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질문 하나로 무저갱의 바닥으로 치닫는 게 이런 기분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최대한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부디 물어보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혹시 이유리한테 이야기를 들은 건가?’
유리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좋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리에겐 때마침 좋은 패도 있었다. 바로 이브 에스텔라의 비밀.
그녀가 바로-
‘마법사.’
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약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브의 시선이 그의 허리춤에 있는 성검으로 향했다. 금방 저 성검을 꺼내어 그녀의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검에 손조차 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심증만으로 그러는 건가?’
그런 거라면 아직 충분히 잡아뗄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브는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며 잃어버린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발레리안은 흔들린 이브의 평정심을 눈치챈 뒤였다.
주먹을 불끈 쥔 그의 얼굴이 희멀겋게 변했다.
‘그럼 정말로.’
이브가 악마라는 말인가?
게다가 엘라의 힘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악마는 대악마급이었다.
전투에서 딱 한 번 대악마급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약 5년 전, 마물의 숲에 훈련을 나갔을 때였다.
처음엔 인간인 줄 알았지만, 이내 마물의 숲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은 없다는 걸 상기한 기사들이 각기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발레리안은 아버지의 구조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악마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체감했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어젯밤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다.
한 가지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홀로 마물의 숲에 간 건 두 번째였다.
기실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마물의 숲에 혼자 들어간 사람, 심지어 두 번이나 그 짓을 반복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리라.
누군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그를 미친 사람이라 욕하며 혀를 내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다.
“…….”
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이브는 그 침묵에 짓눌려 더욱 불안에 떨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내내 그녀는 이 자리를 박차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지,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 발레리안.”
이브의 재촉에 그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 말뜻, 그대로야.”
아론의 사건을 떠올린 발레리안의 얼굴에 섬뜩한 기운이 찾아들었다.
‘설마 이브도.’
아론처럼 악마에 의해 바꿔치기를 당한 거라면? 하지만 발레리안은 그 생각이 바보 같은 가정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이브가, 다른 이가 위장한 이브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당황하면 눈을 깜빡이는 습관부터, 그의 앞에서 긴장하면 일부러 여유로운 척 입가에 띠는 어색한 미소까지.
이 모든 게 다 거짓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정은 하나였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브 에스텔라는 악마였다는 것.
제가 사랑한 존재가…… 악마였다는 것.
“멜린을 죽인 건 대악마다.”
과거에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짓씹듯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뭉뚱그려지듯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다.
발레리안의 어머니를 죽인 악마는 바로 대악마였다.
어쩌면 제 앞에 있는 이브가 제 어미를 죽인 대악마일 수도 있다는 가정까지 도달하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안?”
이브는 그대로 입술을 깨물며 성큼성큼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대체 뭘 확인하러 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브는 멍한 얼굴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편 백작저를 나온 발레리안은 허탈한 미소로 제 허리춤을 보았다.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제 허리에 있는 성검엔 손도 대지 않았던 저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제 손으로 이브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셀라 커피 하우스의 2층 커피 룸.
그곳에 두 여인이 마주 앉은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무슨 용건으로 편지를 보낸 거야?”
한껏 치장한 유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유리를 보며 이브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전혀 반성의 기미도, 사과할 기미도 보이지 않네.’
이브도 구태여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억지로 받아 낸 사과만큼 부질없는 건 없었으니까.
이브는 슬쩍 창가 너머로 커피 하우스 주변을 살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발레리안이 없었다. 성녀의 호위 기사인 그가 보이지 않는다니 이상했다.
“발레리안이 안 보이네?”
“리안은…… 바쁘다고 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유리가 벌컥 화를 냈다. 이브는 ‘그래…….’ 하는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사실 유리는 가면무도회의 일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쪽에서도 유리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 쪽에서도 면이 서지 않아서 그를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 때문에 호위를 하지 않는다니!’
