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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70화 (70/100)

70화

같은 시각.

아리엘은 잔뜩 치장한 성녀를 보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성녀님! 어딜 가신다는 말이에요?”

황궁에 입궁한 뒤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유리가 돌연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겠다며 부산스레 움직였다.

“거기서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이게 전부 다른 사람들이 이브의 정체를 알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짜증이 난 사람은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성녀님!!”

아리엘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이미 루드비히 공작가에서 성녀를 거의 버린 패로 취급하고 있는 터라 예민함이 하늘을 찌른 상태였다.

‘경우 없이 경솔하게 굴어서는!’

성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루드비히 공작에게 밉보인 꼴만 초래했다. 지금 그래서 황실과 루드비히 가문의 기 싸움 가운데 성국이 끼어 버린 형국이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어쩌다 신은 이런 성녀를 내려 준 건지. 엘라의 마음 하나 잡지 못해서 이런 구박데기 신세로 전락한 성녀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이번에 또 무도회에서 어떤 사고를 치려고 가시려는 겁니까?”

당연하게도 아리엘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자하고 푸근했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고라니요? 하! 역시 대주교님도 제 말은 믿지 않으시는 거네.”

“무슨 말을…….”

“그거 아세요? 이브 에스텔라는…….”

유리는 홧김에 제 앞을 막아서는 아리엘에게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꺼낼 뻔하였다.

“휴,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건 역시 시기상조였다. 카트린 후작 가문에서 열린 연회에서 피해자인 척 여론을 선동한 이야기는 유리의 귀에도 닿았다.

그 모습이 생생하게 적힌 편지에 유리는 치를 떨었다. 역시 그럴 작정으로 처음부터 악마와 짜고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 게 분명했다.

‘생각할수록 열받아!’

한편으론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약점이 제 손안에 있는데, 제 앞에서 조아리기는커녕 여론 몰이를 해서 저를 사교계에서 매장할 생각을 하다니.

‘내가 여태까지 배려해 준 것도 모르고!’

유리는 콧방귀를 흥, 뀌며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성녀님!”

아리엘은 그런 유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유리의 행동이 더 빨라 결국엔 놓치고 말았다.

“성녀가 기어코…….”

이미 멀찍이 걸어가 버린 유리의 뒷모습을, 아리엘은 섬뜩할 정도로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곧이어 그녀 뒤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성녀님이 잘 제어가 안되나 봐?”

맑고 명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아리엘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다리를 털고 일어난 아리엘이 그를 발견하고 익숙히 말했다.

“아스, 언제 오셨나요?”

그녀의 부름에 소년은 방긋 웃었다. 밤색 머리의 소년은 진한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순진한 얼굴에 어울리는 천덕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소년이 말했다.

“많이 답답해 보이는데, 내가 도와줄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물음에 잠시 아리엘이 고민했다. 아스는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지켜본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이 되면 한번 내버려 둬 보는 게 어때?”

“그러다가 또 사고라도 치게 되면 어떡합니까!”

아리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 다 방법이 있잖아.”

아스는 제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시기상조이지요.”

“어차피 먹이로 바칠 거라면 빨리 내 입 속에 넣는 게 낫지 않아?”

“황실이 아직 성녀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선 위험하답니다.”

아리엘의 눈가에 있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사실 성녀가 가면무도회에서 친 사고를 떠올리면 바로 제물로 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엘라의 마음 하나 못 잡아선.’

조만간 성녀가 기억을 다시 찾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진다. 그 전에 성녀는 제 쓰임새를 다해야만 했다.

“흐음, 그래.”

아스는 아쉬운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어쩔 수 없이 또 한동안 성녀의 수발이나 들어야 하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숙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자 유리의 곁에서 아침 수발을 들거나 심부름을 하던 전담 사제로 바뀌었다.

“이 짓도 슬슬 질리는데 말이야.”

“귀한 분이 왜 그런 궂은일을 한다고 하셔서는.”

아리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전담 사제의 모습을 한 아스는, 아니 아스모데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 내 먹이를 가로채는 건 싫거든.”

그가 성녀가 뛰쳐나간 모습을 보며 눈을 접었다.

“뭐, 성녀도 이제 곧 성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지만.”

* * *

황실 무도회장. 광막할 정도로 넓지만 화려함이 가득한 장내에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이브 에스텔라 백작 영애와 발레리안 루드비히 소공작께서 드십니다!”

커다란 문이 열리자, 이브는 발레리안과 나란히 장내에 들어갔다. 자연히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다.

“둘이 파혼한 관계가 아니었나요?”

