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젠 정면 승부밖에 없구나.’
어차피 그녀도 본래 이런 일을 대비해서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리와의 관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건지.
하던 서류 일이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이브는 눈을 꾹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았는데, 주변이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잠깐…… 누가 와요?”
이브는 집사장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사장은 또박또박 방문자의 이름을 말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소공작께서 오셨습니다.”
“연통도 없이…….”
이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백작저를 방문하면 좋은 소식을 가져온 적이 없었던 게 떠올랐던 탓이다.
그렇다고 그를 그대로 돌려보내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지.’
이제 그가 얼마나 집요한 사람인지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은 그를 속인 입장이었기에 그를 마주하면 죄책감이 들 게 분명했다.
‘혹시 뒤늦게 날 퇴치하러 온 건 아니겠지?’
빛이 번쩍이는 성검의 날을 떠올린 이브가 몸을 부르르 떨며, 조심스레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발레리안.”
“이브.”
응접실에 있던 발레리안은 방에 들어온 그녀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브는 그에게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주춤했다.
일평생 악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둘러싸여 살아온 남자였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그 가치관을 바꿔 버리고 그녀를 포용할 리가 없었다.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이브는 그의 거부 반응을 각오했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처받지 않도록.
그런 그녀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브가 예상하던 말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뭐?”
이브는 당황하여 반문했다. 도망간 줄 알았으면 여기 왜 온 거람. 이해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본 이브는 어색하게 대꾸했다.
“그때 말했잖아. 난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그럼 그때는 왜 갔던 거지? 지금이랑 뭐가 달라서?”
그녀의 말에 그는 더욱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발레리안은 지금 그녀가 나딘 마을로 도망갔던 시점을 짚고 있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지금은…… 네가 날 죽이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럼 그땐 내가 이브를…….”
발레리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토해내듯 가까스로 내뱉었다.
“……죽일 줄 알고 도망갔다고?”
“응.”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변명거리도 없었으니까. 여기서 더 거짓말을 할 여력은 없었다.
그녀의 긍정에 발레리안은 충격을 받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국, 자신 때문에 수도를 떠났다는 뜻인가.
그의 푸른 눈동자가 심해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였다.
‘아플 텐데.’
한편 이브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손을 내밀려고 하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저를 악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차피 당분간은 악마인 척해야 했다. 이브는 잠시 고민했다.
‘언제까지 악마인 척해야 하지?’
유리가 제 정체를 까발릴 때까지? 일단 지금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평생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 건 양쪽 모두에게 가혹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서로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그 정적을 먼저 깨트린 건 발레리안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말은 아닌, 스스로를 향해 한 말처럼 들렸다.
“……대악마라면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도망치는 선택을 했다고.”
발레리안은 혼란스럽다는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중얼거림을 똑바로 들었으나 이브는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그의 말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그녀의 속은 질겁해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심지어 대악마로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어?!’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기실 제가 대악마가 아니니 발레리안을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해를 가할 수 없거늘.
그걸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상황이며, 그 의문이 타당하다고 동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건데?”
그녀는 그가 앉은 소파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얼른 본론을 꺼내게 해서 용건을 들어 보고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유리가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
“……응. 알고 있어.”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들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였다. 이브는 한숨을 삼켰다.
저 또한 그 연회에 참석하는 게 자동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은 불유쾌했다.
‘또, 그 연기를 해야 한다니.’
하지만 이번 난관만 넘기면 당분간은 평화로운 삶을 지속하는 게 가능할 터였다. 이브는 그날만을 생각하며 이 번거로운 일들을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누가 알려 줬어?”
그녀가 그 소식을 일찌감치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는지 발레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의 눈빛은 이미 누구인지 확신하는 듯 짙어져 있었다.
“응, 자비에랑 글렌 공녀.”
이브는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 딱히 숨길만 한 일도 아니었다.
“자비에…….”
발레리안은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생각에 빠진 듯 그의 시선은 테이블 언저리에 맴돌고 있었다. 조악한 질투심에 휩싸이기에 앞서 발레리안은 자비에가 누군가를 이토록 신경 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또 하나의 소식.
오필리아 글렌이 이브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발레리안은 이브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필리아 글렌.’
