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브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를 악무는 그가 보였다.
‘화가 많이 났나 봐!’
이브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속으로 허둥거렸다.
자신에게 온전히 화가 난 발레리안은 처음 보았다. 그렇기에 이 화를 어떻게 누그러뜨려야 하는지 방법도 몰랐다.
‘일단…… 역지사지를 해 보자!’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기 위한 방법.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거였다.
‘내가 발레리안이라면…….’
으. 아무리 생각해도 무력하게 사과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여기서 그에게 절연당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언제, 진실을 말해 줄 생각이었어?”
“으,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란 이브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제 말해 주려고 했더라.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녀의 정적을 스스로 해석한 발레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영원히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의 말대로 처음엔 평생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그의 진심을 알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유리가 성국으로 돌아가면 말해 줄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라 이브는 잠시 고민하다 대꾸했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 미묘한 머뭇거림에서 답을 얻은 발레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브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브가 악마라고 착각하던 그때보다, 이제는 이 사실에 기분이 처참해졌다.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지만, 그의 안색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제야 이브는 그가 다른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재빠르게 해명했다.
“유리가 성국으로 돌아간다면 말해 줄 생각이었어. 진심이야!”
그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옥에 있는 듯한 저 안색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단순한 말로는 그의 오해를 풀 수 없다. 이브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진짠데!’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제가 생각해도 그에게 보여 준 제 모습은 늘 거짓투성이였으니까.
찰나 수많은 고민을 하던 이브가 고민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발레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 사실이야. 우리 가족의 목숨이 걸린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어. 왜냐하면…….”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자, 발레리안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널 믿게 되었으니까.”
망설이던 이브가 말했다.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시선이 흔들렸다. 왠지 고백을 한 기분이라 이브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거람.’
과거, 그에게 뜬금없이 청혼했던 건 그녀 쪽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쑥스럽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이렇단 말인가. 급기야 그녀의 얼굴은 홧홧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본 발레리안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날 믿게 되었다고?”
하지만 발레리안은 그 말조차 의심스러운 듯 천천히 곱씹었다.
그래서 이브는 이 말마저 진위를 의심할까 봐 긴장 어린 시선으로 그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고요한 밤바다처럼 가라앉은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브는 앞에 놓인 물 잔을 들고 마른 입 안만 축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뭔데? 얼마든지 물어봐!”
이브는 물 잔을 내려놓고 빠르게 대답했다. 제 진심만 보여 줄 수 있다면 뭐든 말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다르게 그의 입술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아주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다물어 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이브의 목이 다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언제냐,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었냐.
그녀는 이 상황에서 이런 보편적인 질문이 날아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간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과거엔 날 사랑했어?”
“……내가 널 사랑했냐고?”
이브는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의심스러워 다시 물었다.
‘뭐지?’
이 치정극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는.
그러나 발레리안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비장하고 진지했다. 이브는 그의 표정을 읽고 더욱 아연해졌다.
‘진심으로 묻는 거였어?’
이브는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어질어질해졌다.
그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의 감정까지 의심하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진즉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미안한 나머지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게 아니면 내가 너한테 왜 청혼을 했겠어.”
혹시 예전 청혼의 저의까지 의심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녀는 어떻게든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내 정체를 알게 된 게, 성인식 때야. 그러니까 널 만나고 나서 훨씬 이후지…….”
그녀는 목이 메어 자꾸만 목소리가 잠기자 한 차례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려고 했던 거야. 쉽게 믿기진 않겠지만…… 정말이야.”
그녀는 끝내 믿어 달란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진실을 말했고, 믿어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해명에 발레리안은 엉성하던 퍼즐이 착착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악마라고 생각했을 때 풀리지 않던 의문점들.
왜 그녀는 그에게 접근하고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던 건가. 그리고 왜 돌연 도망치듯 수도를 떠났던 것인가.
그녀가 마법사라면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마른세수를 한 발레리안은 잠시 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믿어.”
그녀는 그를 보며 한마디 툭 뱉었다.
“또, 그 얼굴이야.”
“얼굴?”
