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제 정체를 폐하께서 아셨다고요?”
그래, 수도 한복판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자비에의 말을 느리게 되뇌던 이브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만약 이게 게임 속 세상이었다면 그녀 앞에 시스템 창이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게임 오버, 배드엔딩 루트로 진입합니다.]
따위의 붉은 글씨가 뜨고, 바로 엔딩 장면이 보이지 않을까. 그 엔딩 장면은 단두대 혹은 화형대에 오르는 장면이겠지.
“아…… 다 끝났다.”
이브는 힘없이 풀썩 드러누웠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자포자기였다.
“그래서 제 처형일은 언제라고요…….”
힘없이 질문하던 그녀가 이어서 중얼거렸다.
“처형당하기 전에 가족들 얼굴은 보게 해 주나요. 아닌가, 다들 함께 단두대행인가……?”
그 와중에 마법사의 가족들은 다 함께 처형당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자비에가 입을 열었다.
“무고는 주장하지 않을 겁니까?”
“주장해 봤자, 의미 없는 발버둥만 될 테니까요.”
이브는 그걸 몰라서 묻냐는 듯 자비에를 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살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살고 싶어서 나딘으로 도망친 사람이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국에선 저 같은 존재는 벌레만도 못하잖아요. 벌레가 죽이지 말라고 발버둥을 쳐 봤자, 누가 들어주기라도 한다던가요? 끝내 죽잖아요.”
이브의 서슴없는 발언에 자비에가 표정을 굳혔다.
“만약 폐하께서 죽이고자 결정하셨다면, 영애가 정신을 잃었을 때 모든 게 끝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그것참, 희망찬 사실이다.
어차피 황제가 알게 된 이상, 그녀는 자구책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사 황제가 함구해 준다고 해도.’
그녀가 마법을 쓰는 장면을 본 기사들이 여럿이었다. 본디 비밀이란 건 새어 나가기 마련이고, 황제는 그녀를 처형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비밀이 밝혀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나날을 상상하면 기가 쭉 빨렸다. 이미 발레리안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던 과거를 떠올리면 더 사양하고 싶었다.
돌아누운 그녀가 완전히 희망을 버린 듯한 모습을 보이자, 자비에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밤마다 사라지던 제국민의 수가 줄어든 이유가, 영애에게 있다고 폐하께 아뢰었습니다.”
이브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비에를 보았다. 자비에가 황제에게 악마를 처단했던 사람이 그녀라는 걸 알려 주었다는 뜻이었다.
“아……. 알고 계셨어요? 그러면 왜…….”
자비에가 자신이 밤마다 악마를 죽이고 다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왜 묵과하고 막지 않은 거지?
그 해답은 금방 나왔다.
“전하께선 제가 악마를 죽이길 바라셨네요.”
‘제국민의 목숨이 중요하니까.’
자비에가 황태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공익’이었다. 마법사의 힘이라도, 제국민을 해치는 이를 제거해 준다면 눈감고 방임하는 것이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다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그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그렇게 죄인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정작 감옥에 갇힌 사람은 전데요.”
“그래도 그걸 알고서 영애를 위험에 방치한 건 마땅히 사과해야 할-.”
“만약.”
그녀가 자비에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그에게 사과를 받을 입장이 되지 못했다.
“막으셨어도 나갔을 테니까, 그런 사과 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폐하를 설득해 주신 거 아닌가요?”
자비에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 폭주의 상황에서 그녀 자신이 당장 처형당하지 않았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정확히는…… 영애가 그 자리에서 죽지 않게만 막았습니다.”
그녀가 죽지 않았기에 가족까지 죽음을 면한 것이리라.
“전하께서 제 은인이네요.”
이브의 말에 자비에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은인은 발레리안입니다. 만약 그가 이브의 폭주를 잠재우지 못해 죽은 사람이 생겼다면 제 설득도 통하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발레리안……. 그녀의 폭주를 막느라 정신을 잃었다고 하지.
‘부디 금방 깨어났으면 좋겠는데.’
대체 얼마나 큰 마력을 잠재웠길래 세계관 최강자까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브는 일순 에스텔라 서재에서 보았던 마법 약초서를 떠올렸다.
[카빌라.
세간엔 영약, 불로초로 알려진 약이지만, 사실 이 약초의 진짜 효과는 몸속에 있는 마력을 극대화하는 것에 있다.