사교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그도 오필리아 글렌이 얼마나 까다롭고 도도한 성미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성녀의 무도회 참석 소식까지 전달해 줄 정도로 이브와 글렌 공녀의 사이가 가까워졌단 말인가?
사회성이랑 거리가 먼 이브와 공녀가 친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거지.’
악마들은 본디 사람을 홀리거나 매료시키는 것에 능숙한 종족이었다. 그럼 이브도 그런 방법으로…….
‘아니, 아니다.’
발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새하얀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루비색 눈동자를 천연스레 깜빡이는 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면에서도 악마로 보이지 않아서 더 보기가 괴로웠다. 그에겐 여전히 사랑스러운 소꿉친구이자, 약혼녀의 모습이었다.
말없이 자신을 보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발레리안의 얼굴에 이브는 눈만 끔뻑거렸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괜히 머쓱해진 이브는 제 얼굴을 긁적였다.
“아마 유리가 이브의 정체를 무도회에서 밝힐 생각이겠지.”
한참 동안이나 이브를 빤히 보던 발레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브는 움찔했다. 그가 거기까지 추측을 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이브,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거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리면, 발레리안이 필시 말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와 함께 가.”
그가 입을 열었다. 이브는 그가 또다시 도망가자고 제안하자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진심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면 더 비밀로 하기 힘들단 말이야…….’
그를 속이는 입장에서도 양심의 가책이 막대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이브는 어쩔 줄 몰라 시선만 굴렸다.
‘그래, 이번 일만 해결하고 나서…… 진실을 말하자.’
이브는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유리가 성국에만 무사히 돌아간다면, 발레리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겠노라고.
‘그때까지만…… 잠깐 오해해 줘.’
이브는 미안함을 담은 시선으로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감정이 담긴 시선을 마주한 그는 어떻게든 그녀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 * *
발레리안이 백작저를 나설 때 백작 부부가 배웅을 하러 나왔다. 이브는 그 모습을 어색하게 지켜보았다.
‘왜 저러시는 거지?’
평소엔 발레리안이 저택에 오든 나가든, 둘이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거나 피크닉을 하던 분들이었다.
이따금 상식을 넘어서는 무심함을 보여 주는 부모님의 모습에 이브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는데.
그들이 갑자기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니 이브는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조심히 돌아가렴, 발레리안.”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이랑 부인께서도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발레리안은 부드러이 대꾸했지만, 그가 그들을 보는 눈빛만큼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이브는 당연히 부모님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그가 놀란 거라 생각했으나, 그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이브는 그가 살짝, 아니 매우 불안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왜 불안해하는 건지 이유를 찾지 못하던 이브는 그가 뒤돌아선 뒤에야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
그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듯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악마라고 생각해서 걱정되었나 보네.’
아마 그 걱정은 제 딸이 바뀐 지도 모르고 마냥 친딸이라고 믿고 있는 백작 부부를 향한 것이리라.
물론 발레리안, 그 혼자만의 착각이긴 했지만 말이다.
“정말 발레리안한테는 미안해요…….”
“그러게 말이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 줄 걸 그랬소.”
그때 뒤에서 의미심장한 대화가 잇따라 들렸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소리였다.
이브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침에 노아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대체 노아가 어떻게 말을 해 두었길래!’
저 무심함의 표본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발레리안을 보며 미안함을 느낀단 말인가.
이브는 곧장 지나가는 사용인들을 붙잡아 노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역시나 그 또한 정원에 있는 그네에 누워서 늘어져 있었다. 책을 안대 삼아서 얼굴 위에 덮은 채.
‘놀기 좋아하는 한량인 건 완전히 부모님이랑 판박이라니까.’
힐리오스 황실의 징세관은 독특하게 세금 철에만 업무를 했다. 노아가 징세관에 지원한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 분명했다.
“노아 에스텔라.”
그녀는 달콤한 오수에 취해 있는 그를 망설임 없이 깨웠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이브가 곧바로 물었다.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대체 뭐라고 말해 둔 거야?”
“잘.”
그걸 물으려 굳이 깨웠나. 이브를 노려본 노아는 다시 얼굴에 책을 덮고 잠을 청했다.
이브는 그 책을 멀리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