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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67화 (67/100)

67화

공작 성으로 돌아온 발레리안은 쭉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하루라도 훈련을 빠트리지 않았던 그가 오전 오후 훈련을 빼먹기 일쑤였고, 홀연히 어딘가로 떠나 버리곤 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본 루드비히 공작은 발레리안이 이브 에스텔라의 정체에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짐작했다.

제 약혼녀였던 사람이 마법사였다.

그 사실은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만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엔 발레리안의 상태가 심각했다.

공작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마치 악마라도 본 얼굴이군.’

어릴 적부터 사명감과 의무에 파묻히다시피 살았던 제 아들을 떠올리면 마법사의 존재가 일반인보다 더 충격으로 와닿을 수 있었다.

루드비히 공작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과거, 멜린의 죽음을 잊지 못한 그가 엘라의 책임을 내팽개치자, 그 책임이 고스란히 제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 발레리안을 향한 마음 한쪽엔 늘 죄책감이 공존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보다 더 엘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아들의 모습에 안심하며 그 부채감을 덜어 냈다.

한데 인제 와서는 그 사실이 제 아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똑똑.

루드비히 공작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누구지?”

“접니다, 아버지.”

발레리안이었다. 이브 에스텔라에 대한 진실을 말해 주고 난 뒤로, 처음으로 집무실로 찾아온 것이었다. 루드비히 공작이 의아한 시선으로 집무실에 들어온 발레리안을 보았다.

“성녀 이유리를 성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습니다.”

발레리안은 곧장 용건을 꺼내었다. 그의 말에 루드비히 공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유가 뭐지?”

뭐냐고 물었지만, 공작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이브 에스텔라와 관련된 일이겠군.’

성녀를 성국으로 보내는 일은 루드비히 공작의 입김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버지도 아시는 사실이니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

저렇게까지 진지한 아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루드비히 공작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가만히 발레리안의 말을 기다렸다. 발레리안은 입술을 깨물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유리가 이브의 정체를 밝힐 것이 걱정됩니다.”

루드비히 공작의 눈빛이 굳어졌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마력을 볼 수 있는 성녀라면 이브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군. 하지만 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실과 성국의 동의도 받아 내야만 하지.”

“만약 돌려보내지 못한다면, 제가 임의로 마차를 태워서라도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발레리안.”

그의 푸른 눈동자를 본 루드비히 공작은 발레리안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네 행동은 성급하다. 잠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해라.”

“그러면 이대로 이브가 죽는 걸 보라는 말씀입니까?”

“행여 정체가 밝혀지더라도…….”

루드비히 공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법사. 그 존재는 황실에서 큰 해악으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발레리안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이례적으로 공작이 제 말에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발레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잘 아시는군요. 이브가 악마라는 게 밝혀지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악마…….”

루드비히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악마라고?

지금 제 앞에 있는 아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브 에스텔라가 악마라고 했나?”

“……예.”

발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이브 에스텔라가 악마라고?

‘그럴 리가 없다.’

에스텔라 가문과 왕래를 한 건, 이브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였다. 그러니 공작은 그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보아 왔다.

심지어 그땐 한창 자신이 엘라로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사람과 악마가 바뀌었다면.’

디에고 루드비히, 절대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브 에스텔라가 직접 그리 인정했나?”

“……예.”

거듭된 질문에 발레리안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루드비히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리 알고, 대주교 아리엘에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곤 집무실을 나갔다. 루드비히 공작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뿐 그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뜻밖의 전개에 미간만 매만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군.’

진짜 악마가 악마라고 긍정할 리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발레리안을 죽이려고 들었겠지.

‘그러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왜 이브 에스텔라가 그런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그 해답을 금방 알아냈다.

“가족이군.”

본디 마법사는 발견 즉시 그 가족까지 몰살을 당한다.

하지만 악마라는 족속은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걸린다면 그 악마를 처형하는 선에서 끝이 난다.

진실을 깨달은 루드비히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착잡한 빛으로 물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리엘의 말에 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보고 성국으로 돌아가라고요?”

