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길에는 나밖에 없네.’
원래 이 시간쯤이면 제도 거리가 한산하긴 해도 사람 한둘은 지나다니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실종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제도민들은 해만 지면 집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막상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으니 음산한 분위기가 흐르는 탓인지 오싹했다.
제도 내 기사들이 몇몇 돌아다니긴 했지만, 제도 거리를 완전히 샅샅이 살피기엔 부족했다.
골목길에 숨은 이브는 주변을 살폈다.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데…….”
악마의 발톱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브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제도를 순찰하는 기사들도 피곤한지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빨리 나타나라, 이 악마야.’
이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히 악마들을 처단하고 평화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악마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발소리와 철갑 소리가 들렸다. 이브도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물론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좁은 골목을 통해서 다니는 건 잊지 않았다.
“그깟 날붙이로 날 죽이겠다니, 크하하하!”
불에 탄 것 같은 검은 피부를 가진 악마가 가소롭다는 듯 낄낄거렸다. 인간으로 위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아선 하급에서 중급 악마였다.
그러나 급이 낮은 악마라고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 악마들의 힘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사들은 쉬이 악마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일반 날붙이론 강해진 악마를 죽일 수 없으며, 오로지 성수를 뿌린 검이나 성검만 악마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성수는 구하기도 힘들지.’
성국의 원조가 없다면 악마를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기사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성수를 가지고 있었는지 급히 검에 성수를 뿌렸다.
하지만 악마의 발톱이 더 빨랐다. 흉측하게 긴 발톱을 드러낸 악마가 빠르게 움직여서 성수를 낚아채곤 멀리 던져 버렸다.
“젠장!”
“크하하하! 그런 더러운 물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입이 찢어져라 웃던 악마의 눈빛에 돌연 기이한 광채가 흘렀다. 살기였다. 악마는 곧이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상급 악마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악마들은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들이 맥없이 밀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브가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연 후, 바닥에 쏟아 내며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이엘로]
바닥으로 흩뿌려지던 물들이 땅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어 물들이 얼어붙어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얼음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만 보일 정도로 작은 톱니였지만, 위력은 상당할 것이다.
‘저 다리부터 노리자.’
그녀는 아직 마법에 숙달하지 못했다.
파괴력은 굉장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런 먼 거리에서 악마의 목을 노렸다간 다른 기사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이브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악마의 모습을 쫓았다.
일단 움직임을 둔화시키려면 다리를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마법으로 형성된 마력 얼음들이 빠르게 악마의 다리를 향해 쇄도했다.
“크아악!”
악마가 돌연 상처 난 다리를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그녀의 마력 얼음이 적중하면서 악마의 마력을 빼앗은 것이다. 그 다리가 점차 재가 되어서 사라지고 있었다.
‘집중하자.’
이브는 자신이 쏘아 보낸 얼음 주위로 수분을 더 모아서 악마의 마력 축출을 극대화시켰다. 악마는 재생 능력이 워낙 뛰어나 순식간에 죽이지 않으면 금방 되살아나기 일쑤였다.
그녀는 얼음 톱니를 노려보며 집중했다.
“하…….”
이어 묘한 탈력감이 밀려와 숨을 뱉었을 때.
“크아아악!”
릴리트와 같이 흔적도 없이 재가 되듯 사라지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도 성공했어!’
이브는 흘러나오는 기쁨의 미소를 삼켰다. 그러다 누가 그녀를 발견할세라 골목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밤길을 돌아다니며 악마 소탕을 이어 나갔다.
“휴, 생각보다 쉬운데?”
그러는 새 며칠이 흘렀다.
그녀가 부지런히 밤마다 제도를 누비고 다닌 덕에 실종 사건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몰래 악마들을 처단했던 덕분이다.
‘발레리안이랑 안 마주치려고 어찌나 용을 썼는지.’
악마를 죽이는 일보다, 밤 순찰을 나온 발레리안과 마주치지 않는 게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루드비히 공작을 찾아가 발레리안의 일정까지 받아 내어 그 시간을 피해 돌아다녔다.
발레리안의 외부 스케줄을 요청했을 때, 이미 공작은 그녀가 무슨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차린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녀 주위에는 루드비히의 기사들이 조용히 잠복하고 있었다. 이브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거부하진 않았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거든.’
