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으……. 머리 아파…….”
유리는 아픈 머리를 감싸 쥐며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러다 거추장스러운 느낌에 제 팔을 본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게 뭐야?!”
그녀의 팔에 이상한 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얼핏 피를 뽑는 호스처럼 생겼지만, 정작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거북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유리는 그 호스를 뽑으려고 했지만, 팔다리가 쇠사슬로 묶여 있는 탓에 쉽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몇 차례 시도하던 그녀는 제 팔만 아프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그녀는 뒤늦게 주위를 살폈다. 마치 독방처럼 생긴 게, 사람 냄새라곤 하나도 나지 않았다.
“헉, 이게 뭐야?”
그녀는 제 아래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낯선 문양을 보고 놀란 게 아니었다. 이 문양이…….
‘피로 그려진 거잖아!’
유리는 진저리 치며 몸을 떨었다.
“일어나셨군요?”
그때 무심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유리는 고개를 돌려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노트를 든 아리엘 대주교가 그녀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컨디션은 어떠신지요?”
“아리엘 대주교…… 이게 뭐예요?”
“대답. 내가 묻잖아.”
성녀를 보는 아리엘의 안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급격하게 짧아진 말투에 유리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왜, 왜 그러세요? 그리고 여긴 어디고요!”
막상 입을 열고 나니 유리는 제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종래엔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지금 이러는 거 리안이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짝!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더니 유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맞은 뺨이 화끈하고 얼얼했다.
“지금 나…… 때렸어요?!”
유리는 울먹거리며 아리엘을 노려보았다. 믿기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 앞에서 친절하고 포근한 미소를 짓던 대주교가……. 다른 사람이 된 듯 돌변하다니.
“당신이 뭔데 날 때려!! 성녀를 이렇게 막 대해도 돼?!”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유리는 감정이 북받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어쩜,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야……. 악을 쓰는 꼬락서니를 보니 상태는 괜찮은 모양이구나.”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아리엘은 다시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유리는 울컥했다. 마치 실험군을 대하듯 저를 취급하는 게 아닌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빨리 풀어 줘!”
“흐음, 소중한 제물을 놓아줄 수는 없지.”
그때 아리엘의 뒤에서 명랑하면서도 밝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는 성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대충 훑으며 상태를 확인한 뒤, 말했다.
“이번 대 성녀는 성력이 꽤 많네.”
“어머, 그래요? 하는 짓은 가벼운데 알맹이는 다른가 보네, 호호호.”
아리엘은 기꺼운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푸근한 모습으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유리는 더욱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슬슬 아이들한테 성력을 나누어 줘도 되겠어.”
아스는 유리와 눈을 마주하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성녀님, 앞으로도 잘 부탁해.”
* * *
그로부터 며칠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이브는 제 쪽에서 직접 가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한 발레리안이 백작저로 오는 바람에 공작 성이 아닌, 저택에서 만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노아가 꼴값들 떤다는 눈길로 꼬나보는 게 거슬렸지만, 이브는 발레리안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리안,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발레리안과 마주 앉은 이브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햇살처럼 뽀얗고 부드러웠던 피부가 다시 묘하게 까칠해져 있었다. 다른 걱정거리가 생긴 게 분명했다.
‘누구야, 리안의 피부를 망가뜨린 놈이.’
이브는 흥, 콧김을 뿜으며 씩씩거리다가 곧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간 그의 피부를 망가뜨린 주범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오랜만에 훈련에 집중했더니 몸이 피곤했나 봐.”
여상하게 웃으며 대꾸한 발레리안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이브.”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상황을 모르는 제삼자가 본다면, 먼저 떠나는 사람이 이브 쪽이라고 오해할 만큼, 발레리안의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바쁠 땐 내 쪽에서 찾아갈까?”
“아니, 이브는 꼼짝 말고 여기 있어. 날이 어두워지면 절대 나가지 말고.”
발레리안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행여 그녀가 밖으로 나가면 쫓아와서 다시 집 안으로 들이밀 것 같은 기세였다.
“으, 응.”
이브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보도된 신문을 본 이브는 얼굴을 굳혔다.
[제도에서 의문의 실종 사건 잇따라 발생, 자비에 루 힐리오스 황태자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사를 명했다고 알려져……(중략)]
밤마다 제국민이 사라진다는 소식이었다. 신문사들은 그 내용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기존에도 제도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사건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대부분은 원한 관계 혹은 채무 관계가 얽힌 민간 범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밤중에 사라진 실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이브는 그게 누구의 소행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악마의 짓이 분명해.’
기실, 제도 사람 중에 이 실종 사건에 악마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이미 암암리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는 것이리라.
제국 신문사들도 악마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황실에서 제도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번엔 뭔가 심상치 않아…….”
가끔 하급에서 중급 악마들이 살육에 미쳐 제도 사람을 해치는 일은 이전에도 간간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렇게 꾸준한 양상을 띠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 때문에 바쁘다면.’
그녀 쪽에서 발레리안을 찾아가는 것이 민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브는 여러 차례 그를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접기를 반복했다.
“아가씨, 루드비히 공작 성에서 연통이 도착했습니다.”
집사장에게 편지를 받은 이브는 그 자리에서 발신인을 확인했다. 당연히 발레리안에게 온 편지라고 생각했는데, 제 예상이 빗나갔다. 봉투 겉면엔 발신인, 레인 페드로라고 적혀 있었다.
즉, 공작의 보좌관이 적은 편지였다.
‘그럼 루드비히 공작님이 보냈다는 건데?’
좀처럼 예상이 되지 않은 편지의 내용에 이브는 긴장 어린 시선으로 편지를 열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빠른 시일 내에 루드비히 공작 성에 방문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마차 대기 시켜 줘.”
지시를 내리고 곧장 일어난 이브는 서둘러 공작 성에 갈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잠시 뒤, 공작 성에 도착한 이브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를 먼저 맞이한 건, 루드비히 공작의 보좌관 레인 페드로였다. 그녀를 본 그가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에스텔라 영애. 공작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네…….”
레인 페드로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안내했다. 이브는 어색한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나를 개인적으로 부르시는 건 처음인데.’
며칠간 계속 루드비히 공작 성에 방문했지만, 그의 쪽에서 그녀를 부른 적은 없었다.
집무실 앞에 선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레인 페드로는 그녀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노크하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브는 생각에 빠졌다.
‘공작님이 날 왜 부르신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닐 것 같았다. 그녀가 저지른 업보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브는 눈을 질끈 감고 노크했다.
에라이, 어차피 매 맞을 거 빨리 맞고 말자!
“안녕하세요, 공작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간 이브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공작은 한창 집무를 보고 있었는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서류들에는 대부분 금색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에서 온 서류라는 뜻이었다.
“보다시피 격식을 차릴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용건만 말하도록 하지. 요즘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나?”
“실종 사건이요?”
“그래, 이번에 제도에서 악마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안경 너머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첨예하게 빛이 났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공작이 그 일에 대한 원인을 그녀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설마.
루드비히 공작도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여기서 섣불리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이 바쁜 건가요?”
“그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브 에스텔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게 아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역시 알고 있는 거구나.
이브는 쉽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자신은 단순히 마법사라는 사실만으로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