유리는 돌변한 발레리안의 태도에 시무룩해졌다. 다 눈앞에 있는 이브 에스텔라 때문이었다.
이미 파혼한 사이인데, 왜 계속 발레리안이랑 붙어 있단 말인가.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리는 흥, 콧방귀를 뀌며 이브를 노려보았다.
“용건이나 말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 봐야 해.”
유리는 불편한 얼굴로 재촉했다. 이브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뻔히 알았다. 유리가 이 자리를 가시방석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겠지. 나한테 잘못한 게 있는데.’
그녀도 내심 제가 잘못한 건 알고 있는 듯했다. 이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정체를 어디 가서 말하진 않았지?”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조만간 그럴 생각이었기에 뜨끔했지만, 유리는 곧바로 반박했다. 그녀의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기껏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이런 추궁이라니, 짜증 나 죽을 것 같았다.
씩씩거리는 유리를 보면서 이브는 답을 얻었다.
‘아직 말하진 않았나 보네.’
그러면 어제 왜 발레리안은 그녀를 찾아왔단 말인가. 이브는 더욱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젠 악마의 끄나풀로 모자라서 마법사라는 소문까지 났나 봐?”
유리의 비아냥거림에 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원작에서도 고집스러운 면모가 있긴 했지만, 그 고집이 여기서도 작용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유리의 모습을 보아선, 악마의 끄나풀이란 소문도 내버려 두었으면 나서서 증언해 주었을 게 분명했다.
‘이브 에스텔라는 사실 끄나풀이 맞아요!’
하고.
‘어쩌면 모르지.’
유리가 그 소문을 내는 데 옆에서 일조했을지도.
그녀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는데 소문이 이리 퍼졌을 리는 없었다.
악마의 끄나풀이란 소문은 정치적 도구로 정적을 제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법이라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녀가 증언한다면 다르다. 다른 일반인과 달리 마력을 분별하고 막대한 성력을 가진 성녀의 말은 그만큼 위력을 가진다.
이브 에스텔라, 그녀 하나 정도는 쉽게 매장시킬 만큼.
‘오래 버티진 못하겠어.’
유리가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비밀로 지켜 주는 날이 그리 길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심지어 이번 일로 유리는 세간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본래 이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매도해 제 행동을 합리화할 터였다.
“그런 소문이 나면 그건 정말로 너의 짓이겠지.”
이브가 서늘히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녀의 매서운 분위기에 압도당한 유리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니까 이만 제도를 떠나서 성국으로 돌아가.”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
유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소문을 퍼트리고서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너에게, 이 정도 요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브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여기 계속 있는 건 너에게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야. 차라리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
이브는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었다. 성녀로 내려온 이는 한 가지 방법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방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성녀인 유리라면 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유리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로 이브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기만한 건 너야! 난 잘못한 거 없어. 절대로 이대로 안 떠나!”
앙칼지게 쏘아붙인 유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커피 룸에 혼자 남은 이브는 머리가 아파서 이마만 짚은 채 앉아 있었다.
골치가 다 아팠다. 이미 오해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를 구제할 방법은 없었다. 그게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쪽은 그래도 명확히 방향이 보이는데…….”
발레리안. 그가 복병이었다.
대체 그는 무얼 알고 있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란 말인가.
‘혹시 그때 본 건가?’
가면무도회에서 그녀가 마력을 사용하는 건, 자신한테도 큰 모험이긴 했다. 특히나 발레리안의 앞에선.
그러나 그 소문을 불식시키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말 미미한 마력이었을 텐데.’
상급 악마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최대한 작은 수분에 마력을 응축시켜 악마의 몸에 침투시켰다.
그걸 눈치챘다는 건 말이…….
‘되네.’
이 세계의 최강자니까 이런 사소한 마력 하나쯤 간파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으으,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없네.”
머리를 감싸 쥐던 이브는 발을 동동 구르며 룸의 소파에 널브러졌다.