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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66화 (66/100)

66화

한참 그녀의 말을 곱씹던 그는 혼란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속에 선연하게 떠오른 의문을 알아챈 이브는 다시 한번 제대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었다.

“난, 악마가 아니라고.”

그녀는 그에게 의미가 잘 전해지도록 말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일순 그의 동공이 커졌다가 금방 본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는 비교적 침착한 얼굴로 이브의 말에 대답했다.

“이브, 난 이브가 악마라도 상관없어.”

그녀의 부정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되레 그녀의 부정에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브는 그의 반응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악마다워서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것 같은…… 이 기묘한 상황은 뭐지?’

잠깐만.

그녀는 한 가지 망각했던 중요한 사실을 상기했다.

그가 저를 악마로 오해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그녀의 입장에선 분노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어떻게 날 악마로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악마란 족속이 얼마나 잔인하고 탐욕적인 존재였던가.

그런 악마와 그녀를 동일 선상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었다. 비단 모든 이가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 그럴 것이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아.’

오히려 얼마나 고민을 했길래 저리 눈 밑에 그늘이 진 걸까 상상하면 안타까움이 앞섰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황당했다.

‘완전히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게 틀림없어.’

다른 이가 그녀를 악마로 오해하고 있었다면 주먹부터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아예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심통이 난 이브는 미심쩍은 듯 물었다.

“악마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 진심이야?”

발레리안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이 뭔지 고민하다가 이내 그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응, 상관없어.”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한 그의 얼굴을 마주한 이브는 아연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그의 멱살을 붙잡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면서도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호구를 보는 듯했다. 기분이 아득해졌다.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응.”

진짜 돌겠네. 이브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지금 이 미련한 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가늠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차라리 날 배신해.”

이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발레리안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말에 얼굴을 창백히 굳히는 그를 보며 이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다며, 배신은 왜 못 해?”

“배신하라는 건…… 내가 널 죽여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렇긴 하지…….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발레리안이 악마인 그녀를 따라 같이 도망자 신세가 되겠다는 말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이브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사랑에 자기 목숨을 거는 바보가 어딨어!’

바로 내 앞에 있네.

이브는 제 목숨이 소중해서 그에게 모질게 파혼을 받아 내려고 발악했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발레리안을 떠올리면 그녀도 괜히 한쪽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 과정을 떠올리니 그와 그녀의 차이가 피부에 와닿았다. 서로를 대하는 온도가 이다지도 달랐다니.

새삼스럽게도 그녀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엘라였다면, 그리고 발레리안이 악마였다면…….

‘나도 죽이지 못했을 거야.’

그건 그와 같았지만, 같이 도망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터였다.

‘모른 척 발레리안을 밀어내는 데 급급했겠지.’

그게 자신과 그의 차이였다. 이브는 서로를 향한 감정의 온도가 다름을 깨닫자 마음이 한없이 복잡해져 입을 다물었다.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힐까?’

그러나 이브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던 탓이다.

마법사의 힘은 본디 같은 혈족 아래서만 계승되었다. 가족들이 저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지키려면…….

‘차라리 계속 악마인 척하는 게 나을 수도.’

발레리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생각을 고쳐먹은 이브가 한숨을 삼켰다.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그를 속이려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왕 착각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해 줘.’

그의 눈치를 살피던 이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유감스럽지만 난 여길 떠날 생각 없어. 난 지금 이곳이 썩 마음에 들거든.”

아직 유리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으니 남아서 지켜봐야 대처를 할 수 있었다.

도망치는 걸 권유한 발레리안이라면…….

‘날 악마라고 고발하지 않을 거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막상 속일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미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인걸.’

그 사실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거짓말이 수월하게 술술 나왔다. 이브의 대답에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에스텔라 백작님이랑 부인께선 아는 사실이야?”

“모르겠지. 제 딸이 악마랑 바뀌었다는 걸 어찌 알겠어.”

악마 릴리트의 모습을 떠올린 이브는 피식 웃으며 최대한 그녀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도록 연기를 이어 갔다.

‘진짜 악마 같잖아……?’

이브는 제가 한 실감 나는 연기에 스스로 흠칫했다.

비단 이게 그녀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발레리안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해졌다. 눈을 깜빡이는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부터 바뀐 거야?”

