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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72화 (72/100)

72화

성녀의 폭탄선언으로 장내가 어수선해지자, 자비에는 옆에 있던 황실 기사를 불러 성녀를 귀빈실로 안내하게 했다.

사실상의 강제 퇴장이었다. 자비에는 발레리안을 향해 말했다.

“발레리안, 넌 나와 따로 보지.”

즉시 그들은 고위 참모실로 향했다.

단둘이 참모실로 들어온 자비에는 발레리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발레리안, 넌 알고 있었나?”

맥락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자비에가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래.”

발레리안은 긍정했다. 사실 이브가 마법사라는 건, 조금 전 노아의 반응을 보고 알아차린 상태였다.

성녀가 발표하자마자, 노아의 혈색이 마치 숨기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창백해졌기 때문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기엔 반응이 시원치 않군.”

자비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알고 있어도, 몰랐어도 둘 다 문제가 되었다.

신탁을 떠올린 자비에는 돌연 얼굴을 굳혔다.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

태양을 가리는 검은 악귀들이 세상을 비명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신탁이 내려왔다는 사실은 모르지만, 흘러가는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기민히 파악한 발레리안이 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이브는 아무 문제 없어.”

“그렇겠지. 지금은.”

발레리안의 말에도 자비에의 굳은 얼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신탁은 아직 발레리안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알아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자비에는 확신했다. 그 신탁을 알려 주더라도 그 신탁의 주인공이 이브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자니 머리가 아팠다.

지금 엘라라는 녀석이 마법사를 감싸 주고 있다는 사실이, 두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심지어 방금 그 사실을 알게 된 녀석이 말이다.

‘단단히 코가 꿰인 게 틀림없군.’

제복의 휘장을 뜯어낼 때부터 미친놈이란 건 알고 있었다.

자비에는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체통을 지키기 위해 겨우 참아 냈다.

“이브가 나딘 마을로 떠났던 이유가-.”

발레리안의 말을 자비에가 서늘히 끊으며 대답했다.

“그래, 마법사라는 정체가 밝혀질까 봐 그랬겠지.”

여태까지 그녀가 발레리안에게 정체를 숨긴 걸로 미뤄 보건대, 엘라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도망친 게 분명했다.

자비에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 생각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자비에의 추측을 일축했다.

“난 이브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브는 자신의 존재가 제국에 문제가 될까 봐 도망친 거지.”

발레리안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떠났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자비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브 에스텔라가……?’

그 정도로 애국심이 있는 여자라고?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지만, 자비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런 건 이제 지엽적인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브 에스텔라’가 마법사라는 것. 그리고 그런 그녀를 옹호하는 ‘발레리안 루드비히’가 엘라라는 것이다.

자비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피곤한 일에 맞닥뜨렸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두려움에 물든 이브 에스텔라 영애의 모습이었다. 자비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발레리안.”

자비에는 입을 움직이면서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브 에스텔라 영애의 정체를 함구해 준단 말인가.

“문제가 생기면 네가 엘라로서 책임지고 제국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나?”

자비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린 발레리안은 즉각 대답했다.

“그래.”

그러나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자비에를 향해 발레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

그의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자비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호출할 때까지, 이브 에스텔라를 잘 감시하도록.”

고개를 끄덕인 발레리안은 안색이 밝아진 채 참모실을 나갔다.

반면에 혼자 참모실에 남은 자비에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휴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은 자비에는 생각했다.

이 순간,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눈앞에 있던 발레리안이 아니라 저일지도 모른다고.

* * *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성국의 마찻길에 오른 유리는 억울하여 분통이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요!!”

“성녀!!”

앞에 마주 앉은 아리엘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며 야단쳤다.

“언제까지 성국의 위신을 망가트려야 직성이 풀릴 겁니까?!”

“대, 대주교님…….”

대주교의 선명한 분노를 처음 마주한 유리는 히끅,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곧 이러한 상황 자체가 억울해져 소리쳤다.

“하지만 정말로 이브 에스텔라는 마법사란 말이에요!”

