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야, 야! 정신 차려!”
노아가 쉴 새 없이 어깨를 흔들어 대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 이브는 눈을 끔뻑거렸다.
이브는 제가 서 있는 카펫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망연히 바라보았다. 얼굴도 축축했다. 가만 보니 이 물들이 자신의 눈물이었다.
“야! 너 괜찮아?”
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브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분명…… 발레리안이었어.”
그 환상 속엔 발레리안이 죽는 장면이 있었다.
‘악마의 협박장이야.’
그 경고를 편지에 환상 마법을 걸어서 보여 준 것이다.
이브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편지지만, 방금 그녀에겐 최악의 순간을 보여 주었다.
“달이…….”
그녀는 문득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에 환상에서 보았던 달이 떠 있었다.
초승달,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생김새도 똑같았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발레리안이 저택을 나선 지 이미 두 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그녀는 급히 채비를 꾸렸다.
“야, 그 상태로 어딜 가!”
저택을 나가는 이브를 노아가 붙잡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이브는 말없이 노아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뛰었다.
“에스텔라 영애,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평소에 밤마다 몰래 빠져나오던 출구로 나왔는데, 그녀를 발견한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섰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발레리안이 기사들에게 그녀가 이쪽으로 몰래 나간다고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이브는 어쩔 수 없이 주먹을 쥐었다. 정체를 들킬 수는 없기에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사람이 기절할 만큼 마력을 조절할 자신도 없었고.
그녀는 빠르게 움직이며 기사들의 목덜미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영애! 억!”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었다간 발레리안에게 죽을 목숨이었기에, 기사들은 무력하게 그녀의 손날치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웬만한 기사들보다 힘도 강했다.
“휴, 남주랑 대적하려면 이 정도 능력치는 가져야 하나 보다.”
이브는 쓰러져 널브러진 기사들을 보며 손을 탁탁 털었다. 너무 손쉬운 결말이었다. 이브는 다시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오늘, 발레리안이 제도 순찰 순번이었지.’
그러면 지금쯤 발레리안이 수도에서 순찰을 돌고 있을 터였다.
‘……제발 무사하길.’
그녀가 본 환상 또한 수도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작은 소년이 발레리안에게 접근하여 기이하게 생긴 책을 보여 주었다. 그 책에서 뱀이 나와서 발레리안을 물었고, 뱀에게 물린 그가 허물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연했다.
‘발레리안!’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브는 곧바로 골목 뒤에 숨었다. 마력을 감추는 건 잊지 않았다.
지금 수도에서 순찰을 도는 발레리안은 악마의 기운을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엘라의 힘을 은은하게 방출시키는 상태였던 탓이다.
‘악마의 유인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만일 릴리트처럼 자신을 유인한 거라면 바로 얼음 화살을 꽂아 주겠노라 결심했다.
‘발레리안이 준 영약 때문일까.’
이브는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악마들을 이리 손쉽게 처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골목 틈새로 숨어 가며 발레리안의 뒤를 쫓을 때였다.
“저기, 형아.”
어떤 소년이 발레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를 불렀다.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의 소년은 양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잃었는데 어디로 가야 해요?”
이브는 그 소년의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렸다.
‘환상에서 나왔던 그 소년이다!’
눈앞의 소년은 책을 들고 있었다. 책마저 환상에서 소년이 들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계속 상황을 관망했다.
환상만 믿고 곧장 저 소년을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악마가 무고한 소년을 미끼로 썼을 거란 가정도 해야만 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이 상황이 미치도록 답답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집 주소를 적었는데-.”
소년이 책을 펼치려던 순간이었다.
이브는 반사적으로 달음박질하며 그 책을 낚아챘다.
“아앗! 내 책!!”
소란을 듣고 온 기사들이 발레리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이상한 사람이 내 책을 뺏었어요!”
소년이 이브에게 삿대질을 했다. 현재 이브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 나온 걸 리안한테 들켰다간……!’
이브는 제 정체를 들키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얼굴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이미 정체를 들킨 걸까?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차라리 이 책을 들고 도망갈까?’
하지만 악마일지도 모르는 소년과 발레리안을 이대로 두고 자리를 떠나기엔 마음이 걸렸다.
한편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발레리안은 그녀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여기서 이브를 부르면.’
황실의 귀에 들어갈 테고, 이브는 의심을 살 터였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제가 빼앗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환상에서 본 책과 흡사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엔 평범한 책…….