“널 만나기 훨씬 전부터.”

이브는 대충 둘러댔다. 괜히 정확한 시점을 말하다간 허점이 드러나서 거짓말이 들통날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끝내 그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이브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아, 너무 미안한데.’

차마 진짜 이브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못하는 저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브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유리가 말하기 전까지라도……내가 진실을 말해야할 텐데.’

다만 나중에 거듭된 이 거짓말을 들킨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걱정이 몰려왔다.

* * *

그날 새벽.

집에 돌아온 이브를 발견한 백작 부부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이, 이브!”

카트린 후작 가문에 가기 전, 제 부모님께 미리 제도를 빠져나가라고 단단히 일러두었건만.

‘아직도 여기 계시네.’

이브는 한숨을 푹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걸 눈앞에서 확인하니 더 아득해졌다.

‘발레리안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길 잘했어.’

그러다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너는 왜 도망 안 가고 여기 있어?”

노아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럼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줄 알았냐?”

이브의 반응에 덩달아 황당해진 노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그런 부끄러움도 없는 놈인 줄 알았다고?”

“그게 왜 부끄러운 짓이야. 앞가림 잘하는 거지.”

이브는 노아의 말을 정정했다. 그녀를 보는 노아의 시선이 더 세모꼴로 변했다.

“뭔데, 넌 내가 제도에서 혼자 남아 죽을 운명이면 냅다 도망치겠다는 말로 들리네?”

“당연하지.”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동생의 대답에 노아의 얼굴에 배신감이 맴돌았다.

‘왜 저런담.’

그 모습을 본 이브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노아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죽을 운명에 처했다면 최대한 구하려고 노력하겠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지 않나.

‘그땐 버리고 도망가야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불퉁한 표정의 노아를 향해 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엔 너도 미련하게 굴지 마.”

행여 그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는 일일 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브는 지금의 제 대답을 떠올리며 노아가 가족까지 데리고 도망가길 바랐다. 최대한 멀리.

“하여간 이성적인 척은 혼자 다 해.”

노아의 꿍얼거림을 무시한 이브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쌌던 짐은 다 풀어도 좋아요.”

그녀의 말에 백작 부부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니? 짐은 왜 싸라고 하고, 다시 풀라고 하고! 설명 좀 해 보렴!”

어머니의 채근에 이브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상황을 설명하다간 정말로 부모님이 나란히 기절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한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곧이곧대로 악마로 위장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이브가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이 잠시 절 의심했었는데, 제가 잘 말해서 의심을 풀었어요.”

“……뭐, 뭐?! 뭐라고 의심했었다는 말이냐!”

이번엔 아버지가 기함하며 이브를 재촉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이제 걱정하실 일은 없어요.”

이브는 최대한 든든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빠르게 제 방으로 걸어갔다. 완전히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아도, 워낙 단순한 분들이라 다음 날 이런 일 따위 잊어버릴 게 분명했다.

이브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탁.

“야, 잠깐.”

노아였다. 그가 문틈에 손을 끼워 넣고 문을 붙잡았다. 비교적 부모님보다는 눈치가 있는 녀석이라 더욱 상대하고 싶지 않은 형제였다.

“뭔가 이상한데? 이야기 좀 나누자.”

노아가 대화를 제안했다. 이브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은데.”

“이것 봐.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대화를 피하려는 거 아니야?”

“피곤해서 그런 거야!”

괜히 이럴 때 눈치가 빠른 노아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몰라도 나한텐 사실을 말해 줘야지. 발레리안이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는데, 어떻게 그 의심을 피해? 그 과정에서 생략된 게 너무 많잖아.”

“누가 듣겠어!”

이브는 행여 지나가는 사용인이 듣고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할까 두려워졌다. 결국 그녀는 제 방에 노아를 들였다.

“그래서 어떻게 의심을 거뒀는데? 게다가 발레리안이 보통 녀석이던가? 명색이 엘라인데.”

이브는 꽤 집요한 추궁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말하는 게 낫겠어.’

발레리안을 속이려면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내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사실…… 발레리안이 날 악마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뭐?!”

예상대로 그 반응이 거셌다. 기함하는 노아를 보면서 이브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인정했고.”

노아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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