“그래요! 정녕 그게 사실이라도 사람들은 에스텔라의 말을 믿고 있지요!”

아리엘은 철부지를 바라보는 하찮은 눈길로 유리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대주교가 제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인데……!’

그때 옆에 있던 유리의 전담 사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성녀님의 말씀을 믿어요.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요. 인간들은 원래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거든요.”

그 말에 유리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사제님은 제 말을 믿어 주는 건가요?”

사제의 탈을 쓴 아스의 얼굴에 맴도는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럼요.”

성녀가 마법사의 정체를 밝혀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성녀님은 저에게 신이 내려 준 선물이니까요.”

숨은 마법사를 찾아낸 성녀는 진정으로 신이 그에게 준 선물임이 틀림없었다.

* * *

그날 저녁.

노아가 가져온 소식에 이브는 에스텔라 저택의 응접실에서 한시름 던 얼굴로 소파에 늘어져 누워 있었다.

벌써 창살을 통해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리가 성국으로 돌아갔다고…….”

드디어 큰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찝찝할까.

‘내가 뭘 잊어버린 것 같은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브는 이어서 들려온 소식에 그 찜찜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루드비히 소공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맞다!

이브는 몸을 파닥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이걸 잊어버릴 수 있는 거지! 완전 바보였다.

발레리안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상기한 이브는 초조한 얼굴로 응접실을 서성거렸다.

‘이 거짓말을 어떻게 수습한담?’

그녀는 제 고비가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건 폭탄을 피했더니 핵미사일이 날아온 격이었다.

“으…… 엄청 화내겠지.”

이브는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낼 발레리안을 상상해 보았다.

황태자와 위장 약혼을 했던 날. 그때 발레리안이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걸 또 겪어야 한단 말이야……?”

그땐 그래도 자비에가 분노 방패막이 역할을 해 주었지.

이번엔 그 분노를 감당할 사람은 오롯이 이브, 그녀 혼자였다.

결단코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사장의 물음에 이브는 더듬더듬 말했다.

“어, 없다고 해.”

거의 이성을 거치지 않은, 무의식적인 사고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없다고 전해 드리면 됩니까?”

집사장이 재차 묻자, 이브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일단 그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숨어 있는 거다.

“그래, 어디 나갔다고 해! 급하게 다녀올 곳이 있어서 한동안 못 온다고…….”

“급하게 다녀올 곳?”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이브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바, 발레리안.”

“소공작님!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오시면……!”

뒤에서 로즈가 급히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응접실에 들어온 그의 귀에 다급한 로즈의 목소리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이브는 어디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발레리안이 눈을 나붓하게 접어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다. 따뜻한 미소에 가려진 눈빛에 얼마나 차가운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는지.

이브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무언지 깨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더 이상 회피하는 게 힘들다는 걸 인식한 그녀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로즈랑 집사장은 나가 봐.”

“예.”

“……네.”

로즈와 집사장은 아가씨를 걱정스럽다는 듯 보다가 주춤주춤 응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단둘이 남은 응접실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브는 날카로운 가시밭 위에 맨발로 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보더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브.”

“으응.”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저 모습을 악마로 착각할 수 있다니. 자신이 참 머저리 같은 착각을 했다는 걸 다시금 깨닫자, 자조 섞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왜, 왜 웃는 거지?’

이브는 그의 미소에 움찔했다. 분노가 극에 달해 미친 나머지 웃음이 나오는 걸까?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미, 미안해…… 발레리안.”

그녀는 먼저 사과를 하기로 결심했다.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사과하는 수밖에는.

“이유리의 말이 사실이구나.”

도리어 그녀의 반응에 발레리안은 한 번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브가 악마가 아닌, 마법사라는 사실을.

이브는 입을 꾹 닫았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발레리안은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입술을 뗐다.

“악마가, 아니라고.”

뚝뚝 끊어 내듯 힘주어 말하는 그는 제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엿보였다.

그의 감정을 코앞에서 마주한 이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아……. 난 악마가 아니야.”

더 이상의 거짓말은 무의미하다. 그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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