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래도 이렇게 카트린 후작 부인이 불러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이브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좀처럼 웃지 않았던 그녀가 만개한 꽃처럼 밝게 웃자 다들 홀린 듯 그녀를 보았다.
도도하고 신비로운 미인이라 생각해 왔던 에스텔라 영애가 웃으면 더 아름답다는 걸, 그들은 눈앞의 상황으로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원래 사람들은 미인에 약한 법이지.’
이브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기민하게 제 미모를 적당한 타이밍에 써먹은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글렌 영애와 자비에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모가 월등하게 잘난 사람한테는 그녀의 미인계에 면역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렴 어때.’
지금은 여론을 제 편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지, 글렌 영애와 자비에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아니지, 글렌 영애의 마음은 얻는 게 좋은데.’
이런, 글렌 영애는 어느 쪽이 취향이려나.
이브가 고민하는 사이, 귀족들은 이브의 연기에 맞장구를 치며 성녀를 비난했다.
“어쩐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성녀가 제국 귀족을 물 먹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대부분은 성국에 반감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세상의 악마를 무찌르는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성국이지만, 생각 외로 성국을 좋아하지 않는 제국 귀족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 귀족들의 대부분은 무관들이었다.
특히 대대로 국경에서 외부 세력의 침략을 방어하며 수호하던 귀족 가문들은 황실의 맹목적인 성국 지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명정대를 표방하고 있지만, 황실이 암암리에 야만인과 전투를 치르는 귀족들보다, 악마와 전투를 치르는 성국을 더 예우하고 지원해 주는 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100년 전, 악마 소환 사건으로 인해 제국이 몰락할 뻔한 일 이후로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무관들은 황실의 일방적인 지원이 언젠가 독화살이 되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성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경계하던 무관들에게 악재가 터졌다.
바로 ‘성녀 강림.’
그들은 성녀의 데뷔탕트를 제도에서 주최하는 것을 크게 반대했지만, 황제의 초대로 묵살당했다.
하지만 에스텔라 영애로 인하여 그들이 성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구실이 생겼다.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성녀를 비판하고 비난했다.
‘이제 나는 이 무관 귀족들과 한 몸이 된 거지.’
이제 유리가 자신이 마법사라는 주장을 펼쳐도 이 귀족들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주장을 거짓으로 만들 터였다.
그게 바로 이브, 그녀가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였다.
‘이제 내가 발레리안을 배신한 이유도 정당화되었으니.’
이브 에스텔라, 그녀는 충분히 성녀의 역린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사과를 강요하지 않은 건, 어차피 나도 똑같은 짓을 할 거였으니까.’
처음에 유리가 그녀를 건들지 않으면 되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이브는 자구책을 펼쳐야 했다.
그녀의 수법을 눈치챘는지 오필리아 글렌의 눈빛이 묘해졌다. 미묘하게 그 눈빛에 웃음기가 스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장내가 찬물을 맞은 듯 조용해졌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늘 불길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던데.
이브는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에 몰렸다는 걸 깨닫고, 그들의 시선을 쫓았다.
“……발레리안.”
그를 발견한 이브는 당황한 나머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금발 아래 묘하게 그늘이 진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잘생긴 미모는 여전히 수려하고 빛이 났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소공작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안색이 좀…….”
“그러게요,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성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나 봐요.”
누군가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걸까요? 소공작은 이런 곳에 잘 오지 않잖아요.”
그건 이브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건지 당혹스러웠다. 어쨌거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열심히 연기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레리안이 말 한마디라도 잘못 꺼내면…….’
그녀가 열심히 작업해 둔 밑밥들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지. 해일처럼 돌아와서 그녀를 휩쓸고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도 있었다.
‘거기다 유리에 대해 잔뜩 험담해 놓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발레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되지 않…… 아니, 상상은 잘되었다. 인간도 아닌 그녀가 성녀를 나쁜 사람으로 몰고 있는데, 반응이 예상 안 된다면 바보였다.
‘날 비난하겠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이브는 점점 몸을 굳혔다.
아무래도 정말 날 만나려고 온 모양새였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마지막 만남 때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설마? 공개 처형을 하러 온 건가?’
아아. 이브 에스텔라.
짧은 생이었지만 파란만장했다…….
