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위가 조용한 새벽 아침.
에스텔라 백작저는 막내딸의 돌발 발언에 발칵 뒤집혔다.
“오늘 혹시 모르니까…… 어머니, 아버지, 노아. 모두 짐을 싸 두세요. 그리고 다른 식솔들도.”
모두를 소집한 이브는 이제 막 잠이 깨서 휘청거리는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진지한 이브의 모습에 그들은 이 상황이 단순한 농담 따먹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노아가 입을 열었다.
“설마…… 다 들킨 거야?”
“아직은.”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데……!”
그녀의 무책임한 말에 노아는 복장이 뒤집혔다. 백작 부부도 이브를 채근했다.
“이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 주거라!”
“그저께 그 녀석이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의 오라비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이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저께 발레리안이 와서 나보고 인간이 맞냐고 물었어.”
“그거 너한테 욕한 거 아니야?”
노아는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그 녀석 입장에선 네가 황태자랑 약혼하고 뒤통수를 휘갈겼는데 그런 얘기가 나올 만도 하지.”
“그런 얘기가 아니었어!”
이브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지금 이 상황은 장난으로 치부할 만한 게 아니었다. 노아는 그녀의 험상궂은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런 거 분간 못 할 정도로 바보인 줄 알아? 혹시 모르니까 짐들 싸 놓으세요.”
“이럴 수가…….”
다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기운이 달아났는지 다들 혼비백산하며 제 방으로 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아는 혼자 남아서 그런 이브가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너 그 모습은 뭐야?”
화려하게 치장한 이브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브를 노려보았다.
“도망자가 왜 그렇게 눈에 띄게 꾸며?”
“나는 도망 안 갈 거야.”
이브의 단호한 대답에 노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단박에 소리쳤다.
“미쳤어? 남아서 혼자 죽으려고?!”
“쉿. 다 듣겠어!”
“설마 이걸 비밀로 할 셈……! 억!”
노아가 계속 목소리를 높이자 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를 한 대 갈겼다.
“나 지금 둔기로 맞은 것 같아…….”
“엄살 좀 그만 피우고, 난 오늘 어딜 좀 갈 거야.”
“그 상태로 어딜 간다고?”
기함하는 노아를 향해 이브가 입을 열었다.
“카트린 후작가. 거기 파티에 참석할 거야.”
“뭐? 최후의 파티도 아니고, 그게 무슨…….”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을 바에야, 차라리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이브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 * *
“정말 여기에 에스텔라 영애가 온다는 말인가요?”
“네, 그럼요. 그래서 제가 같이 오자고 했잖아요.”
“어머, 어머.”
“전 에스텔라 영애를 실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카트린 후작 가문에서 주최한 파티. 그곳에 모인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본래 카트린 후작 혹은 후작 부인과 연을 맺어서 이곳에 방문한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참여 사유가 달랐다.
바로 이브 에스텔라가 이 파티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역시 카트린 후작 가문의 명성을 알아본 거겠지요!”
“후후,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카트린 후작 부인은 한껏 어깨가 으쓱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한창 에스텔라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머! 저기, 에스텔라 영애 아니에요?”
“맞아요.”
누군가 한쪽을 가리키자 일제히 이목이 그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탄성을 흘렸다.
한편 이브는 저에게 시선이 쏠리자, 제 계획대로 되었다는 걸 알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멈칫했다.
그러곤 빠르게 장내를 훑었다. 혹시나 발레리안이 있을까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발레리안이 나서게 된다면…….’
지금 제가 하려는 일도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될 터였다. 이브는 부채로 가린 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발레리안은 없었지만,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황태자 전하!”
다들 예기치 않은 유명 인사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이브도 이곳에 자비에가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에 온 거람?’
중앙에 숨어 들어온 악마를 수색하느라 황궁에서 머리털이나 뜯고 있을 줄 알았다.
그녀의 표정이 뻔히 보였는지, 그녀에게 다가온 자비에가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냐는 건, 영애가 말했습니다만.”