“내가 처음에 악마가 아니라고 했을 때 그런 표정이었어. 거짓말을 하는 나를 억지로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
발레리안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그녀가 그에게 진실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녀가 진심을 말하겠다며, 거짓이 아니라고 한들.
머리로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알아도 마음에 그 진심이 와닿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이브는 믿음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눈앞에서 그의 반응을 보니 초조해졌다.
“이번엔 정말이야. 속고만 살았어? 아, 속고만 살았지…….”
말을 잇던 이브는 제 입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가만히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브…… 그러면 하나만 더 물어볼게.”
“응?”
“그러면 여전히 날 사랑해?”
이브는 다시 또 반복된 질문에 대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해?”
“응, 나한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해.”
어느 때보다 그의 대답이 빨랐다.
그렇게 중요하다는데 대답을 못 해 줄쏘냐.
이브는 냉큼 입술을 달싹였다.
‘어, 이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까 부끄러운데…….’
겨우 식혔던 얼굴이 다시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제 입술만 뚫어져라 보는 집요한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술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응…… 그래.”
“지금 그 말…….”
진심이지?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물음 자체가 이제 무의미해졌다.
이미 자신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미치도록.
악마라고 오해했던 과거.
잠도 못 자고 과거에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며 진심을 의심했던 밤.
그 밤을 보내며 가장 괴로웠던 건, 그녀가 자신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이만 번뇌를 끝마치고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발레리안.”
이브가 그가 다 하지 못한 말이 뭔지 깨닫고 그를 불렀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오롯하게 향하자,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진심이야.”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는 또렷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시선에도 발레리안은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문득 테이블 위를 보니 미미하게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그를 앞에 두고 이브는 물만 들이켰다.
자꾸만 목이 탔다.
그를 속인 업보를 청산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자신의 진심을 알려 주는 수밖에는.
* * *
“갑자기 어딜 간다는 말씀이에요?”
다음 날, 유리는 제도에서 성국까지 오랜 마찻길의 여독을 채 풀기도 전에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성하께서 긴히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하셔서요.”
그녀의 전담 사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시겠지만 금방 끝날 거예요.”
“무슨 할 말을 하려고…… 이런 먼 곳까지 와서 하나요?”
그렇게 그들은 성전 아래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갔다. 익숙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멍하니 보고 있던 유리는 덜컹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제가 기도실의 석상을 밀고 있었다. 이어서 레버가 나타났다. 그 레버를 끌어 내리자 아래로 통하는 지하 문이 열렸다.
“이, 이게 뭐예요?”
책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 펼쳐지자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래에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보고 여길 내려가라고요……?”
유리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뒷걸음질 쳤다. 사제는 유리를 안심시키듯 부드러이 말했다.
“괜찮아요, 성녀님. 원래 여긴 성녀님께서만 들어갈 수 있는 신의 전당이라서 100년 동안 사용된 적이 없는데-.”
사제의 붉은 눈에 일순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사제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이 오셔서 사용하게 되었어요.”
“……여기 들어가도 되는 곳 맞아요?”
“그럼요. 성녀님.”
사제는 온유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불길함을 느낀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안 갈래요. 여기 너무 무서워요…….”
“여기까지 와서 그러면 곤란한데…….”
사제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짓했다. 그러자 성녀의 뒤에 있던 아리엘이 다가왔다.
“정말 난감한 성녀님이네.”
사제, 아니 아스가 성녀를 서늘히 내려다보며 웃음을 흘렸다.
유리는 제 팔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지자 흠칫했다.
“대주교님?”
고개를 돌린 유리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러나 채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유리는 눈을 홉떴다. 대주교가 돌연 지하로 연결된 계단 앞에서 유리를 밀어 버린 것이다.
“꺄악!”
콰당! 광막하고 어두운 공간에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런, 제물이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스가 혀를 차며 타박하자, 아리엘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성력이 있어서 이런 상처는 금방 치료될 거예요. 어차피 성력을 뽑아낼 건데 의식 정도는 없어도 상관없지요.”
다행히 유리의 추락은 무릎이 갈리고 팔에 타박상만 입은 걸로 끝났다.
아리엘과 사제의 대화 소리를 들은 유리는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단어가 뇌리에 깊게 남았다. 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