“그게 다 이유가 있었대요. 사실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협박을 당했었다는데…….”

자연히 들리는 제 얘기에 이브는 귀를 쫑긋했다. 상황이 원하던 그림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계속 소문 좀 퍼트려 주라.’

이브는 카트린 후작가에서 개최한 파티에 참가한 보람을 느꼈다. 장내를 훑어보니 아직 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보네.’

이브는 시종이 끄는 트롤리 위, 샴페인을 들고 입 안을 축였다. 괜히 목이 탔다. 유리가 비밀을 터트리기 전에, 붙잡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 흘긋 옆에 시선을 던졌다. 발레리안도 누굴 찾고 있는지 장내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인걸.’

그땐 파트너가 발레리안이 아닌 자비에였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때보단 지금이 긴장이 덜했다. 그 사실에 스스로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목숨이 달린 일보다 발레리안의 미움을 사는 걸 두려워했다니.’

이브는 제가 얼빠진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장내를 훑다가 눈을 홉떴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이브는 황급히 샴페인을 트롤리에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흡사 황소 같은 기세로 걸어오는 이브를 발견한 노아가 움찔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마음 같아선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브는 거의 속삭이다시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의 시선을 신경 써야 했던 탓이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한 노아가 조금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걱정되어서 보러 왔다, 왜.”

그녀를 응시하는 노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자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터져서 말이야.”

그의 맞는 말에 이브는 할 말이 없어졌다.

“……방해나 하지 마.”

마지막으로 노아에게 단단히 일러두던 이브는 장내에 울린 목소리에 흠칫했다.

“성녀 이유리 님께서 드십니다!”

“……성녀가 왜 여기에?”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노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귀족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사교계에서 성녀는 악마와 손을 잡고 이브 에스텔라를 매장시키려 했다고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성녀가 귀족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황실 무도회에 참석했다니?

“무슨 생각인 걸까요?”

귀족들도 성녀의 등장이 의아한 듯 숙덕거렸다.

“너한테 해코지하려고 참가한 거 아니야?”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이브의 팔을 붙잡던 노아는 문득 발레리안을 보고 그쪽도 영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당황했다.

“그리고 저 녀석은 왜 저렇게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이브는 그의 말에 따라 발레리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노아의 말대로였다.

오히려 노아의 표현이 점잖은 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회장 문 쪽을 바라보는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엔 눅진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왜 발레리안이 화를 내는 거람…….’

이브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발레리안, 잠깐 이리 와 줄래?”

그녀의 부름에 비로소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브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레리안의 팔을 잡아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브, 무슨 일이야? 지금 좀 바쁜데.”

바쁘다는 말 자체가 불길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에게만 들리게끔 모깃소리로 속삭였다.

“나, 진짜, 진짜로 유리를 죽일 생각 없어.”

마차 안에서 여러 차례 해명해도 자신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해 달라는 철옹성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여기서 내가 진짜 유리를 죽이려 한다고 믿고 있다면…….’

왠지 발레리안이 한발 앞서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런데 어디서 야심만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 둘러싼 소문들이 뭔지 알고 있어요.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이 무도회에 참석했어요!”

유리의 목소리였다. 하얀 드레스로 치장한 그녀는 샹들리에 아래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브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인파에 쉬이 다가갈 수 없었다.

“어머, 그게 뭐지요?”

어떤 귀족이 관심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리는 장내를 싹 훑었다. 아직 자비에 황태자가 자리에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면-.”

그때 장내에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비에 루 힐리오스 황태자 전하와 오필리아 글렌 공녀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을 들은 유리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장내로 입장한 자비에와 오필리아는 한곳에 모여 있는 귀족 무리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곤 그 중심에 성녀 이유리가 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 의도를 파악했던 탓이다.

“에스텔라 영애.”

오필리아가 이브를 먼저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귀족들은 글렌 공녀가 장내에 들어오자마자 찾은 영애가 이브 에스텔라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오필리아 옆에 있던 자비에는 발레리안을 잠시 보다가 이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브를 보는 시선엔 우려와 걱정이 얽혀 있었다.

“에스텔라 영애, 성녀가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보냈는데 왜 오늘 무도회에 참석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발레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브는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럴수록 더더욱 참석해야 하니까요.”

오필리아 공녀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왠지 영애라면 참석하지 않을까 했는데, 제 예상이 적중해서 더 재밌네요.”

“저도 참 재밌어요. 여기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참석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난입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리였다. 이브 옆에 있는 발레리안을 보던 유리의 시선이 다시 이브에게 맹렬한 기세로 꽂혔다.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종족으로 알려진 마법사가 연회에 참석하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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