“그거에 단호히 일만 하고 살 수 있다고 하신 분이 전하가 아니시던가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살인적인 업무량은 사람의 가치관도 바꾸더군요.”
“아하.”
이브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중앙에 상급 악마가 나와 비상이 걸린 지금, 전수조사를 명령한 황제 덕에 황태자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상태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 파티에 오신 거죠?”
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황태자를 보았다.
여기에 다른 악마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안전에 가장 신경 써야 할 황태자가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 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게…… 우연입니다.”
자비에는 흘긋 곁눈질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이브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오필리아 글렌이 다른 귀족들과 섞여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글렌 영애랑 같이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오필리아가 카트린 후작 부인이랑 친분이 있어서 함께 파티에 가자고 해서 온 것뿐입니다.”
“그런가요?”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태자가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그녀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영애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녀를 보는 자비에의 시선이 미묘해졌으나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이브는 슬쩍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트린 후작 부인과 오필리아 글렌이 있는 곳이었다.
‘오필리아 글렌이 사교계의 중심이라더니.’
귀족들의 시선은 이브에게 몰려 있더라도 정작 귀족들이 자리한 곳은 글렌 영애의 주변이었다.
묘령의 젊은 영애인데 대단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카트린 후작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브는 다소곳한 미소를 지으며 카트린 후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바로 인사를 건네러 올 줄은 몰랐는지 후작 부인은 다소 당황한 눈빛을 했지만 이내 능숙히 인사를 받았다.
“나야말로 와 줘서 고마워요. 파티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거든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이곳에 왔답니다.”
이브가 맞장구쳤다. 카트린 후작 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카트린 후작 가문이 주최한 파티가 다른 파티에 비해서 사람이 많을 거라 말한 건 그만큼 영향력을 인정한 것이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그런 말을 하니 카트린 후작 부인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모쪼록 영애께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카트린 후작 부인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브는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어.’
그러곤 살짝 미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좋은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시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미소는 금방 흐려졌다.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에 물기가 아롱지기 시작했다.
“어머, 괜찮아요?”
주위에 있던 귀족 영애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브의 모습에 안타깝다는 듯 너도나도 손수건을 건넸다.
저에게 내민 손수건 중 하나를 집은 이브는 그걸로 눈물을 닦는 척하며 울먹였다.
“한 영애가 감당하기엔 힘든 일이긴 했지요.”
“그런 흉악한 소문이라니…….”
출발이 좋았다. 이브는 그 말을 자양분 삼아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원래 성녀님이 절 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모든 이의 시선이 이브에게 향했다. 그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다시 연기에 몰입했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성녀님은 루드비히 소공작을 좋아하고 있거든요.”
“어머! 그래서…….”
다들 이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부채 속에 가린 입가엔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특히 성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귀족들이 눈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브는 제가 쓴 각본대로 불쌍한 백작 영애의 연기를 수행했다.
“사실 제가 루드비히 경을 떠난 것도…… 악마들 때문이었어요.”
“어머!”
처음 듣는 소식에 저마다 탄성을 터트렸다.
“자꾸만 악마들이 절 미끼로 발레리안을 죽이려고 하고…… 계속 미끼가 될 수 없다고 버텨 봤지만, 인간에 불과한 저는 속수무책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왜 황태자 전하와 손을 잡게 된 거죠?”
주위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오필리아 글렌이 물었다. 꽤 날카로운 지적에 이브는 내심 움찔했지만, 미소를 삼켰다.
‘예상했던 질문이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을 지키기 위해선 그를 배신하는 방법밖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전하께 도움을 요청했고, 자애로우신 전하께선 제 부탁을 들어주셨답니다.”
“……어머.”
웅성거리던 귀족들의 말소리가 조용해졌다. 이브를 보는 그들의 눈빛은 어느덧 흥밋거리를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한마음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늘 도도하게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니던 에스텔라 영애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괜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좋아.’
이브는 제 뜻대로 흘러가는 반응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