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비교적 크게 울려 퍼진 유리의 말에 일순간 숨 막힐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뒤이어 장내가 어느 때보다 크게 술렁거렸다. 이브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사라니요?”
“그 100년 전에 악마를 소환했던…….”
“마법사……?”
하지만 이 중 가장 놀란 이는 발레리안이리라.
예기치 않은 유리의 발언에 발레리안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이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회피했다.
그 일련의 모습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 유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왜 이브 에스텔라를 악마의 끄나풀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어요? 다 근거가 있어서 한 일이었어요!”
자비에의 얼굴이 석고처럼 경직되었다. 그의 굳은 시선이 잠시 이브에게 향했다.
‘이브 에스텔라가 놀라지 않는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이브는 차분한 시선으로 성녀를 보고 있었다. 자비에는 유리에게 다가갔다.
“성녀 이유리, 그 근거를 말해 주십시오.”
“역대 성녀들이 타인의 마력을 볼 수 있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죠. 전 이브 에스텔라를 보자마자 거대한 마력을 느끼고 공포에 사로잡혔어요!”
“……그렇다면 왜 진작 이브 에스텔라 영애를 고발하지 않았던 거죠?”
상황을 지켜보던 오필리아 글렌이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반박이 올 거라 예상했는지 유리가 곧장 대답했다.
“이브 에스텔라가 저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었으니까요! 저도 사람인지라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서 비밀을 지켜 주었는데…….”
이브를 담은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아롱졌다. 원망스러움이 가득했다.
“저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할 줄 몰랐어요!”
이브는 허, 헛웃음을 삼켰다.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유리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에 대한 적대심이 강한 걸까.
‘여름제가 시작될 때부터 이상했지.’
아론의 탈을 쓴 악마가 대체 어떤 이간질을 했길래 유리가 저 지경이 된 걸까.
이브는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유리와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대화는 해 볼 생각이었는데.’
장내에 들어온 유리는 이브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브가 다가가자 소용없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나.
이브는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발레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이브는 양심이 따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능숙히 준비했던 연기를 펼쳤다.
“성녀님……. 성녀님은 제가 그렇게 미우신가요?”
구슬처럼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이브는 작은 입술을 떨면서 질끈 깨물었다.
“발레리안을 연모하는 성녀님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방법까지 써서 절 몰아세우실 줄은…….”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아래 루비색 눈동자엔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성녀님이 원하신다면 발레리안을 포기할게요.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감히 성녀님의 말씀에 반항할 수 있을까요?”
이브의 말을 경청하던 주위 귀족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성녀님,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도 누군가를 모함하실 수는 없는 겁니다.”
이브는 눈물이 맺힌 시선 아래로 슬쩍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대부분이 카트린 후작 가문에서 보았던 무관 귀족들이었다.
“맞아요. 마음에 안 든다고 무작정 무고한 사람을 마법사라고 매도하시면 안 되죠.”
“무고한 사람이라뇨!”
유리가 당황하여 앙칼지게 소리쳤다. 동요하는 그녀의 반응을 주시하던 무관 귀족들의 얼굴엔 승기를 잡은 미소가 스쳤다.
원래 이런 자리에선 당황하는 사람이 죄인처럼 보이는 법이었다.
‘심지어 유리는 증거도 없는 상황이지.’
단순히 제 눈에 보이는 마력이 증거이거늘.
다른 이의 눈엔 마력이 보이지 않…….
‘아니지!’
이브는 이 자리에 마력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는 슬쩍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 쪽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노아 에스텔라, 그녀의 오라비 쪽을 보고 있었다. 노아는 잔뜩 동요해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노아, 저 바보!’
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노아에게 열렬히 눈짓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노아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이 사태가 벌어지는 장내 중앙에 성큼성큼 걸어 나와서 외쳤다.
“에스텔라 가문에서도 정식적으로 성국에 이 문제를 제기하도록 할 겁니다!”
노아의 맹렬한 말투에 귀족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그녀의 장단에 맞추는 노아를 본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쟤…… 누굴 닮은 것 같은데.
그러다 금방 그게 누군지 깨달았다.
‘완전히 나잖아.’