“루드비히 공작이 성녀님을 위해서 힘을 써 주겠다고 하는 조건으로 성국에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성녀님께도 좋은 제안이에요.”

아리엘은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적당히 알아먹고 함께 성국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시원찮은 판이거늘.

오히려 성녀는 길길이 날뛰며 절대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뻗대고 있었다.

“절대 싫어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처럼 도망가라고요?”

“……성녀님.”

그 순간, 유리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제가 성국으로 돌아가면 리안도 함께 돌아간다고 하나요?”

“당연하죠. 발레리안이 성녀님이 홀로 성국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둘 리가 있겠나요?”

호호, 웃음을 흘린 아리엘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한 치 망설임 없는 그녀의 대답에 유리는 일순 안심했으나 불안감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리안한테도 한번 물어봐 주세요.”

“네? 네, 그리하도록 하지요.”

아리엘은 일순 굉장히 성가시게 군다는 듯 성녀를 보았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잠시 뒤. 아리엘은 당황스러움을 가득 안고 루드비히 공작 성을 걸었다.

“전 성국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성국에 같이 돌아갈 것이냐는 물음에 발레리안이 단칼에 거절했던 탓이다.

아리엘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손톱을 까득까득 씹었다.

‘이브 에스텔라, 그 계집 때문이야.’

상황이 자꾸만 제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복도를 서성이는 그녀를 발견한 유리가 후다닥 다가왔다.

“리안이 뭐라던가요?”

하지만 이미 아리엘의 어두운 표정을 본 유리는 어렵지 않게 답을 얻었다.

‘발레리안이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구나.’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이브 에스텔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리엘이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또, 또! 그 이름이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들렸다.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

“아!”

또 지끈거리는 두통에 유리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유리의 눈빛에 기이한 광채가 맴돌다 사라졌다.

‘절대 도망가지 않아.’

* * *

시간이 흘러 어느덧 황실의 마지막 무도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터진 악마 사건으로 가면무도회는 취소되었고, 대신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로 만든 와인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브는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며 사무에 파묻혀 있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이브는 노크도 없이 벌컥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난입한 불청객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또 왜.”

이브는 익숙하게 짜증을 냈다. 들어온 사람은 노아였다. 그는 세상 태평한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이브는 섣불리 진실을 말한 제 입을 탓했다. 이렇게 노아가 과민 반응을 하며 난리를 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랑 아버지한테도 말하지 않길 잘했네.’

노아가 이 정도라면 부모님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노아가 설레발을 치며 쪼르르 부모님께 이 사실을 이르지 않은 점이었다.

“나한텐 최선의 선택이었어.”

“최선이 악마로 위장하는 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이가 없어진 노아는 황당한 시선으로 이브를 보았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오면 네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날 텐데?”

노아의 질문은 타당했다. 이브는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눈치 빠른 발레리안이라면 알아낼 수도 있겠지.”

그게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대책도 없고, 거짓말이나 치고.”

노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가 부모님한텐 말씀드려 놨어.”

“뭐? 뭐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워낙 조용하길래 그들에겐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아! 몰라!”

노아는 그리 소리치곤 집무실을 나갔다. 이브는 황망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화만 벌컥 내다가 가 버리다니.

‘온 김에 일이라도 도와주고 가든가.’

이브는 허탈한 시선으로 책상에 쌓인 서류를 보았다. 죽어도 가문 일은 하지 않는 게 이 가문 사람다웠다.

“황실과 글렌 공작 가문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거기서 편지를 보냈다고?”

이브는 집사장이 건넨 편지를 펼쳤다.

각각 자비에 황태자와 오필리아 글렌 공녀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를 펼쳐서 읽어 보았지만, 결국 두 편지 다 하나의 소식을 전해 주고 있었다.

‘성녀가 황실의 마지막 무도회에 참석한다.’

지금 성녀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 비판의 목소리가 클 때, 유리가 이런 대규모 무도회에 참석하겠다는 의미는 하나를 뜻했다.

거기서 유리가 이브 에스텔라의 비밀에 대해 밝히겠다는 것.

이브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전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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