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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65화 (65/100)

65화

이브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진짜인가? 제 귀를 이렇게까지 의심한 적은 처음이었다.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어, 방금?”

“이대로 있으면 네 정체를 들키는 건 순식간이야.”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같이 도망가자는 거야?”

이브는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지금 발레리안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지? 도망가자고?

“응.”

“제정신이야?”

이브는 그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사가 빠져도 한참 빠진 게 아닐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이상한 약이라도 주워 먹고 온 건 아니지……?”

술에 취한 건 아닌 걸까? 그러나 그에게서 술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정상이야.”

“아니야……. 발레리안, 넌 지금 미쳐 있어.”

“널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하는 게 정상이라면 차라리 미쳐 있는 게 나아.”

진심이 담긴 그의 눈빛에 이브는 일순 말을 잃었다.

이브는 그가 성검을 발검하지 않은 것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진심이야?”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 누가 거짓으로 말하겠나. 그녀도 자신의 질문에 어폐가 있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마치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도망가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녀가 그와 나란히 손을 잡고 도망가면, 그도 그녀처럼 도망자 신세를 면피하지 못할 터였다.

절대로 발레리안까지 그리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제 가족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면서 함구한 죄라도 있지, 발레리안은 그녀의 가족에게 속아서 약혼한 죄밖에 없었다.

“이러지 마. 그러면 안 돼……. 리안.”

그의 진심을 알게 되어 감동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절벽 위에서 동반 자살이라도 하자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발레리안.”

“……이브, 넌 날 정말 혼란스럽게 만들어.”

발레리안은 그 자신을 설득하는 이브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았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

모든 생물이 잠에 빠진 깊은 밤, 새벽 사이에 그는 뜬눈으로 번민에 휩싸였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의 사실 때문이었다.

이브 에스텔라가 악마다.

그 단순한 사실은 그의 영혼, 살아왔던 뿌리까지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아마 제국에서 자신보다 악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디 악마들만큼 자신의 욕망만으로 움직이는 족속이 없었다. 그걸 어렸을 때부터 악마들을 만나며 뼈저리게 느껴 왔다.

그럼 악마인 이브도 분명히 그에게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접근했을 터였다.

엘라인 그에게 접근한 악마의 의도는 너무나 투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있는 이브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순수한 걱정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만약 저것이 연기라면.’

출중하고 완벽한 연기력이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설사 연기라도 그 연기에 속아 넘어가고 싶은 그 자신이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재잘거리던 그 모습까지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수렁에 빠져 끝없이 들어오는, 거짓을 담은 물에 질식하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대로 모른 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진실을 알게 되었고,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만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악마는 죽어 마땅한 존재다.’

이 명제가 제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내 곁을 떠났던 거야?”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이브는 잠시 입을 닫았다가 이내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차피 모든 게 밝혀진 마당에 숨길 게 뭐가 있나 싶었다.

“너한테 죽고 싶지 않았어.”

“그러면 이브가 날 죽이면 되잖아.”

“……뭐?”

발레리안의 말에 이브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녀석이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나보고 자신을 죽이라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런 눈빛을 담아 그를 보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지 입술을 일자로 굳힌 채 진지하게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널 어떻게 죽여.”

그 말을 하는 이브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단순히 힘과 실력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건 그를 처음 만나서 반했을 때부터 쭉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

그가 그녀의 대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탄식하듯 웃음을 흘렸다.

“정말 달콤한 말이네. 왜 하와가 열매를 먹고 추방을 당했는지 알겠어.”

그녀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와와 나무 열매.

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나무 열매를 먹고 추방당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에 널리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갑자기 왜 낙원의 추방에 대한 얘기가 나온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게 내가 참 머저리 같아.”

그의 표정에 놀라기도 전에 이어진 말에 이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머저리? 그리고 진심이 아니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면서 진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녀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서슬 퍼런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이 아니라도 나도 감정을 가지고 있어. 똑같이!”

단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을 감정도, 진심도 없는 악마로 매도한다는 게 분하고 서러웠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본 발레리안은 홀린 듯 그녀의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이브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하다가 그의 손을 매몰차게 쳐 냈다.

“지금 내 말까지 농담처럼 들려?”

“아니…….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아.”

그래서 더 큰 일이지.

발레리안은 뒤의 말은 입에 담지 않고 속으로 삼켜 냈다. 그러나 이브는 기민하게 그의 기색을 눈치챘다.

이브는 발레리안의 모습이 너무 극단적인 것 같아서 혼란이 왔다.

‘마법사가 위험 분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반응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뭔가 대화의 흐름이 자꾸 비껴 나가는 것 같았다.

왠지 그는 그녀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혹시 발레리안, 너는 내가 인간이 아니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차마 입에 담기엔 괴로워 보였다.

이브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면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물의 숲에서 악마의 사체를 발견했어.”

“악마의 사체라면…… 혹시 릴리트?”

“이브를 납치…… 한 악마의 이름이 릴리트라면.”

과연 납치는 맞는 건가.

발레리안은 말을 멈추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릴리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발레리안의 말에 제 옷을 꽉 쥐었다.

‘그러면 내 마력도 거기 남아 있었겠구나.’

책을 보니 마법사에 의해 죽은 사체엔 고유의 마력이 필히 남게 된다고 했다.

그걸 알게 된 건 이미 릴리트를 죽이고 난 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알아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마법사는 100년 전에 멸종했는데.’

오히려 그 마력을 봤다면 마법사보다는 악마로 오해하기 십상…….

‘서, 설마!’

이브는 뇌리에 스친 가정에 번개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설마 지금 날 악마라고 오해하고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한데 왠지 그녀의 감은 강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악마로 오해하고 있노라고.

만약 그런 거라면 환장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그런 오해를 하다니!’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고 나니, 지금의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다 이해가 되었다.

‘악마는 위선과 가식의 산물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태양의 힘, 성검의 보유자이자 악마의 처형자로 불리는 발레리안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모든 말을…….’

진심이 아니라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이라고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오해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한편으론 악마로 오해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발레리안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안쓰럽기도 했다.

‘한편으론 좀 웃기기도 하고.’

아니지. 이건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가 악마가 아니라 마법사일 뿐이지, 인간이 아닌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웃음기가 싹 메말라 없어졌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지?’

사실을 깨닫자마자 스친 생각은 이 오해를 어떻게 해결하냐는 것이다.

이미 그녀를 악마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서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 주기나 할까?

‘오히려 악마니까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겠지…….’

생각할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해 주는 것 외엔.

“……저, 발레리안.”

“…….”

그녀의 부름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담았다. 이브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악마 아니야.”

어, 말을 내뱉고 보니 뉘앙스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브는 제 착각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녀를 내려다보는 발레리안의 시선이 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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