으윽. 더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그런 속내와 달리 이브 또한 울먹거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 때문에 오라버니까지 피해를 보는 건 싫어요. 그건 참을 수 없어요!”
야야, 표정 관리 똑바로 해라.
썩어 들어가는 노아의 표정에 이브는 그의 팔을 붙잡는 척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내 어떻게 동생의 위험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동생아.”
노아는 진지한 얼굴로 다정한 오라비의 연기를 이어 갔다. 이브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감동한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빨리 이 미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탓일까, 절로 혼신의 연기가 나왔다.
기실 유리가 그녀 자신을 몰아세운다는 사실보단 노아와 이런 짓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로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뭐, 저쪽도 피차일반 같네.’
이브는 자신을 향한 노아의 눈빛을 보며 그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에 안심했다. 자신만 괴로운 건 아니라니 위안이 되었다.
“성녀, 그 사실을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따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자비에가 앞으로 나서 중재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이브를 스쳤다. 그녀는 찔끔했다.
‘뭐지? 저 얼굴은…….’
그녀를 보는 자비에의 시선은 마치 모든 사실을 파악한 사람처럼 보였다.
‘설마…… 아닐 거야.’
이 일련의 상황만으로 황태자가 그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눈치챈단 말인가. 그러나 불길함이 계속 엄습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자비에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연기를 이어 가는 이브를 지켜보면서 성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역으로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래서 그때.’
수도를 떠나서 도망쳤던 이유.
이브 에스텔라가 ‘마법사’라서 그렇다면.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자비에는 신탁을 상기하곤 얼굴을 굳혔다.
‘악마 소환 사건.’
그 끔찍했던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는 게, 설마 이 앞에 있는 이브 에스텔라를 뜻하는 거였나.
그렇다면 자신이 앞장서서 막아야만 했다.
바로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바로 밝히겠습니다.”
“……?!”
다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발레리안이 척척 걸어서 이브 앞에 섰다.
그러곤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놀란 이브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단단한 악력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이브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느껴지는 건 발레리안의 손에 있는 온기…… 그리고 몸에 퍼지는 따뜻함뿐이었다.
‘뭐지?’
몸이 홧홧하게 데워지는 듯한 이 온기.
마치 한겨울의 벌판 가운데를 배회하다가 얼어붙은 몸을 난롯불에 녹인 듯한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몸이 점차 노곤해졌다.
동시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짙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때아닌 노곤함에 빠져 있던 이브는 뒤늦게 정신을 번쩍 차리었다.
‘이게 엘라의 힘인가……?’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녀는 당황하여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장내가 고요해진 사이, 발레리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브 에스텔라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그의 말에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장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여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그걸 어떻게 아나요?”
오필리아 글렌이 묻자, 발레리안은 이브의 팔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마법사였다면 제가 몸에 흘려 보낸 태양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겁니다.”
“즉사라니……!”
귀족들은 저마다 탄성을 흘렸다. 새삼 엘라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깨닫고 두려운 표정이었다.
이브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마법사였다면 죽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녀는 마법사였다. 그 명제는 변함이 없고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제 앞에 있는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거짓말을 눈치챈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자비에가 날카롭게 발레리안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발레리안이 다시 입을 열어 제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만약 이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있다면 기사직을 내려놓겠습니다.”
엘라의 확신이 담긴 말에 귀족들은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비에에겐 딱히 효용성이 없는 말이었다.
이미 일전에 에스텔라 영애와의 위장 약혼 때문에 휘장을 뜯어낸 과거를 상기한 탓이다.
자비에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이브는 불안해졌다.
‘자비에가 알아차린 건가?’
그가 제국에서 위험 인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원작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워낙 발레리안이 사명감에 미친 놈으로 나와서 자비에의 그 면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제국과 한 몸이 된 사람처럼 굴었다.
‘내가 마법사라는 걸 확신하게 되면.’
날 죽일 거야.
그녀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이브의 모습에 발레리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자비에는 입술을 일자로 굳혔다가 입을 열었다.
“이브 에스텔라 영애, 이번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테니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십시오.”
……눈치채지 못한 건가? 평소와 같은 자비에의 말투에 안심한 이브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자비에와 발레리안의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아, 망했다.’
발레리안과 자비에.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