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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69화 (69/100)

69화

“어떻게 변명해 뒀는지 알아야 내가 그 장단에 맞추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아…… 진짜 귀찮게 하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노아가 비적비적 일어났다.

“발레리안이 네 정체를 알고 있는데, 눈감아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뭐?”

이브는 기함했다.

“내 정체를 뭐라고 얘기했는데?”

“뭐긴 뭐야. 마법사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그가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걸 그렇게 직접적으로 변명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감동하신 거였어?’

이브는 잠시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이성적으로 보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러다 이어질 부모님의 행동을 상정한 그녀는 이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갈 것임을 확신했다.

“노아, 넌 아직도 어머니랑 아버지를 몰라?”

“왜? 뭐 문제 있어?”

“문제가 당연히 있……!”

그때였다. 이브와 노아가 나란히 있는 걸 발견한 백작 부부는 기쁜 얼굴로 다가왔다.

“마침 너희들도 여기 있었구나!”

“무슨 일 있어요?”

노아가 묻자, 에스텔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질 말을 예상한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엘라가 우리 편이 되었으니 우리의 혁명도 성공할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백작의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노아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혀를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이브는 그런 노아를 가자미눈으로 노려보았다.

‘네가 다 알아서 해결해!’

노아는 그 시선을 읽고 피곤한 얼굴로 그네에 드러누웠다.

* * *

공작 성으로 돌아온 발레리안은 바로 정원으로 향했다.

단지 한가롭게 꽃 구경을 하러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다.

“유리.”

그녀를 발견한 발레리안은 곧장 유리에게 다가갔다.

“어! 리안!”

유리는 리안이 오랜만에 그녀를 찾아오자 활짝 웃었다.

도무지 기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에 그녀의 기분은 나락으로 치달았다.

“나보고…… 성국으로 돌아가라고?”

“그래, 여기 계속 있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건 대주교님한테 들었을 거야.”

그도 그녀가 성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나, 발레리안에겐 어떤 수를 써서든 유리를 성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대로 성녀를 두면 이브가 위험해진다.’

이미 유리는 이브에게 악감정을 가진 상태였다. 발레리안은 그 이유를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리가 근래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는 뜻이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내 쪽에서도 어쩔 수 없어.”

발레리안은 그녀를 무감한 시선으로 보더니, 그녀 너머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유리 주변을 에워싸며 말했다.

“성녀님, 얌전히 성국으로 따라가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잔뜩 당황한 유리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그녀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나,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유리는 더욱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마치……! 죄인이 끌려가는 것 같잖아!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푸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런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 황금색의 금갑을 두른 기사들이 난입했다.

“황실의 명으로 성녀를 모시기 위해 왔소.”

루드비히 기사들이 소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발레리안의 눈빛은 매섭게 돌변했다.

발레리안이 서늘히 말했다.

“악마와 내통한 자를 황실에 두는 건 위험합니다.”

유리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말에 반발하기 위해 그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선두에 있던 황실 기사의 대답이 조금 더 빨리 나왔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오래된 병환에 태양의 혜안이 흐려진 건 아닌가 우려스럽군요.”

발레리안의 지적에 황실 기사가 발끈했다.

“항명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내뱉은 기사는 조금 두려운 시선으로 루드비히 소공작을 마주했다.

아무리 무위를 갈고닦은 황실 기사라도 엘라의 힘에는 범접할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발레리안, 황실이 성녀를 데려가도록 해라.”

발레리안은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루드비히 공작은 서늘한 시선으로 기사들을 보았다.

“아버지.”

발레리안의 시선을 느낀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이러면 황실의 눈에 띄게 되는 법이거늘.’

그러면 이브 에스텔라나 발레리안, 양쪽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실로 공작 또한 이브 에스텔라의 거짓말을 눈치챈 뒤, 고민의 연속이었다.

꼼짝없이 이브 에스텔라를 악마라고 믿고 있는 아들의 오해를 푸는 게 맞는 것인가.

작고(作苦)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지금도 악마라는 사실 하나로 불순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면…….

‘마법사들의 무고를 주장하겠지.’

그건 제국의 역사를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마법사들의 죄들은 역사서에 낱낱이 적힌 바였다.