특히 그 힘을 각성하지 않은 마법사가 복용할 시, 잠재된 마력이 개방되고 극상의 효과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 전설의 약초를 먹는다면 바로 대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항설이 있는데, 사실인지 누가 간증 좀 해 주면 고맙겠삼. ^^]
설마, 그녀는 그제야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어쩌면 카빌라 영약이 그 막대한 마력의 원인이 된 걸 수도 있다고.
그녀를 보던 자비에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현재 자비에는 에스텔라 영애가 갑자기 폭주하게 된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서면 보고로만 들었을 뿐. 이브가 대답했다.
“발레리안에게 접근했던 소년, 알고 계세요?”
“네,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 소년…… 아니, 그 악마가 들고 있던 책이 제 마력을 강제로 끄집어 당겼어요.”
“악마……?”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 노아 에스텔라가 악마의 소행일 거라며 편지를 가져왔다. 이브 에스텔라가 그 편지를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며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노아가 들고 온 편지에는 평범한 인사만 적혀 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이상하다.’
노아 에스텔라가 아무 구명줄이나 잡겠다고, 집에 돌아다니는 편지를 자신에게 건넨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다. 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자비에가 그 의문을 꺼내려던 순간,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중 선두에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자비에를 막아섰다.
“전하, 그곳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무슨 일이지? 클라인.”
짧고 붉은 머리, 갈색 눈을 가진 로건 클라인은 이브도 아는 인물이었다. 현 황실의 기사단장이자 황태자의 직속 기사였으니.
“마법사의 폭주 때 휘말린 민간인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상태는 어떠하지?”
“한쪽 눈을 잃고 팔이 절단된 상태라고 합니다.”
“……누가, 누가 다친 건데요?”
이브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득달같이 물어보자,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로건 클라인의 눈빛에 멸시가 서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그의 모습에 자비에가 입을 열었다.
“누구라고 하지?”
“……그때, 발레리안 루드비히 경에게 길을 물어보던 소년이라고 합니다.”
자비에의 표정이 굳었다.
이브는 바로 누군지 알아차렸다. 환상에서 나온 악마였다. 아마 그 악마가 그녀에게 아론 로만이라는 수신인을 적어서 편지를 보낸 거겠지.
‘처음부터 이럴 속셈으로 나를 불러들인 거야.’
이브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비에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하아, 아이의 상태를 한번 보러 가야겠군.”
“잠시만요!!”
이브는 쇠창살 틈으로 팔을 넣으며 휘적거렸다.
“제가 폭주할 때! 주변에서 책을 발견하지 않았나요?!”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했던 자비에는 이브의 물음에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자비에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그녀가 악마라고 주장한 소년이 그녀의 마법으로 불구가 되었다. 그건 충분히 그녀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 일이 일단락되었을 때, 확인된 특이점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방이 소나기라도 내린 듯 질퍽한 땅.”
“이럴 수가…….”
이브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막상 소년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손 놓고 감옥에만 있으려니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졌다. 그러나 이미 자비에는 기사들과 훌쩍 떠나 버린 뒤였다.
“……휴, 어떡하지.”
그대로 소년과 자비에가 만나면, 자비에를 해칠 수도…….
‘아니야, 발레리안이랑 나를 동시에 불능 상태로 만든 악마야.’
모략에 능숙한 악마였다. 여태까지 만났던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그러면 자비에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칠 확률은 희박했다. 이브는 그 점이 다행스럽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인간의 관계성까지 이용할 수 있는 악마는 더욱 위험했다.
* * *
“내가 언제 이럴 줄 알았지…….”
면회를 온 노아는 이브를 보자마자 비아냥거렸다. 말의 내용과 달리 말투는 여느 때보다 시무룩했다. 늘 한량처럼 놀고먹다 보니 번지르르했던 얼굴도 거칠해져 있었다.
이브는 얄밉기 그지없던 그가 초췌해진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지만, 더 중요하게 할 말이 있었다.
“아직까지 도망 안 가고 뭐 했어?”
“이제 그 말도 짜증 나려고 한다. 그만해.”
이미 도망가지 않은 사람한테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황태자의 배려로 주어진 특별 면회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던 탓이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여기 오겠다고 난리 치시는 거, 간신히 막았어. 아버지는 네 소식 듣자마자 쓰러지셨고.”
“몸은 괜찮으시대?”
“그냥 쉬고 계시지.”
사실 예상했던 반응이긴 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를 데려오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고마워.”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면 ‘이러니까 미리 황제를 죽이자고 하지 않았니!’ 하고 난리 치실 게 분명해.”
“안 그래도 그 얘기 듣고 오는 길인데?”
노아는 신통하다는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그의 표정에 이브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