“이브! 그 책, 어서 내려놔!”
발레리안이 다급히 외쳤다. 이브는 누군가 영혼을 끌어당기는 듯 아득해졌다.
정신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급히 제가 빼앗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 책 안에는 성경의 문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 책의 한 구절이 눈에 박혀 들었다.
네가 선함을 행하지 않으면 숨은 죄악은 모습을 드러낸 채 웃고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나 볼 법한 그 구절 아래, 뱀 그림이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뱀……?”
환상에서 보았던 그 뱀과 모양새가 똑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똑같았다.
-쉬이익.
튀어나온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손을 콱 물었다.
“……아!”
이브는 손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황급히 책을 놓았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브는 다시 책을 보았다. 덮인 책은 어느새 평범한 책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으, 응.”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이 상황을 보던 기사가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이브를 보며 다가왔다. 이브는 잠시 뒷걸음질을 쳤다.
‘몸이 뭔가 이상해.’
이브는 제 몸속에 있는 마력이 들끓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파도를 막고 있던 댐이 무너지고 범람한 것처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인 채 잔뜩 당황한 그녀는 이윽고 이상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었다.
‘이건 나랑…… 같은 방식이야.’
자신이 아론의 탈을 썼던 악마 구시온, 그에게 했던 것처럼.
악마가 그녀에게 같은 방식을 적용해 마력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잠깐, 오지 마!”
이브는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발레리안을 밀쳐 냈다. 그녀가 뿌리치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얼음 화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차르륵.
그 얼음 화살들은 이지를 잃은 사람처럼 이리저리 건물과 땅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으악! 다들 도망쳐!”
기사들은 기겁하면서 얼음 화살을 피하기 급급했다. 발레리안은 폭주하는 이브에게 달려갔다.
“이브!”
“으…….”
이브는 정신이 멍한 상태인지라 앞에 누가 왔는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몸속에 들끓는 이 기운이 잠잠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이성을 잃은 뒤, 눈앞이 까맣게 암전했다.
* * *
‘……일어나, 어서 일어나렴.’
‘마지막 남은 아이야, 거기 있으면 위험해!’
여자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이브는 헉하고 눈을 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삭막하기 그지없는 검은 천장. 그게 전부였다.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제 뺨을 후려쳤다.
-짝!
“……우씨, 더럽게 아프네.”
그럼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건데.
그녀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켰다. 발레리안이 준 카빌라 영약을 먹은 이래, 이런 컨디션으로 일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으…….”
온몸이 몸살이라도 걸린 듯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축 처진 기분으로 주위를 살폈다.
“뭐야…… 여기 꼭 감옥처럼 생겼네.”
“감옥, 맞습니다.”
어딘가 단정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자비에……?”
“우리가 이름을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진짜 자비에였다. 횃불에 비친 그의 녹안이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그리고 착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행위는 쇠창살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이브는 ‘이거 실화야?’ 하는 얼굴로 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은 쇠창살을 붙잡았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기억나지 않습니까?”
“네, 아무것도……. 으.”
이브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흐릿하게 기억이 일부 엿보였다.
‘그 뱀…….’
책에 그려져 있던 뱀이 그녀의 손을 물었고, 이후에…… 마력이 폭주했다.
뜨문뜨문, 조각난 기억 속에 발레리안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던 것이 떠올랐다.
“으, 다친 사람은 없나요……?”
“없습니다.”
휴.
그녀가 안도하기도 채 자비에가 말을 이었다.
“엘라가 혼신의 힘으로 영애의 폭주를 막은 덕분입니다.”
뭐?
발레리안이 내 폭주를 막았다고?
이브는 당황하여 곧장 물었다.
“그럼 리안은요?!”
그녀의 물음에 자비에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브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손을 떨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가까스로 물었다.
“저 때문에 잘못된 거예요……?”
“엘라의 힘을 갑자기 대량으로 쓰니, 몸에 무리가 왔는지 뻗은 상태입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랑 정면충돌을 했으니.”
“그럼 다치진 않았단 말인가요?”
자비에는 아까보다 더 갑갑하다는 시선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브를 물끄러미 보았다.
“걱정할 건 발레리안 쪽이 아닙니다. “
걱정할 쪽이 그가 아니라면……. 이브는 자신을 뚫어질 듯 응시하는 자비에를 마주 보며 멍하니 대답했다.
“저요……?”
“네. 폐하께서 영애의 정체를 눈치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