그 역사서를 바꿀 만한 증거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발레리안의 행동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브 에스텔라가 수도에 남아 있다.’

카트린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한 그녀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공작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녀가 무슨 계획을 세운 건지 대충 가늠한 공작은 입을 열었다. 그의 면면 뒤로 고민의 흔적이 가려진 채였다.

“성녀를 데려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발레리안.”

성녀를 보고 있던 공작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향했다. 그를 스치고 지나가던 공작이 나직이 말했다.

“네가 우려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 * *

어느새 황실 무도회 날 아침이 성큼 다가왔다.

무도회에 참가하기 위해 몸단장을 끝낸 이브가 저택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백작 부부가 바짝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이브, 아직 늦지 않았다! 연회 날에 너의 그 마법으로 황제를…….”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아버지에게 이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황제를 죽이라고요?”

“어,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니.”

백작 부인이 당황하여 더듬거리자,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을 심드렁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데요?”

“그…… 네 말이 옳다.”

에스텔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그들을 보면서 아침부터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심약한데 반역을 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믿을 건 그녀의 마법뿐인 것 같았다.

제 평안한 삶을 위해서 그들이 이러는 건 이해가 되었지만, 정녕 그녀의 평화를 원한다면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상책이거늘.

그녀는 뒤에서 이 광경을 보며 이마를 짚고 있는 노아를 노려보았다.

“진짜 그러지 좀 마세요…….”

시든 화초 같은 얼굴로 노아가 설렁설렁 다가오면서 백작 부부를 말렸다.

‘이 틈이다!’

이브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저택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검은 바탕에 푸른 매가 그려진 거대한 마차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루드비히 공작 가문의 인장이었다.

그 앞에는 인장보다 더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발레리안이었다. 그 또한 그녀처럼 무도회에 참석하려고 왔는지 검은 연미복에 소매가 푸른 실로 장식된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정말 잘생겼다.’

그가 언질도 없이 백작저에 온 것을 지적해야만 하는데, 이브는 그의 외모에 홀려 입을 헤벌렸다.

반면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려입고 나온 이브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얼굴을 굳혔다.

“진짜 갈 생각이었구나.”

이브를 보는 시선이 얼어붙었다. 서늘했던 바다가 순식간에 빙하가 된 것 같은 온도 차였다.

“이브.”

그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이브는 생각했다.

‘그러면 유리가 오늘 내가 마법사라는 걸 밝힐 텐데, 그 자리에 발레리안도 있겠구나.’

어쩌면 오늘.

이브가 악마가 아닌 마법사라는 걸 발레리안이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유리가 내 정체를 밝힐 거라면,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없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거야. 나는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고.”

이브의 말에 발레리안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그녀가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이브는 혼자서도 마차에 곧잘 오르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발레리안의 손을 잡고 올라탔다.

‘우리가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관계는 아닌데.’

이브는 뒤늦게 어색해진 기분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라 들어온 발레리안은 곧 결의가 선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브의 결정이 그렇다면-.”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스쳤다.

“나도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따른다는 거지…….

‘그냥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뿐인데.’

제가 무슨 큰 결정을 했다고 저런 결연한 표정을 짓는 거람.

그녀가 앞으로 거기서 무슨 일을 할 줄 알고 그러는 건지, 그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뭘 따른다는 거야?”

평소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여상한 말이지만, 이브는 괜히 마음에 걸려서 질문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도회에서 유리를 죽일 생각 아니었어?”

“……?”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당황한 이브는 부정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내가 유리를 죽이려고 했다고?’

내가 악마도 아니고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브는 당연히 유리를 죽일 발상 따위는 떠올린 적 없었다.

‘아…….’

그러나 발레리안이 자신을 악마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이브는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안 그러면 탄식이 절로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뭐…… 그걸 따르겠다고?’

제정신인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브는 발레리안을 아연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숲에서 영약을 가져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가령 드래곤한테 뒤통수라도 맞았거나 혹은 어떤 환각 마법에 당했거나.

‘그게 아니고선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돼.’

할 말을 잃은 이브는 마른침을 삼키며 잠시 창밖을 보았다.

어쩐지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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