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뜻밖의 방문에 놀란 얼굴로 마중을 나온 발레리안을 향해 이브가 활짝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하는 그녀를 발견한 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이브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발레리안은 무척 놀란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이 상황을 무척이나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녀 쪽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것.
그 일련의 모습에서 이유를 짐작한 그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날 보러 와 준 거야?”
“응.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매일 보러 올 생각이야.”
이브는 아침부터 루드비히 공작 성에 방문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꼬박꼬박 그를 찾아올 생각이었다.
‘이 정도 정성이라도 보여야지…….’
그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그에게 상처 주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런 걸로 풀릴까 싶긴 한데. 잠시 회의적인 생각을 한 이브는 침울해졌다.
그러곤 이 사달의 원인인 부모님이 한가롭게 티타임이나 즐기고 있을 걸 생각하니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럼 내 마음이 풀리면 더 이상 오지 않는 거야?”
그의 물음에 이브가 멈칫했다. 사실 여기서 모범 답안이 무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잘 알았다.
365일 동안 매일 빠트리지 않고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발레리안을 보러 간다?
아무리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건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집에 있는 쪽을 선호하는 자신이 그걸 해낸다는 건 천지가 개벽할 기적이지.
“응……. 나도 사람인데 쉬어야지.”
이젠 더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발레리안이 곧바로 서운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브의 마음엔 내가 그것밖에 되지 않아?”
이브는 제가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본데?’
그 일련의 모습을 눈에 담던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깔렸다.
이브의 성격상, 이 망설임조차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만약 이브가 저에게 마음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곧장 ‘내 마음은 그것밖에 안 되는데?’ 하고 가감 없이 속마음을 드러냈을 테니.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휘었다.
“괜찮아, 내 쪽에서 매일 찾아가면 되니까. 난 할 수 있거든.”
“……응.”
이브는 그의 화사한 눈웃음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한 번씩 훅 치고 오는 미소는 불가항력이었다.
‘만약 발레리안이 악마였다면.’
그녀는 속절없이 매료되어서 그에게 질질 끌려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쉬이 뿌리칠 수 없는 미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만 마, 이브.”
그녀를 담은 푸른 눈동자엔 채 숨겨지지 않은 진한 집착이 드러났다.
* * *
간만에 밖에서 하는 데이트라, 가볍게 산책부터 할 생각이었다.
‘일부러 코스까지 다 짜 왔는데…….’
하지만 이브의 야심 찬 데이트 계획은 꼬르륵 소리 한 번에 허물어졌다.
제 위장이 눈치 없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그녀는 발레리안의 이끌림에 따라 결국 레스토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뭐야?”
이브는 연이어 들어오는 음식들의 행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저번에…… 첫 이별을 고할 때도 이랬는데.’
발레리안도 같은 순간을 떠올렸는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최악의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 하거든.”
“……미안. 발레리안.”
이브는 다시 죄인 모드로 돌아갔다.
“평소처럼 리안이라고 불러 줘야지.”
“응, 리안.”
그녀의 모습을 보던 발레리안이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브가 나를 많이 기쁘게 해 줘야 하는 날인가?”
“그럼! 나만 믿어.”
이브는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 그를 기쁘게 할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연애에선 젬병이었다.
“저기요, 제가 그쪽한테 반한 것 같은데…… 혹시 나 만나 볼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대뜸 고백부터 내뱉었다.
무드도 없고 낭만도 없는 날것의 고백에 주위 사람들은 비웃으며 지탄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그녀의 고백을 받아 주었고 약혼까지 하기 이르렀다.
“진짜 그 녀석이니까 널 받아 준 거야.”
특히 노아가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땐 사이가 안 좋은 남매였기에 단순히 핀잔을 준 거라 무시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심심해서 추파나 던지는 사람의 멘트같지 않나.
발레리안이 그 고백을 왜 받아 준 건지 이해가 안 되긴 했다.
“이브가 날 어떤 식으로 기쁘게 해 줄지 기대되는걸.”
발레리안이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감돌자, 그녀도 마주 웃었다. 하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좀처럼 기쁘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고백을 받아 준 발레리안이라면……. 뭘 해도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녀는 작은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발레리안도 문득 과거를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그때, 이브가 나한테 처음 고백했을 때가 생각나.”
“그래? 나도 마침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이브가 야트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미소가 깨진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응, 정말 심각한 고백이었는 걸. 난 내가 이브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훗날 그 고백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았어.”
그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이브는 심각해졌다.
‘망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브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산해진미를 보며 포크질을 시작했다.
‘일단 먹고 생각하자…….’
원래 머리 회전은 음식이 들어가야 원활한 법이었다. 이브가 바쁘게 손과 입을 움직이며 음식을 먹는 것을, 발레리안이 흐뭇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라는 걸 모른 채.
이브는 먹으면서 그를 기쁘게 할 궁리를 하느라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잠시 뒤.
“벌써 다 먹었어…….”
이브는 아연한 눈빛으로 빈 접시를 보았다. 아직 어떤 식으로 기쁘게 해줄지 고민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발레리안의 접시는 깨끗했다. 그녀 혼자서 해치웠다는 소리였다.
이마저도 그때랑 상황이 똑같을 필요는 없지 않나.
“더 시킬까?”
발레리안은 뭐가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아니야…… 이러다가 해 저물겠어.”
먹는 걸로 데이트를 끝낼 수는 없었다.
“리안은 안 먹어?”
“아, 이브가 먹는 모습을 몰입해서 보다 보니 먹는 걸 잊어버렸네.”
그가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어……?”
이브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그걸 잊어버릴 정도면 별로 배가 고프진 않은 것 같아.”
“지금까지 배가 안 고프다고……?”
그녀는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해가 중천인데 배가 안 고프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이브는 아직도 그의 말이 남긴 여운에 젖어 있었다.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 시간까지 빈속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발레리안의 입에서 배고프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원작에서 엘라는 태양 빛을 자양분으로 힘을 쓴다고 했지.’
무슨 식물도 아니고, 태양 빛을 자양분으로 쓴담.
그녀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한 하늘에 태양 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의 강렬한 뙤약볕에 눈이 부셨다. 그 아래에 있는 그의 미모는 더할 것 없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발레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브는 늘 배가 고팠던 것 같네.”
“그게…… 정상인 거 아니야?”
“아니, 유독 이렇게 맑은 날씨에 배고프단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 그래서 특히 여름에…….”
그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혹시 이브의 타고난 체질인 건가?”
그는 마법사라서 그렇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었다.
이브는 그의 말에 ‘정말 그런 건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엔 우기가 별로 없었다.
비교적 태양이 자주 뜨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발레리안과 그녀는 체질적으로 반대라는 의미다.
‘설정부터 완전 정적인데.’
이브는 새삼스럽게 원작의 설정이 그와 상극으로 배정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원작자가 분명히 그녀를 최종 보스 정도로 배정해 둔 게 틀림없었다. 이브가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