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브는 그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
“전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런데 그…… 공작님은 언제 아셨나요?”
“대략 넉 달 전이군.”
“넉, 넉 달이나요?!”
이브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안이 제 정체를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대체 언제 알게 되신…….”
설마 제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는 건 아닐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공작은 단조로운 말투로 툭 뱉었다.
“황태자와 약혼 발표를 할 때 눈치챘다.”
그러곤 그녀가 걱정하는 바를 눈치챘는지 옅게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이 엘라의 힘을 무의식적으로 방출했을 때, 기운이 흐트러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너였지.”
아……. 이브는 탄식했다. 하필 그때 얘기가 공작님의 입에서 나오다니. 면목이 없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때 일은 죄송합니다…….”
공작은 이해한다는 듯 눈짓했다. 이브는 그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송구스러웠다. 한편으론 제 정체를 함구해 준 공작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마냥 차갑고 딱딱한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녀의 정체를 알아챈다면 가차 없이 그녀를 죽일 거라 생각했다. 일전에 가문의 재산 절반을 증여해 주겠다는 제안을 할 때부터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긴 했었다.
루드비히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네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거다.”
“…….”
맞는 말이었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이브는 입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이미 자비에가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모를 수가 없는 눈빛이었어.’
유리가 제 정체를 폭로하던 그때.
다들 유리를 지탄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이브를 보던 사람이 단 두 명 있었다.
바로 자비에와 발레리안.
‘하필 그 둘한테 들키다니…….’
가장 무마하기 어려운 인간들이었다. 한편으론 자비에가 조용한 것이 의아하기도 했다.
“사실…… 은요.”
이브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녀의 기색에서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루드비히 공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가 알고 있나?”
“네…… 황태자 전하요.”
공작은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브는 그의 얼굴에서 ‘노답’이란 글자가 읽히는 듯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이 꽤나 고생을 하겠군.”
그의 예상대로였다.
한편, 황궁에 온 발레리안은 자비에와 참모실에 마주 앉았다. 자비에는 싸늘히 굳은 시선으로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잇따라 일어난 실종 사건과 악마 출현의 증거가 적힌 보고서였다.
“발레리안, 이 사태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하지만 이 일이 이브가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네 말대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마법사는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비에도 그녀가 무고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심증이었을 뿐.
다른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부터 하옥하라 했을 터였다.
‘특히 폐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사태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악화될 게 분명했다. 발레리안도 그 점을 인식한 듯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어 결심을 마친 듯 어두운 조명 아래 발레리안의 눈이 여느 때보다 선득하게 빛났다.
“그래, 그럼 이브가 한 일이 아니라는 증거만 찾으면 된다는 말이지.”
그 모습을 본 자비에는 이마를 짚었다. 도무지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어떻게 찾아낸다는 건지.’
이 녀석은 에스텔라 영애와 엮이기만 하면 이성적 사고 기능이 마비되는 듯했다. 며칠 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발레리안은 그걸 증명하기 위해 에스텔라 영애를 만나지도 않고 낮에는 참모실, 밤에는 제도를 돌아다니며 악마 출몰에 대한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지? 그동안 제국민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자비에는 보고서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가득했다. 이대론 사망자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악마 소환 포털이라도 발견된다면, 어쩔 수 없이 난 에스텔라 영애를 구금해야만 해.”
“이브가 그럴 리 없어.”
구금이라는 말에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살벌한 빛이 스쳤다.
“내가 찾아낼 테니 그 전엔 모른 척해, 자비에.”
* * *
밧줄에 묶인 채 누워 있는 유리를 아리엘이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았다.
“악마가 부족하지 않을지요?”
“이미 제국민은 밤길에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걱정하지 마, 아리엘.”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스모데우스가 방긋 웃었다.
“이제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성국에 매달리게 될 거야.”
그 말에 아리엘은 안심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신이 우리에게 성녀를 내려 준 거였군요.”
“100년 전엔 마법사들이 방해를 해서 실패했지만, 이번엔 성공할 거야.”
아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문득 한 사실을 떠올린 아리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녀 이유리가 이브 에스텔라가 마법사라고 주장한 것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걸 최근에 아스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된 상태였다.
“그 마법사 계집은 어떻게 하지요?”
“아아, 그것도 다 생각이 있지.”
아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조금만 기다려.”
* * *
집무실에서 공작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이브는 해가 저물도록 공작 성을 떠날 수 없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브는 저녁이 되어서야 발레리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창밖 너머, 공작 성으로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을 아래 덧그려진 그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공작 성 응접실에서 이브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선 좀 전까지 드리웠던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브.”
그러나 웃음꽃이 피어있던 그의 얼굴에 수심이 스치는 걸 목격한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공작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발레리안이 꽤나 고생을 하겠군.”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황태자가 비밀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네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지?”
“설마…… 발레리안이…….”
이브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리안.”
그녀의 말에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질문했다.
“이브, 아직 말하지 않은 비밀이라도 더 있는 건 아니지?”
“그냥…… 모든 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린 그의 시선이 멈칫했다.
“이브.”
그가 다정히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타고 엘라 특유의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몸을 맴돌았다. 그녀는 그를 묘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신기하게도 그의 온기가 퍼지자마자 초조했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해사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별일 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발레리안은 그녀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브를 보니까 너무 좋아.”
거짓말.
이브는 그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속으로 꾹 눌러 담았다.
그의 딴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고 싶은 듯했지만, 그를 오래 보아 온 이브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다는 걸.
분명히 그녀와 관련하여 복잡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공작의 말을 떠올린 이브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구태여 말을 보태 봤자 이 사건을 그녀가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
‘아니지.’
어쩌면……. 이브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릴리트를 죽였던 마법이라면, 어쩌면 자신이 나서서 악마들을 죽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더 이상 아론 같은 무고한 희생양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물론 이런 대의에 앞서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 사태를 지속시키는 건 위험해.’
이미 자비에에겐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들킨 상태.
훗날 제위에 오를 그에게 이 사실을 들킨 건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자비에의 성격상 이 상황을 계속 묵과하지 않을 테고, 상황이 더 악화되면 그녀를 감옥에 가둘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자비에가 외려 의아스러운 상태였다.
‘차라리 나라도 나서서 악마들을 응징하는 거야.’
제도에서 실종 사건이 불식된다면, 그녀가 오해받을 일도 발레리안이 그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 필요도 없을 터.
이브는 결심을 굳혔다.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그날 밤.
이브는 남몰래 저택을 빠져나왔다.
“……휴, 결심은 쉽게 했는데. 만만치 않네.”
첫 번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오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일전에 악마에게 협박을 당해 왔다는 거짓말을 뱉은 이후로, 발레리안이 지시를 내려 에스텔라 백작저엔 성기사와 루드비히 기사들이 사방에 깔려 그 경비를 뚫고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이것도 거짓말이라고 해명해야 하네…….’
제가 발레리안에게 했던 거짓말이 몇 개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이브는 새삼스럽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번, 이번 일만 다 마무리 짓고 발레리안한테 이실직고하자…….”
이브는 누가 듣지도 않는데 혼자서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 비슷했다.
‘보통 실종 사건이 밤에서 새벽, 그리고 수도 거리에서 일어났다고 했지.’
악마란 놈들은 자신들의 소행이란 걸 숨길 생각도 없는 듯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브는 천천히 수도를 거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