그녀는 책상 속에 넣어 둔 유언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제 앞에 선 발레리안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만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신지…….”
주변 시선을 의식한 이브가 슬쩍 눈을 뜨며 어색하게 물었다. 발레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브,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자, 잠깐만. 알겠으니까 이건 놓고 말해요.”
“발레리안, 영애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모습은 신사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때 자비에가 끼어들었다. 발레리안은 그런 자비에를 빤히 보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 얼핏 보기에도 썩 좋은 의미의 미소는 아니었다.
‘이러다 싸움 나겠네!’
이브는 이 싸움의 중심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자비에에게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줘요!’
자비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목이 몰리는데 어떻게 영애가 제 의견을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까. 싫다면 싫다고 말해도 됩니다. 에스텔라 영애.”
어디서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나는데요. 이브는 슬쩍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에 핏줄이 서 있었다.
그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인지, 그가 이를 가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낸 구조의 눈빛을 읽었습니다.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싫다면 싫다고 말할 용기는 내도 됩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자비에.”
발레리안이 흉흉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자비에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런 불경한 언사를 담는 모습까지 보았는데, 어떻게 너에게 에스텔라 영애를 맡긴다는 말이지?”
“걱정하지 마. 내가 네가 아닌 이브를 다치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자비에는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뜻인가?
가히 이성적 판단을 거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러다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아 이브는 현기증이 일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왜 이래!’
그녀는 급히 발레리안의 팔을 잡고 끌었다.
“영애!”
당황한 자비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이 파티장에 발레리안을 이대로 놔두는 게 현명치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비에, 쟤는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람!’
괜히 불나는 곳에 기름을 퍼붓고 있었다. 원래 자비에가 이렇게 참견쟁이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당혹스러웠다.
카트린 후작 가문의 정원으로 나온 이브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로 온 거야……?”
파티는 저녁에 열려서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난 상태였기에 밖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정원에 있는 전등 하나에 의존해서 사물을 식별하려니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
그녀의 물음에도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할 말이 있다면서 불러 놓고 뜸을 들이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단둘이 고요한 곳에 있으니 또다시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녀는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인간이 맞냐고 물은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든 근거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추측은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나 모가지 쓱삭- 당하는 건가?’
이브의 안색이 조금 파리하게 질렸다.
아무래도 파티장 같은 공개적인 곳에서 칼부림하는 건 꽤 잔인한 광경이 될 터였다. 여기로 따로 끌고 온 것은 그런 일을 방지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때 그 악마는 그냥 가차 없이 죽였는데.’
아론의 탈을 썼던 악마를 떠올린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이 부실 만치 찬란한 빛을 내던 성검이 악마의 가슴을 뚫고 소멸시키는 장면은 잔인하기보단 신성스럽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내가 악마가 아니라 마법사라서 그런 공개 처형은 면한 건가?’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오만 생각이 다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래도 티끌만 한 희망은 있었다.
그가 아직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모른다는 사실-.
“이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눈빛을 본 순간 이브는 제 안의 작은 희망이 단숨에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다 알고 있는 거야.’
그가 이렇게 괴로워하며 말하길 머뭇거리는 걸 보아선 분명히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리라.
그래도 전 약혼녀라고 바로 죽이지 않는 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늦지 않았다고?’
그러면 교황청에 자수하고 신성 재판에 끌려가라는 뜻인가.
그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이브는 허무한 미소를 흘렸다.
“늦지 않았다고? 아니야, 늦었어.”
“이브.”
“엘라한테는 즉결 처분권이 있잖아? 여기서 깔끔하게 날 죽이면 되겠네.”
즉결 처형도 아니고 즉결 처분권.
이렇듯 제국에서 악마와 마법사는 살아 있는 생물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하는 이브는 더 나락으로 치닫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죽을 거라면 희망 고문을 당하지 않고 죽고 싶었다.
한편으론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차라리 발레리안한테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하는 뒤늦은 후회도 찾아들었다.
하지만 악마처럼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저 선입견만으로 죄인처럼 숨어 사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따라 죽으려고 들 게 분명하지…….’
제가 말려도 가족들이 함께 벼랑에 떨어지겠다고 우기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선고를 기다렸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거리다가 결심의 빛이 어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브, 나랑 같이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