 책을 품속에 숨겼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안부가 떠올라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혹시 발레리안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아?”

“그걸 내가 알겠냐!”

누가 누굴 걱정할 입장이 되는지!

자나 깨나 발레리안을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답답해진 노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간수의 시선을 의식한 덕분에 그의 의자가 뒤로 넘어지진 않았다.

이브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짜게 식은 시선으로 보았다.

* * *

교리실에 들어온 소년을 발견한 아리엘이 반색하며 물었다.

“어딜 그렇게 다녀오셨는지요?”

“응, 그 마법사 좀 처리하느라.”

아스의 눈이 곱게 휘었다. 마치 쓰레기를 처리했다는 여상한 말투였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던 아리엘은 일순 섬찟한 감정을 느꼈다. 누가 저 얼굴을 보고 대악마라 감히 추측할 수 있을까.

“이브 에스텔라를 죽인 건지요? 아스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면 분명 탈이 있을 텐데요. 그리고 곧 엘라가 깨어날지도 모르고…….”

아리엘은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보았다. 마법사는 그들의 일을 도모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엘라는 걱정하지 마. 그런 마력을 받아 냈으니 적어도 한 달은 몸져누워 있을 테니까. 그사이에 황제는 마법사를 처형할 수밖에 없을걸?”

“어머, 이미 다 작업을 해 놓으신 거예요? 호호, 아스도 참. 짓궂으시다니까.”

아리엘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하고 웃음을 흘렸다.

내부 분열.

아스모데우스, 그의 주특기였다. 100년 전, 마법사들이 악마 소환의 누명을 쓴 채 모두 처형당하게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인간은 단죄를 사랑하거든. 그 분별력 없는 눈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순간,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굴지. 그 우월감에 도취된 인간은 정말…….”

그가 황홀하다는 듯 손을 모으며 말했다.

“걸작이야.”

“……후후, 그렇지요.”

아리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천연스럽게 미소 짓던 그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성녀는?”

“성력을 최대치로 뽑아내고 있는데, 아직 부족하네요.”

“역시 성녀의 본체가 제물로 들어가야 한다니까.”

아스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일을 치면 성국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답니다. 당분간은 교황으로 만족해 주세요.”

“아, 그래. 교황의 부재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 병환으로 앓아누웠다고 신도들에겐 일러둔 상태인데, 그 핑계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겠군요.”

“그러게, 그는 이미 내 배 속으로 들어갔는데.”

아스는 콧노래를 불렀다.

성력이 내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줄이야.

그걸 천 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이 세상은 진즉 그의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아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며 교리실의 상석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지.’

일순 붉어진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에 진한 집착, 그리고 욕망이 피어올랐다.

“어쩔 수 없네. 내가 한동안 교황의 대역을 할 수밖에.”

그 말을 하자마자, 아스는 교황의 모습으로 변했다.

“역시 난 어린 게 좋은데.”

마법으로 거울을 띄워 놓은 아스는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리엘은 그의 변화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익숙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교황의 내연녀들은 어찌할까요? 계속 교황을 찾아서 성가신데 말이지요.”

“귀찮은데, 그냥 걔들도 내 입 속으로 넣을까?”

“후후, 좋아요.”

아리엘이 좋은 생각이라며 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교황의 내연녀들이 성금을 흥청망청 쓰고 있어서 거슬리던 차였다.

그때, 누군가 노크를 하며 교리실로 들어왔다.

“아……! 교황 성하! 드디어 병상에서 일어나셨군요!”

고위 사제가 교황의 모습을 한 아스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크음, 걱정해 줘서 고맙네. 무슨 일이지?”

아스가 능숙히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게, 황실에서 엄중한 사안으로 도움을 요청해서 직접 제도로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하께선 몸이 편찮으시니 아리엘 대주교님이…….”

“무슨 도움을 말하는 거지요?”

“마법사를 포획했다고 합니다.”

고위 사제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이 아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마법사라니!”

아스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 사태와 무관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아리엘은 아까의 대화로 이미 그가 벌인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웃음을 꾹 참은 그녀는 능숙히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허어, 난 아직 병환이 짙어 가지 못하거늘…… 정말 루시안에게 미안한 일이군. 대주교가 나 대신 가서 일을 신중히 살펴 주게나.”

루시안은 힐리오스 황제의 이름이었다.

완벽하게 교황의 탈을 쓴 아스가 짐짓 미안하다는 얼굴로 아리엘을 보았다. 그 시선을 읽은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채비를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고위 사제는 별 의심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먼 곳으로 파견을 나갈 때는 아리엘 대주교가 직접 움직이는 편이었다.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한 태도로 아스에게 인사했다.

“그럼 전 제도로 갈 채비를 꾸리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게나, 아리엘 주교. 이제 성국의 광영이 멀지 않았군.”

“예, ……성하.”

아리엘은 웃음을 꾹 참으며 교리실을 나왔다.

이제 성국의 전성기가 도래할 날이 머지않았다. 이 얼마나 황홀하고 멋진 말이란 말인가!

그녀의 흥분한 기색을 읽은 아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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