여차하면 저 기사들이 도와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하면서도 공작님께 감사했다.
그러던 중 아침부터 저택에 방문하겠다는 발레리안의 연통을 받은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나?’
바쁜 발레리안이 아침부터 오겠다고 한 이유가 가늠되지 않았다. 이런 아침에 온다는 건 필시 그녀에게 용건이 있다는 뜻인데.
문제는 그녀에게 지금 켕기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브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기다렸다.
발레리안은 굳은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으악, 또 저 표정!
그 표정을 본 이브는 이 상황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리란 걸 직감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브,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는 일단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브, 나한테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미안…….”
그녀는 그의 말에 곧장 사과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리안이 더 고생하는 것 같아서…….”
“엘라로서 당연한 의무야. 별로 힘든 일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그 엘라의 의무에 마법사의 정체를 숨기는 건 없잖아. 차라리…….”
이브는 입을 열었다.
“리안, 그냥-.”
말을 잇던 그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현실적으로 제 정체를 밝히라는 건 불가능했다. 가족의 목숨까지 달린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삼킨 말이 무언지 파악한 발레리안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절대 안 돼. 누가 이브의 정체를 밝히려고 해도-.”
그의 손에 들린 잔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내 손으로 끝장낼 생각이니까.”
그는 그녀에게 밤마다 악마를 죽이러 다니는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한 차례 더 당부한 뒤, 저택을 떠났다.
그녀는 슬쩍 창밖을 보았다. 경계가 더욱 삼엄해진 게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였다.
“저 경계를 뚫고 나가는 게 가능할까…….”
“절대 못 나가지.”
언제 들어왔는지 노아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시선도 이브를 따라 창밖을 보고 있었다.
“너 무슨 죄 지었냐?”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를 잠시 흘긋 보던 이브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죄지은 거 맞네, 역시. 야, 너한테 편지 왔어.”
노아가 그녀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다. 저한테 편지가 왔다는 말에 이브는 무심코 그의 손에 있던 편지를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나 노아의 손이 더 빨랐다. 그가 그녀의 손을 피하자, 이브가 한심하다는 듯 뇌까렸다.
“뭐 하자는 거야? 장난할 기분 아니야.”
노아 역시 장난은 아니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내가 미리 열어 봤는데 빈 편지였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누가 심심했나 보네. 그런 장난 편지를 보내고.”
이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장난으로 백지 편지를 보내. 유일하게 발신인은 적혀 있는데…….”
노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발신인이 누구였는데?”
“아론 로만이었어.”
“……뭐?”
이브는 노아의 손에 있는 편지를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혹시 아론이 살아 있는 걸까?
어쩌면 구조의 신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이미……. 이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론 로만은 죽었어. 이 편지가 질 나쁜 장난이거나 아니면…… 악마의 편지겠지. 혹시 모르니까 그 녀석한테 줘 보자.”
“리안을 실험군으로 써 보자는 얘기야?”
“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노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브는 그를 샐쭉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리안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브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편지에 마법이라도 걸려 있다면, 발레리안이 위험해질 것이다.
특히 악마의 소행이라면, 그녀보단 엘라 쪽을 노릴 테니까.
“……하여간 그 녀석 걱정은 끔찍하게 한다니까.”
“줘 봐.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하지만 노아가 쉬이 편지를 내놓을 생각이 없는지 미적거리자, 이브는 어쩔 수 없이 주먹을 슬쩍 내보였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고 줄래, 그냥 줄래?”
“그 녀석은 이런 폭력배가 뭐가 좋다고.”
“물론 리안 앞에선 주먹을 쓰진 않지. 그래서 맞고 싶다고?”
“어휴.”
노아는 고개를 저으며 편지를 내밀었다. 이브는 그가 들고 있던 편지를 냉큼 받았다.
“정말 아무 내용도 없잖아……?”
그의 말대로 편지는 백지였다. 혹시 몰라서 편지 봉투도 살폈지만, 릴리트가 보냈던 악마의 표식도 없었다. 노아가 긴장 어린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뭔데, 말이라도 해 봐. 이번에도 마법이 걸려 있어?”
“잠깐만 기다려……. 윽!”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지면서 현기증이 확 밀려왔다. 이브가 휘청거리자, 기겁하는 노아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어떤 장면이 그녀의 눈앞에 잡히더니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레리안.’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